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도(風俗圖) - 박영자
가끔 들르는 공예관에서 그림 한 점을 샀다. 조선 후기의 화가인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이다. 작년 단오 무렵이니 그것을 서재 책상 앞에 걸은 지도 1년이 다 되었다. 이 그림은 액자로 된 것도, 족자로 품위 있게 꾸민 것도 아니다. 용도가 스카프인지 손수건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얇은 천에 프린트된 것이어서 실 핀 두 개로 벽에 고정시키기는 쉬웠다.
그림에서 제일 눈길을 끄는 것은 노랑저고리 다홍치마의 여인이다. 대담하게 흰 속곳을 다 드러낸 채 그네에 발 한 짝을 올려놓고 막 그네 줄을 잡고 오르려는 순간을 포착한 듯, 한 쪽 다리와 두 팔에 한껏 힘이 실려 있다.
그네를 맨 느티나무 밑에는 두 여인이 한담을 나누고 있는데, 한 여인은 한가롭게 트레머리를 풀어 내리고 있다. 그 나무 옆으로 휘감아 흐르는 시냇물에서는 여인들이 머리를 감거나 목욕을 하고 있다. 충격적이게도 한 여인은 상체를 온통 벗고 가슴이며 배, 아랫도리까지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다.
하나같이 트레머리를 얹고 있는 것이며 풍모로 보아 여염집 아낙들이 아니다 싶더니 알고 보니 기녀들이다. 목욕하는 여인들의 자태가 뭇 남자들을 뇌쇄시킬 만큼 매혹적이다. 에로틱한 표현은 신윤복이 단연 으뜸이다. 언덕아래에서 한 여인이 보퉁이를 이고 그네 있는 쪽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다. 아마 단오 무렵에 먹는 수리취떡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유난히 작달막한 키에 큰 궁둥이를 비척거리며 걸어가는 모습이 심부름 온 부엌 어멈인 듯싶다.
인적이 끈긴 계곡에 여인들이 평화로운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저만치 숲속에서 까까머리 동자승 둘이서 여인들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훔쳐보고 있는 익살스러움이다. 한 동자승은 시선을 목욕하는 여인들 쪽에, 또 한 동자승은 그네 타는 여인 쪽에 두고 있다. 이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낄낄거리며 웃음이 나온다. 훔쳐보는 인물의 설정 때문이다. 만일 동자승둘이 바위 틈새로 여인들을 엿보지 않았더라면 선정적인 장면을 보는 긴장감이 훨씬 덜 했을 것이다. 이 동자승들은 작자인 혜원의 마음을 대신한 것이리라.
이 그림은 1800년대에 그린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30여점 중의 한 폭으로 풍속도가 그렇듯 그 시대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 시대에 신윤복이 에로틱한 장면을 대담하게 화폭에 담았다는 그 용기가 참으로 대단하다. 그럼에도 외설로 빠지지 않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뛰어난 능력 때문일 것이다.
혜원은 아버지 신한평의 뒤를 이어 한때 도화서의 화원이었다. 혜원전신첩은 그만의 독특한 경지를 나타냈다. 주로 한량과 기녀들 간의 애정과 낭만, 양반사회의 풍류를 다루었는데, 섬세하고 부드러운 필선과 아름다운 색채가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18세기 당시 사회상의 일면은 물론 선조들의 성문화를 참으로 솔직하고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우리역사에서 유교적 이상과 도덕률이 가장 잘 지켜진 때가 바로 이 그림들이 그려진 조선 중기부터 후기까지이니 더욱 놀랄 일이다.
그 그림들 속에는 유교문화와 가장 근접해 있는 선비들이 한 밤중 뒷골목에서 은밀한 밀회를 즐기거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녀들과 온갖 춘희를 벌이는 모습들이 여과 없이 노골적으로, 또는 은근하게 묘사되어 있어 우리를 사뭇 아연케 한다.
소년전홍(少年剪紅)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젊은 서방이 벌건 대낮에 계집질하는 장면이다. 사내는 마침 마나님이 집을 비운 새 음심이 솟는 바람에 조급해졌다. 살짝 드러낸 가슴이 통통한 몸종은 집주인이 우악스럽게 완력으로 팔목을 끄는 바람에 어쩔 줄 모른다. 힘이 남자의 매력이긴 해도 눈꼴 시린 성희롱이요, 성 폭력인 것이다. 그 그림 밑에 ‘密葉濃堆綠 繁枝碎剪紅’(빽빽한 잎에 짙은 초록 쌓여가니 가지가지 붉은 꽃 떨어뜨리네)라고 적어 놓은 걸 보면 욕정을 자연에 비유하며 천연덕스럽다.
높은 담장 안에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화창한 봄날, 과부로 보이는 양반집 마님과 몸종이 내원의 그루터기에 앉아, 마당 한 쪽에서 짝짓기에 열중하는 개들을 곁눈질로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다. ‘이부탐춘(二婦耽春)’이라는 이 그림은 오래 눈길을 두기조차 민망하다.
은근하기로는 사시장춘(四時長春)을 따라갈 그림이 없다. 멀리 계곡과 폭포가 보이는 한낮, 한적한 후원 별당의 장지문은 굳게 닫혀있고, 툇마루에는 남녀의 신발 두 켤레가 놓여있다. 봄이 무르익어 꽃은 만발한데 술 쟁반을 받쳐 든 계집종이 엉거주춤 방 앞에 서 있다.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구성이지만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숨은 뜻에 저절로 미소가 번진다.
춘정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이보다 더 품위 있고 은근하며 함축된 것은 또 없을 것이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탄복할만한 그의 글 솜씨다. 굳이 낯붉힐 설명 없이 "있을 것은 다 있고, 될 일은 다 돼 있다"는 표현으로 슬쩍 눙치고 지나가는 그의 속셈이야말로 고수의 경지가 아닌가. 이 한마디로 우리 특유의 은근함이 절절하다. 눈 내리는 풍경을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표현한 시인의 시구(詩句) 같은 은근함에 감탄한다.
혜원은 농도 짙은 여속도(女俗圖)도 예리한 솜씨로 여러 장 그려냈다. 지나친 내용을 그린다 해서 도화서(圖畵署)에서 쫓겨났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여속도의 전문가였다. 그 유명한 ‘미인도(美人圖()’가 그렇고 ‘처네 쓴 여인’ ‘전모(氈帽)쓴 여인' '연당(蓮塘)의 여인' 등 가냘프고 청초한가 하면 선정적인 요염미를 물씬 풍기고 있는 이 여인들의 모델은 누구였을까. 혜원의 여인들이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당시 지성인인 선비들의 참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듯이 강직하고 엄하기만 한 도덕군자가 아닌, 때로는 인간적 본능과 감정에 충실하고, 자신의 내적 욕망을 정직하게 그려 진지하게 드러낼 줄도 아는 지극히 낭만적이었던 점을 유추해 낼 수가 있다.
혜원이 이 시대를 살았다면 어떤 풍속도를 그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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