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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 Part 3. 분석심리학의 주요 개념

Joyfule 2015. 8. 25. 10:08

 

 

 

칼 융 Part 3. 분석심리학의 주요 개념


8. 융의 여자들


융은 그가 ‘밤바다여행’을 하던 중 어떤 여자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아니마를 발견하였다. 그 여자는 다음과 같이 잘못된 믿음을 그에게 주입하려 하였다.

“당신이 쓰고 있는 환상들은 예술이예요.”

융은 이렇게 술회한다.

“그녀와 논쟁하면서 나는 그녀가 교활함으로 가득찬, 내 아니마의 부정적인 측면임을 깨닫게 되었다.”

만약 그가 아니마의 말에 따라 자신의 경험이 단지 ‘예술’이라고 믿었더라면, 융은 그 경험에 대한 도덕적인 의무감을 느끼지 않고 쉽게 그것을 잊어 버렸을 것이다. 이처럼 아니마의 부정적인 형태가 꿈에 나타나거나 여성에게 투사되면, 남성은 재앙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진을 해버렸던 ‘프랭크 밀러’의 사례 이후에 융은 주로 긍정적인 아니마를 만나게 되었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대부분 여성이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융의 성적인 카리스마 때문이기도 했으며 그녀들은 대개 그에게 치료를 받았던 여성들이었다. 융은 서양문화에서 소위 ‘여성적인 의식feminine consciousness’라고 부르는 것들을 탐구했기 때문에, 마치 벌을 꾀는 꿀통처럼 매력을 발하면서 그들 여성의 아니무스 투사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융의 아내 에마는 이러한 ‘아니무스 하렘harem’은 물론 한 명 이상의 정부와 투쟁해야 했다. 융과 프로이트가 절친했던 1911년에, 에마는 프로이트에게 이런 사실을 털어놓았다.

“모든 여자들이 자연스럽게 그와 사랑에 빠진답니다. 자꾸 괴로워하는 저를 보고 칼은 내가 자기나 아이들에게만 신경을 써선 안된다고 해요. 그렇지만 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일까요?”

 

결국 에마는 자신 스스로가 정신분석가가 되어 성배전설에 대한 필생의 연구를 하게 된다.
여하튼 여성들은 융의 커리어의 진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한 직후인 1916년 2월, 분석심리학회the Analytical Psychology Club가 취리히에서 창설되었는데, 학회에는 시작부터 여성들의 활발한 참여가 있었다. 이는 1948년 칼 융 연구소C.G.Jung Institute가 설립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연구소는 오늘날까지도 교육과 치료의 업무를 계속하고 있다.

 

융의 연구가 세계로 전파된 세 번째 계기는 에라노스 컨퍼런스the Eranos Conference였다.

1923년 스위스인인 올가 프로브-카프텐Olga Frobe-Kapteyn이 이탈리아의 마죠르Maggiore 호숫가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이 컨퍼런스를 처음으로 개최했는데, 이는 후에 분석심리학파의 연례행사가 되었고, 동양철학과도 연계된다. (영어나 불어가 아닌 모든 단어는 제 맘대로 음역해서 써두었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나머지 언어는 전혀 읽을 줄을 모르기 때문에..^^:)
에디트 록펠러 맥코믹Edith Rockfeller McCormick : 미국인. 1913년부터 1923년까지 융에게 정신분석을 받았다. 후원자가 된 이후 1916년 분석심리학회에 모임장소를 제공하였다.


사비나 스필라인Sabina Speilrein : 러시아계 유대인. 1904년 융에게 분석을 받기 시작하면서, 친밀하고 열정적인 관계에 빠지게 된다. 후에 융과 프로이트 모두에게서 사사받고 분석가가 된다. 러시아로 돌아가지만, 자녀들과 함께 2차대전 도중 독일군의 희생양이 된다.


안토니아 볼프Antonia Wolff(1988~1953) : 스위스인. 1910년 융으로부터 분석을 받기 시작했고 곧 그의 정부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 관계를 유지했다. 안토니아는 융의 작업을 도왔고 분석가로서 훈련받아 융학파의 저널을 발간했다.


에스더 하딩Esther Harding (1988~1971) : 영국에서 융을 만나 분석과 훈련을 받기 위해 취리히로 그를 따라갔다.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에 분석심리학회를 세운다. 이 모임은 후에 연구소가 된다. 저서로 ‘여성의 신비Women’s Mysteries(우리나라에서는 '사랑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발간됨)’와 ‘모든 여성의 길The Way of All Women’이 있다.

