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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도의 비밀

Joyfule 2018. 2. 5. 10:32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도의 비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졌으며, 교인들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살고 싶으셔서 선별하여 부른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는 백성들의 왕이 되시며, 자녀들의 아버지이고, 종들의 주인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자 자녀이고, 종인 신분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것을 다짐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기록한 책이 바로 성경이다. 또한 성령은 절대불변의 진리이며,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싶고 만나고 싶으면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이 모든 사항에 동의하고 교회를 성실하게 다니며, 교회에서 시키는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열정적으로 준행하고 있을 것이다. 교회에서 시키는 것은 죄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를 둔 내용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여러분도 인정하고 동의하는 내용일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들을 준행하며 살고 있으신가? 대체적으로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 근거로 생각하고 있는 항목들은 죄다 교회에서 요구하는 희생적인 신앙행위로서, 주일성수와 교회봉사, 십일조, 새벽기도회의 참석 등을 포함하는 내용이 주일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이런 행위들은 오랫동안 교회에서 관행적으로 준수하고 있는 행위인 것은 맞지만 성경에 기록한 하나님의 명령은 아니다. 그렇다고 필자가 그런 신앙행위들이 죄다 쓸데없다는 뜻은 아니다. 말하자면 핵심적이며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핵심적이며 본질적인 것들은 성경에 수도 없이 도배하고 있는 항목들이며, 부수적이며 비본질적인 신앙행위들은 핵심적이며 본질적인 행위들을 준행하고 나서 자의적으로 선택할 내용들일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씀드린 예배의식에 참석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각종 교회봉사를 하는 신앙행위들은 필수적인 신앙행위로 분류되어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그런 신앙행위여부에 따라서 믿음을 재는 잣대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런 말씀은 성경에 없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으로 여기는 게 무엇인지 살펴보고 싶다.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4:29),

너희가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29:13),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다.(8:17)

구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11:9~13)

 

믿음이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분을 믿기만 하면 이 땅에서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분을 만나려고 교회를 찾아오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 건물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찾아오신다. 그래서 그분을 간절히 사모하고 전심으로 요청하는 자에게 찾아오셔서 내주하시고 영원토록 동행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네 교회는 간단한 영접기도만 하며 성령이 들어오시며, 주일성수를 비롯한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부유하고 성공적으로 살다가 천국에 들어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영성학교에서는 그런 교회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령이 내주한 증거와 변화, 능력과 열매가 없으면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성령이 내주하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주장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 하나가 하나님을 불러서 들어오셨다고 믿으면 되는데, 왜 계속해서 반복해서 하나님을 불러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일 것이다. 이미 기도했으면 오실 것을 믿어야 하는데, 주구장창 하나님을 부르는 행위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도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필자가 가르치는 기도를 비성경적이라고 여기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 (64:7)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53:4)

 

성경에서 사용하는 부르다는 히브리어의 단어는 qr(카라)이다. 이 단어는 call(부르다), invoke(호소하다, 빌다, 염원하다), summon(불러내다, 소환하다)의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을 부른다는 행위는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님의 관심을 끄는 행위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부르는 행위가 바로, 하나님을 불러내어서 자신에게 관심을 갖도록 부르짖고 호소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이 단어는 감사와 찬양, 애도, 도움을 요청하는 단어와 같이 사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께 관심을 갖도록 자신을 드러내며, 간구하고 호소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의미가 총체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하나님을 불렀으며, 그의 아들이 이삭과 야곱도 따라했다. 이는 홍수사건 이후에 살아남아 그들의 조상이 되었던 노아의 아들 셈의 행위를 본받은 것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오시옵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 (141:1,2)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성경에는 하나님을 부르라는 명령이 수도 없이 나오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관심조차 없다. 그러면서 이미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다시 부르는 행위는 믿음이 없는 것이며, 이런 기도를 하지 않는 교회의 관행에 비추어 이 같은 기도가 낯설게 느껴지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위의 다윗의 기도를 끄집어내어 살펴보자. 다윗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였는가? 아니다. 다윗은 어린 목동시절에 보여준 믿음을 감동하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시켜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인물이다. 그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깊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부르는 행위가 당신 눈에도 기이하지 않은가? 그가 하나님을 부르는 목적은, 하나님의 관심을 자신에게로 이끌려는 지극히 의도적인 행위이다. 그래서 자신이 부르짖는 탄원을 포함해서, 찬양과 감사와 경배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가 낯설고 기이하며 비성경적이라고 생각되는가?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등 구약의 성경위인들이 즐겨 했던 기도방식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에 무지했던 사람들이며, 평소에 기도를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는가? 어디 그뿐인가?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리를 듣자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뜯어말리자, 그는 더욱 큰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지금 예수님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면 일생일대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우리네 민요인 밀양아리랑에도 이런 가사가 있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이런 가사의 노래도 바로, 자신을 보아달라는 간곡한 애청이요 애절한 호소이다.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가 바로 이런 기도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나를 다스려주세요, 나를 지배해주세요,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나는 당신의 자녀이여 당신의 소유입니다라고 절절히 고백하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이런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우리네 교인들이 익숙한 기도의 방식은 무엇인가? 입만 열면 자신의 세속적인 탐욕을 요청하고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기도뿐이지 않은가?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면 기도도 따라서 중단된다. 그리고는 다시 새로운 문제가 나타날 때까지 기도를 쉬고 있을 것이다. 이런 기도의 방식이 성경적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인가? 솔직히 말해서 이런 기도방식은 귀신이 넣어주는, 세속적이고 하나님을 조폭해결사로 아는 가증스러운 방식일 뿐이다. 그래서 그간 하나님이 그런 기도에 즉각 응답해주시고 해결해주셨는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며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사람들은 기도의 자리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희생의 강도를 더하는 기복신앙의 방식인 작정기도, 금식기도, 일천번제 기도 등에 몰두하고 있다. 이런 기도방식은 무당이 하는 백일기도, 천일기도와 무엇이 다른가?

 

이렇게 성경에 명령한 기도는 하지 않고, 성경에도 없는 기이한 기도방식을 들여와서 자신의 탐욕을 채우고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알고 있으니 가증스럽지 아니한가? 필자가 충주에 영성학교를 세우고 성령이 내주하는 기도훈련을 한지도 벌써 2년이 훌쩍 넘어섰다. 그렇다면 필자가 훈련하는 쉬지 않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부르는 기도에 하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지 여러분도 궁금하지 않으신가?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한적한 시골에 교회 명패도 십자가도 없는 건물에 사람들을 빼곡하게 보내주시고 계시다. 만약 필자가 가르치는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에 하나님의 반응이 없었다면, 어린 자녀들을 동반해서 몇 시간씩 차를 타고 먼 길을 오가는 고단하고 힘든 기도훈련을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령에 순종하며 찾아오는 이들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대하16:9)

 

우리네 교회에 영적으로 침체되고 교인들이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신앙생활을 반복하고 있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런 교회에 하나님이 떠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작금의 우리네 교회에 하나님이 떠나신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도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 오면 하나님께 마음을 들이기보다. 형식적인 예배를 마치고나서는 교인들과 먹고 마시고 낄낄거리는 친목과 교제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입만 열면 자신들의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침을 튀기며 말하는 이들에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집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고 싶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이다.(56:7)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먹고 마시고 떠들어대는 곳으로 전락시켰으니, 그들이 하나님께 받게 될 참혹하고 끔찍한 처벌을 짐작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춘수 시인의 이라는 시를 올려드리며 마무리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