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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에서 배우는 돈의 지혜

Joyfule 2014. 5. 24. 09:19

 

 

탈무드에서 배우는 돈의 지혜 

 

 

제4장 체다카 요법 - 돈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기

 

자선(Charity)이라는 영어 단어는 체다카(Tzedakah)란 유대 개념을 번역하기 위한 단어로 쓰인다. 그러나 체다카는 ‘사랑’을 의미하는 라틴어 카리타스(Caritas)에서 기원되는 ‘자선’이란 문자적 의미와 무관하다. 체다카의 유대적 의미는 시장과 관련되며 문자 그대로 ‘정의(Justice)' 혹은 ‘정의롭게 하는 것(the act of justicing)’으로 번역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상사회 건립을 위한 최고의 덕목으로 사랑을 꼽는다. 그러나 유대교는 정의, 즉 체다카를 강조한다. 유대교에 따르면 개인, 인종, 환경 등 모든 차원에서 될 수 있는 한 남을 돕는다면, 즉 체다카를 충실히 이행한다면 이상적 세계는 현실화될 거라고 확신한다.

 

“돌은 딱딱하나 쇠가 그 돌을 자르고, 쇠가 강하다 하나 불이 그 강함을 녹인다. 불은 강력하나 물이 불을 끄고, 물은 무겁기는 하나 구름이 물을 나른다. 구름은 강하나 바람이 이를 흩트리고, 바람은 강하나 우리 육체는 이를 견디어낸다. 육체는 강하나 두려움이 이를 파괴하고, 두려움은 강하나 포도주는 두려움을 피하게 하고, 포도주는 강하나 잠이 정복한다. 죽음은 이러한 것 중 가장 강하나 체다카는 죽음에서 구한다.“

 

이 예화를 통해 랍비 예후다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죽음’의 개념 너머에 삶, 의미, 교환의 개념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체다카가 교환할 수 있는 구체적 추상개념이라면 죽음은 비교환의 추상개념이다. 이러한 속성을 이해하고 체다카의 책임완수를 위한 시간을 배정하는 사람은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 격정을 몰아내고 치료를 받는다. 체다카의 가치를 진실로 이해할 때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부’로 인식하게 된다. 체다카는 축적될 수 있으며 흥미로운 어떤 상거래에 헌신하는 그러한 열정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덜 가짐으로써 드러나는 믿을 수 없는 부의 현시인 것이다.

 

 

제5장 적게 가지고 풍요롭게 사는 법

 

내 것은 너의 것이고 너의 것은 너의 것이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너의 것은 너의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소돔과 고모라의 거주자와 같고, ‘내 것은 너의 것이고 또한 너의 것은 내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으며, ‘내 것은 너의 것이고 또한 너의 것도 너의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올바르며, ‘내 것은 내 것이고 또한 너의 것도 내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악한 사람이다.

 

만약 사람들이 무조건 생존해야 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할 경우 올바른 자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다. 만약 ‘내 것은 너의 것이고 너의 것은 너의 것이다.’라는 명제가 사실이라면 올바른 자는 굶어 죽을 것이다. 미슈나(유대 구전법전)는 삶의 일부로서 즉각적으로 결과가 나타나는 사이클을 무시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신의 손님이라는 이해, 즉 ‘환대’에 대한 우리의 자각을 증진시키려는 것이다.

 

다소 역설적이고 불공평하게 보일지라도 ‘내 것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작은 회귀 사이클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난에 집착함 없이 여러 세계의 풍부함을 기꺼이 함께 하려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너의 것은 너의 것이다.’는 어떤 종류의 보상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우리는 ‘내 것은 너의 것이고 또한 너의 것은 너의 것이다’라고 함에 의해서 ‘가짐’의 한계와 무게를 자신에게서 제거한다. 적게 가질 때 진실로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부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라

적게 가짐으로써 늘어나는 부에 관하여 지금까지 보아온 것은 부를 얻으려는 강박관념을 피하는 것은 일종의 진실한 부라는 것이다. 이 강박관념은 부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더 어렵게 만들뿐만 아니라 또한 탈무드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물을 구하는 자는 자신의 죽음을 재촉한다.’에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우리의 야망 수준을 주시해야 한다. 우리는 체다카와 공부를 통해서 ‘적음’을 ‘많음’으로 변형시키려고 할 때 그 자체 안에 부의 형태와 우리에게 열려 있는 선택권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소유권을 즐겨야 큰 이익이 온다

우주시장은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권리와 잠정적 소유의 계속적 흐름 속에 있다. 그런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문제를 일으킨다. 예를 들면 음식의 적절한 교환(섭취)을 무시하고 많이 먹는 사람은 비만이 될 것이며, 필요 이상의 음식을 자신의 신체에 보유하는 것이며 이로써 시장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이다. 만약 재산의 순환법칙을 지키고 삶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를 쌓아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를 적절하게 쓰는 방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의 소유물을 포기하고 대신 선물을 줄 시기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랍비 나만은 한때 자신의 집에 가난한 여행자를 투숙시켰다. 다음날 아침 그 손님이 자신의 코트를 가지고 떠났음을 알았다. 랍비 나만이 유대교당에 도착했을 때 한 젊은 사람이 다가와서 말하길, “랍비님, 조금 전에 랍비님의 옷과 똑같은 코트를 입은 사람을 보았지요. 처음에는 그 코트가 랍비님 코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지금 코트를 입지 않고 계시는 것을 보니 이젠 확신이 듭니다.” 하였다. 그러자 랍비가 “그 코트가 그 사람에 잘 맞던가?” 물었다. 그 젊은이는 “그 사람에게 아주 잘 맞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면 그 사람이 계속 입게 두게. 그는 아주 가난한 사람이고 올 겨울은 너무나 춥다네.”라고 랍비는 말하였다.