메리 멜런Mary Mellon (1904~1946) : 미국인. 융에게 분석을 받으면서 그의 아이디어에 영감을 받아 그의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 볼링겐재단의 창시자이며, 재단에서는 에라노스 강연과 융의 연구모음을 출판했다.
올가 프로브-카프텐 : 융에게 분석을 받았고 적극적 명상과 동양철학과 관련된 분야를 발전시켰다. 메리 멜런과 협동으로 에라노스 논문을 출판했다.


아니엘라 자프Aniela Jaffe : 독일인. 융의 분석을 받았고 분석가로 훈련받았다. 재단의 비서였고 그와 함께 자서전작업을 한 개인비서이기도 했다.
욜란다 자코비Jolanda Jacobi (1890~1973) : 헝가리인. 융에게 훈련을 받았고 그의 방법론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냈다. 그녀는 재단창립의 주요 공헌자였다.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Marie-Louise Von Franz (1915~1998) : 독일인. 열 여덟살 때 융을 만나 언어학학위를 딴 후 그의 조수가 된다. 그녀는 라틴어텍스트를 번역했고, 융이 연금술을 연구할 때 협력했다. 융으로부터 분석과 훈련을 받아, 일생동안 분석심리학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취리히에 있는 연구소의 지도적인 등불이 되었다.

 

9. 초자연적 현상


예순 다섯살이 되던 1944년 초, 융은 넘어져서 발을 다쳤다. 이어서 심장발작이 일어났다. 약물에 시달리며 죽음의 문턱에 간 융은 무의식적인 착란상태에 빠져 체외유리out-of-body 경험을 하게 되었다.


코스섬Kos Island
터키 남서부 해안근교에 있는 그리스령 섬. 그리스시대에는 문예활동의 중심지였으며 히포크라테스의 출생지라고 한다.
“나는 어떤 운석 같은 우주 행성으로 날아가서 거대하고 시커먼 바위를 보았습니다. 그 바위는 어떤 사원 주위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 사원입구로 들어가니 작은 대기실이 있었고, 더 안으로 들어가니까 어떤 힌두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하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그 바위에서 나는 내게 무슨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 건지, 내가 왜 태어나게 되었던 건지, 그리고 내 삶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땅에서 어떤 얼굴이 솟아올랐어요. 그리스왕, 혹은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우스가 머무는 신전이 있는 코스Kos섬에서 온 바실레우스basileus였죠. 아하, 이 사람이 내 의사로구나, 하고 난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코스섬의 바실레우스라는 원초적인 형태를 하고 내게로 온 것이지요. 그는 ‘자네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말하자마자, 나는 정신을 차렸고 그 영상은 사라져 버렸지요.”


바실레우스basileus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왕, 또는 왕과 같은 유력자를 부를 때 쓰인 말.
융은 그러나 착란상태에서 깨어난 것에 저으기 실망하면서 삶으로 되돌아온 것을 원망스럽게 여겼다. 한편 그는 환각 속의 의사가 바실레우스라는 ‘원초적인 형태’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걱정스러웠다. 그것은 뭔가 치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환각의 의미는 내 진짜 의사양반이 내 대신 죽게된다는 뜻일거야. 이런, 그의 목숨이 위험할 지경인데, 이런 이야기를 해주어도 그는 아마 내 말을 믿지 않겠지!”

융이 중얼거리자, 간호하던 여인이 융에게 물었다.

“왜 의사선생님을 자꾸 ‘코스의 바실레우스’라고 부르시는 거예요?”

그러자 융이 정신을 차린 것을 눈치채지 못한 의사가 옆에서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융선생은 지금 환각상태에 빠져있는 거니까.”

 

의사는 며칠 뒤 융에게 이제 일어나 앉아 있어도 좋다고 허락해주었다. 그 때 융의 머릿속에 갑자기 1944년 4월 4일이라는 날짜가 떠올랐다.

그 날짜는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1944년 4월 4일, 융을 치료하던 의사가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패혈증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한 것이다.


