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마음 속의 교묘한 죄.2.
- 제리 브리지스(Jerry Bridges) 지음 오현미 옮김
죄가 사라지다 - 죄의 개념조차 없는 시대
하나님은 이런 죄는 되고 저런 죄는 안 된다는 기준을 주신 적이 없다. 모든 죄는 다 불법이다.
울타리 밖에만 존재하는 죄
정신과 의사 칼 메닝거는 1973년에 펴낸 저서 『죄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Whatever Became of Sin』에서 이렇게 말했다.
'죄'라는 바로 그 단어,지금은 사라져버린 듯한 이 단어는 한때 당당한 말이 었다.그 의미는 분명 강하게 다가왔으며 불길하고 심각했다…하지만 이제 아니다.단어 자체는 물론 그 개념까지도 거의 사라져버렸다.이유가 무엇인 가?이제는 누구도 죄를 짓지 않기 때문인가?아니면 누구도 죄를 믿지 않기 때문인가?
자신이 말하는 바에 힘을 싣기 위해 메닝거 박사가 특별히 주목하는 사실이 있다. 해마다 발표되는 미국의 전국 기도의 날 기념 대통령 선언문에서 '죄'라는 말이 언급된 것은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선언문이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그것조차도1863년 에이브러험 링컨 대통령이 전국민에게 기도를 요청한 말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메닝거 박사가 주목하고 있다시피,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우리는 한 이십 년 전쯤에 '죄짓기'를 공식적으로 끝냈다."
이는 칼 메닝거만의 생각이 아니다. 작가 피터 반즈는 "뭐라고! 내가 죄인이라고?"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20세기 영국에서C. S.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난 장벽은,독자들 의 마음에 죄에 대한 개념이 거의 완전히 부재한다는 것이다."그리고2001년,신약학자D. A.카슨은 대학에서 복음을 전할 때 가장 기운빠지는 일은 학생들이 전반적으로 죄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학생들 은 죄짓는 법은 잘 알고 있지만,무엇이 죄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다."
몇몇 사람들만 유별나게 이런 평가를 하는 게 아니다. 다른 많은 이들의 말을 들어봐도 그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우리 문화에서 죄라는 개념은 사실상 통째로 사라졌다.
불행히도 죄의 개념은 교회에서조차 사라져가고 있다. 사회학자 마샤 위튼은 침례교와 장로교 목회자들의 탕자 비유(눅15:11-32) 설교 47편을 분석했는데, 이후 자신의 저서 『모두가 사함받다 All is Forgiven』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설교들에서 죄의 개념은 어떻게 된 것인가? 놀라지 말라. 죄의 개념을 설명하기 힘들어서 쩔쩔매는 목회자들이 많다… 이들의 설교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죄의 개념이 여러 면에서 세상의 감수성에 맞게 조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죄의 개념이 담겨 있는 설교라 할지라도 그 용어는 청중들 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최대한 순화되는 경우가 많다.
위튼은 목회자들이 죄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죄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 본성의 타락을 신학적으로 통찰할 수 있도록 분명한 설명을 해주기보다는 단순히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는 맹목적인 경계를 긋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죄의 개념은 우리 문화 전반에서 사실상 사라졌으며, 교회에서조차 현대인들의 감수성에 맞게 그 개념이 순화되었다. 실제로, 죄에 해당하는 성경 용어들은 우리가 쓰는 어휘에서 삭제되었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간음이란 게 없다. 대신 정사가 있을 뿐이다. 기업체 간부들은 절대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다만 사기 행위를 할 뿐이다.
한편, 우리가 속해 있는 보수 복음주의 교회의 형편은 어떠한가? 우리에게도 죄의 개념이 다 사라졌는가? 아니다.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낙태와 동성애, 살인, 기업체 고위 간부들의 화이트 컬러 범죄만을 죄로 여길 뿐이다. 그런 명백한 죄에 대해서는 쉽게 정죄를 하면서 남을 험담하거나 시기하고, 누구에겐가 원한을 품으며, 교만하고 정욕에 끌리는 우리 자신의 죄, 그리고 바울이 성령의 열매라고 일컬은 자질들(갈 5:22-23)이 부족한 것 등은 사실상 무시해버린다.
어떤 목사님이 교인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교인들은 목사님의 바람처럼 교회의 영적 필요에 대해 기도하는 게 아니라 하나같이 이 시대 문화의 죄악들, 주로 낙태와 동성애 등에 대해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교인들의 독선에 당황한 목사님은 결국 그 유명한 세리의 기도로 기도 모임을 마쳤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눅 18:13).
이 교인들의 기도에 드러난 그대로다. 이것이 우리 보수 복음주의에 만연한 죄에 대한 태도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우리는 성도들의 죄보다는 사회의 죄에 더 관심이 많은 듯 하다. 실제로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소위'보기 흉하지 않은' 죄 혹은 '용인할 만한' 죄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 형제자매에 대해 험담을 하고 불친절한 말을 내뱉을 때, 우리는 스스로 지금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아무런 의식도 없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해주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오래도록 그 상처를 마음속에 담고 살아간다. 세상의 죄인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나도 저렇게 되었을 텐데' 하는 겸손한 마음 없이 혼자 고고한 척 멸시하는 눈초리를 보낸다. 주요 교파에서 동성애자를 성직자로 안수했다는 소식에는 크게 분노한다. 물론 그런 소식에는 격노하는 게 당연하지만, 왜 우리 자신의 이기심과 비판적 태도, 참을성 없음과 분노에 대해서는 애통해하지 않는가?