 

올바른 사람은 자신의 소유물을 쉽게 포기하지 않으나 자신의 소유물이 더 이상 자신의 소유물이 아님을 알 때 이를 포기함으로써 가져올 더 큰 이익의 시기를 안다. 우리의 소유물이 가장 가치 있을 때, 우리를 위해 가장 큰 즐거움과 보상을 발생시킬 수 있을 때, 그 소유물을 떠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제6장 세상 살아가기

 

성공과 실패는 수레바퀴의 상승과 하강일 뿐

“떨어지는 것(실패)은 올라가는 것(성공)의 필요한 부분이다.”라는 랍비 나만의 말은 생계의 필수적인 면, 즉 성공과 실패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넓은 구조 안에서 시장을 생각할 때 시장은 한 개인이나 그룹의 부분적인 생계뿐만 아니라 전체를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여기서 ‘전체’, 즉 상호연결성은 마치 수레바퀴를 닮았다. 이 수레바퀴는 반대편이 떨어질 때 다른 편은 올라간다. 가장 높은 점은 하락의 시작이며, 가장 낮은 점은 우리가 다시 상승함을 의미한다.

 

어떤 분야에서 풍성함과 성공을 경험한 사람 누구도 하강을 피할 수 없다. 반대로 우리가 더 높이 올라갈수록 하강에 대비하여 더 많은 것을 영혼을 풍부하게 하는데 적립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강의 기간동안 우리는 다시 반복되는 상승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수레바퀴는 또 다른 하강이 계속하여 다가오기 때문에 사이클이 나선형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우리 생계의 많은 부분은 이러한 상승과 하강의 기억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확신은 생계의 순환성과 모든 세계의 상호작용성을 이해할 때 온다. 우리가 때때로 느끼는 절망은 상승과 하락이 선명하게 선적인 것으로 다가올 때이다. 수레바퀴의 회전을 역회전하여 꼭대기에 돌아가려고 시도하는 것은 단지 하강을 연장할 뿐이다. 필사적으로 우물의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은 작은 상승의 승리 속에 끝없는 떨어짐을 야기한다.

 

허술하게 계약하지 마라

어느 누구도 좋은 계약서를 작성하는 법을 이해하지 않고는 부자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신경 써야 한다. 우리는 사업관계에 있어서 순진하고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서면으로 자세히 계약서를 작성하거나 증인을 세우는 것을 부끄럽거나 실례되는 일로 여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눈 먼 자 앞에 장애물을 놓는 일’일 것이다. 부주의한 계약 때문에 경우에 따라 결혼이 파괴되고 가족은 싸우고 사회가 해체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랍비들에게 계약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계약의 가장 큰 적은 거래의 규칙을 설정할 때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성숙치 못한 태도이다. 우리는 흔히 거래관계를 상세히 처리하기를 원하는 것은 신뢰나 연대의 부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올바른 사람은 연대의 한계를 알고 계약서를 조심스럽게 작성할 것이다. 우리는 창조자를 모방해야 한다. 만약 신의 시간이 계약에 헌신된다면 그때 우리의 시간 또한 그러해야 한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위한 명백한 ‘계약서’를 만들고 부주의를 피하라. 그렇지 않다면 인생에서 모든 협력관계는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

 

모든 창조물이 서로에게서 빌리는 것을 관찰하라

우리가 사는 우주는 대부의 세계이다. 삶 그 자체는 부모로부터 빌려온 ‘자본’으로 구성되며, 부모는 그 자본을 ‘앞 세대’ 자금에서 빌린 것이다. 대부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고 우리의 생존을 가능케 만드는 관대함의 활동이다. 유대 전통에서 대부는 일종의 ‘체다카’이다. 우리는 대부를 통해서 가난과 맞서 싸울 수 있으며 같은 방식으로 잉여 생산품을 세계 빈곤을 위해 사용하고 그것에 책임을 부과해야 한다. 성경이 “만약 그대가 나의 사람들 중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준다면, 채권자처럼 그들에게 행동하지 말라. 이자를 부과하지 말라.”라고 한 이유다.

 

위에서 언급된 출애굽기 구절은 많은 의문을 제기했으며 대부시장에 여러 문제를 드러내기도 한다. “채권자처럼 그들에게 행동하지 말라.”를 만약 채무자가 상환할 수 없으면 어떤 대부도 반환예정일이 지난 후에는 징수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으로 잘못 해석되기도 한다. 랍비들은 체다카(대부 행위)를 좋은 행위 혹은 친절한 행위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의와 친절은 명백히 구별되는 서로 다른 영역이며, 세계와 시장의 균형은 이 두 개의 구별성에 의존한다. 정의와 친절은 함께 작용하나 서로 독립적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정의와 자비(친절) 사이에 조화가 있는 사회에 사는 사람만이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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