융은 점점 건강을 회복함에 따라 더 많은 영상들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로써 밤마다 천상의 기쁨을 누리며 살았다. 이러한 경험들은 객관적인 진실과 똑같은 성질을 지닌, 진짜 실재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영원’이라는 단어를 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가 되는 非일시적인 상태의 엑스터시를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병을 앓으면서 거의 죽음에 이를 뻔한 경험을 한 이후, 융은 주요한 연구결과를 집필하였다. 자신의 영혼을 부르는 이상한 ‘무언가’가 전례없이 강해진 것을 느끼며 70대를 보내면서 이제 융은 그 존재에 목소리를 부여할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우리는 융이 초자연적인 현상에 익숙했다는 사실을 이미 공부하였다. 융은 집에서 유령을 본 적도 있었고, 한번은 그를 위협하는 여자유령에 쫓겨서 잉글랜드의 어떤 저택에서 차를 몰고 도망쳐나온 적도 있었다. 하루는 융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누군가가 물에 빠져서 죽어가는 영상이 갑자기 마음에 떠올랐다. 집에 도착한 융은 호수에서 배를 타고 놀던 어린 손자가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거의 익사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또 한번은 어느 결혼피로연장에서 어떤 낯선 남자와 범죄심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융은 자신의 생각을 쉽게 설명해주기 위해서 어떤 사람의 사례를 지어내서 이야기해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좌중에 당황스러운 침묵이 흐르고, 모두 융을 따돌리고 경멸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알고봤더니 융이 지어내서 말한 그 예가, 자신과 이야기하던 낯선 남자의 일생과 정확히 일치했던 것이다!


분석가이자 의사로서, 융은 늘 자기 환자들 주위를 맴도는 어떤 ‘조짐’ 같은 것을 감지하였다. 한 환자의 아내가 융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엄청나게 많은 새들이 어디선가 날아와서 조부모님의 방 창문밖에 수없이 몰려들었답니다.”

융은 이 이야기를 들고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 환자에게 이렇게 권했다.

“아! 당신의 치료는 거의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좀 걱정되는 게 있군요. 심장전문의에게 한번 가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환자는 융의 말대로 심장전문의에게 갔지만, 의사는 아무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돌아오던 길에 융의 환자는 거리에서 쓰러져서 집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곧 사망했다. 그가 집으로 옮겨질 당시 그의 아내는 이미 공포에 질려 있었다. 남편이 의사에게 간다고 집을 나서자마자 한 무리의 새들이 집으로 날아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우연의 일치에 대해서는 어떤 해석을 할 수 있을까? 융은 이렇게 답한다.

“전이transference가 환자의 어떤 부분, 즉 의사와 환자간에 어느 정도 무의식적인 연결고리가 생겨난 환자의 어떤 일부에서 일어날 때, 종종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이 생겨납니다. 나는 이런 경험을 이따금 했지요.”

 

융의 타고난 직관력과 인격의 순수한 힘으로 인해 그는 점차 구루, 즉 자신이 말한 ‘늙은 현자’와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그는 어떤 징조가 가지는 정신적 실재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성성의 측면을 탐험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중국의 신탁문서 ‘주역’에 빠져들었다. 융이 ‘주역’에 매료된 것은 1920년이었다. 볼링겐에서 보낸 그 해 여름, 그는 '주역'에 몰두하며 하루를 보냈다.

 

“나는 백년묵은 배나무 밑에서 ‘주역’에 나오는 기법을 연습하며 몇 시간 동안 앉아있었다.”
그렇다면 정신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간의 관계는 무엇일까? 융은 ‘주역’을 환자들을 대상으로 사용했었다. 예를 들어 한 청년은 강한 어머니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자기가 사랑하는 한 소녀와 결혼을 해야할지 확신을 할 수 없다고 융에게 말했다.

“저는 제 콤플렉스 때문에 또다른 ‘압도적인 어머니’를 가지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주역’에는 이렇게 나와있다네. ‘처녀는 강력하다. 그런 처녀와 결혼해서는 안된다’.”

 

융은 신성성에 대하여 적대적인 서양인들이 일종의 ‘악의적인 오해’를 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주역연구소를 설립하지 말라는 익명의 편지를 받고 그는 이렇게 경고했다.

 

“서구 정신의 끔찍한 편견을 피하기 위해서, 당신은 과학의 미명 하에 묻혀 있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융의 신비로운 신성성이라는 제 2인격과 과학자이자 이성주의자라는 제 1인격이 모호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대립은 융의 일생에 걸쳐, 그리고 그의 연구 전반에 걸쳐 꾸준히 나타난다. 모든 서양문물 기저에는 이러한 대극들opposites의 길항작용-마음과 물질, 영혼과 신체, 질서와 혼돈, 영원과 죽음 등- 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