그런 죄는 세상의 극악무도한 죄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고 말하면서 책임을 모면하려 하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죄는 되고 저런 죄는 안 된다는 가치 기준을 정할 권위를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 그보다 하나님은 야고보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 어느 하나를 범하면 율법 전체를 범하는 셈이다"(약 2:10). 우리로서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은 물론 그에 따른 처벌도 하나하나 따로 떼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온전한 하나다. 성경은 하나님의 율법이 여러 개라도 되는 양 '율법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단일한 전체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말한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이다. 또한 크리스천이 그 입으로 더러운 말, 곧 다른 사람을 헐뜯는 말을 쏟아낸다면 그 사람 역시 똑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이다(엡 4:29).
사소한 죄는 없다
물론 다른 죄보다 상대적으로 더 심각한 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간음을 한 적은 없지만 정욕이 담긴 시선으로 이성을 바라본 적은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욕이 담긴 눈길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사실상 마음속으로 간음을 한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살인을 하기보다는 그 사람에게 화를 내는 편을 택하겠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번에도 누구든 사람을 죽인 자와 형제에게 화를 낸 자는 심판을 받을 만하다고 하셨다(마 5:21-22). 사실을 말하자면, 모든 죄는 다 심각하다. 모든 죄는 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죄는 곧 불법이다"라고 말했다(요일 3:4). 모든 죄, 우리가 보기에 사소해 보이는 죄일지라도 죄는 곧 불법이다. 이는 단순히 한 가지 명령을 어기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요,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도덕적 뜻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관이 담긴 시민법에서는, 이따금씩 교통 위반 딱지를 떼는 게 고작인 '준법 시민'과 모든 법률을 경멸하고 극도로 무시하는 '무법자'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긋는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구분을 하지 않는 듯하다. 큰 죄, 작은 죄 할 것 없이 모든 죄는 다 불법이라고 말한다.
헬라 문화에서 '죄'는 원래 '표적을 놓치다', 즉 과녁의 중심에서 벗어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죄는 무언가를 잘못 계산하는 것, 혹은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 생각해봐도 이런 개념에는 일리가 있다. 예를 들어, 죄 많은 행실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그 과오를 극복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자꾸 실패할 경우가 있다. 과녁의 중심을 맞히고 싶어하지만, 번번이 과녁을 벗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짓는 행동은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내적 충동에서 시작된다. 야고보가 말했듯이, "각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에 빠지기 때문이다"(약 1:14). 우리가 남을 험담하거나 정욕을 품는 것은 죄짓는 가운데 거기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는, 일시적 즐거움이 주는 유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욕구보다 더 강하다.
죄는 죄다. 삶 속에서 우리가 쉽게 묵인하는 죄도 하나님의 눈에는 심각한 죄다. 우리의 신앙적 교만, 비판적 태도, 불친절한 말, 참을성없이 쏟아내는 화, 심지어 걱정까지(빌 4:6),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심각한 죄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기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구약성경 말씀을 인용했다.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항상 지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저주를 받는다"(갈 3:10). 이 말씀이야말로 순종의 완벽한 기준이다. 공부에 빗대어 말하자면, 기말 시험에서 99점을 받는 건 낙제점이라는 것이다. 학기말 리포트를 멋지게 작성해놓고도 콤마 하나 잘못 찍으면 F학점을 받는다는 뜻이다. 다행히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그리스도를 구속자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속해주셨다"고 안심시킨다(갈 3:13). 하지만 우리가 생활 속에서 묵인하는, 사소해 보이는 죄도 사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 문화에서는 죄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교회에서조차 청중들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죄의 개념을 많이 순화시켰다. 슬픈 이야기지만, 보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죄의 개념은 우리 사회의 명백한 중대 죄악만을 가리키는 말로 본질상 재규정되었다. 그 결과, 도덕적으로 별다른 결함이 없는 크리스천들의 경우 자신이 저지르는 '사소한' 죄에 대한 자각이 그들의 의식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묵인하곤 하는 이른 바 성도의 점잖은 죄든, 우리가 지체없이 정죄하곤 하는 세상의 극악무도한 죄든, 모든 죄는 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질책을 받을 만하다. 모든 죄는 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물론 예외적으로 경건하고 겸손한 사람들도 많다. 사실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런 '사소한' 죄를 매우 예민하게 자각하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심각한 죄에 대해서는 아주 비판적인 반면, 교만하게도 자기 자신의 죄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우리들도 그 양 극단 사이 어디쯤에서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다 징계를 받을 만하고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대해서나 우리 보수 복음주의에 대해서나 내가 좀 어두운 면만 부각시켰다는 것을 인정하겠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 참된 신자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며,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회개하여 새롭게 되라고 부르고 계신다. 삶 속에서 우리가 용인하는 죄를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셔서 회개하여 새롭게 됨을 체험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일부분이다.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흔쾌히 이 책을 들어 써주시기를 기도한다.
'━━ 영성을 위한 ━━ > 치유영성회복'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스천 마음 속의 교묘한 죄.4 (0) | 2021.04.22 |
---|---|
크리스천 마음 속의 교묘한 죄.3 (0) | 2021.04.20 |
크리스천 마음 속의 교묘한 죄.1. (0) | 2021.04.18 |
기질로 본 성경인물 유형. (0) | 2021.04.17 |
육신적인 자와 영적인 자의 비교 (0) | 2021.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