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 5 편 한국교회의 재건과 분열
제1장 8.15해방과 교회의 재건
1.북한의 정치정세 교회비극의 잉태
해방의 종소리가 울리던 날, 1945년 8월 15일은 삼천만 온 겨레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동해물과 백두산의 애국가를 목메어 부른 바로 그날이었다. 일본 군국주의는 꺾이었고 조국은 마귀의 사슬에서 해방되었다. 신음이 변하여 찬송이 되고 압박이 변하여 영광이 되고 보니 그 누구인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치 않을 수 있었으랴!
더우기 70만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이 날은 바로 민족의 해방과 동시에 신앙의 자유를 얻은 날이어서 그 기쁨은 한층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그런고로 강한 의욕을 돋우어 교회 재건과 조국 건설에 서슴치 않고 총매진하였다.
교회 재건의 선두를 달린 곳이 종래 한국교회의 중심지였던 관서지방이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일제 탄압에 의하여 투옥된 교역자 중 약 50명이 순교하였고 20여명이 출옥한 곳이 평양 감옥이었고 또한 지하에 숨어 있던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재건을 위하여 분기한 곳도 관서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이기선 목사를 중심한 이른바 출옥 성도들은 출옥하자마자 집에 돌아갈 생각을 뒤로 한채 순교한 주기철 목사가 시무하던 평양의 산정현교회에 모여 교회져건에 대한 열의와 집념을 가지고 2개월간 합심 기도하였다. 9월 20일 저들은 한국교회 재건을 위한 다섯가지 원칙을 발표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 신사에 참배하여 죄를 범하였으니 통회 자복한 후에 교역에 나설 것과 권징을 자책 혹은 자율의 방법으로 2개월간 휴직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 주요한 내용이었다. 여기에 대한 교회의 방향은 적지않게 컸다. 흔한 노회적으로 또는 교회적으로 이를 실시한 곳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재건의 열의는 11월 14일 선천 월곡동 교회에서 모인 평북 여섯 노회의 연합 교역자 수양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총회시에 총회장이었떤 홍택기 목사등의 강력한 반대데 부딪쳐 볼 모양없이 좌절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출옥 성도들과 현역 교역자들과 사이에는 냉전의 위기가 싹트게 되었다.
재건되는 한국교회에 있어서 안으로부터 일어난 시험도 큰 것이었으나 밖으로부터 밀어닥치는 환난도 점차 고조되었다.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뜻하지 않게 그어진 3.8선으로 소련 군정의 감시와 공산당의 탄압이 심하여져 교회에 대한 적대는 노골화하였다. 이러한 시국하에서 교회의 단결과 일치는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필수 과제였다. 그리하여 1945년 12월 초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북한 오도연합노회를 조직하였다. 연합노회는 남한 교회와의 긴밀한 연락을 위하여 이인식 김양선 목사를 서울에 파견하였으며 이러한 경위로 북한 교회는 먹구름이 짙게 덮인 미지의 세계를 향해 비장한 각오로 매진하기 시작하였다.
2. 남한에서의 교회 수습과 안정
남한에 있어서 교회 재건에 힘쓴 곳은 부산을 중심한 경상남도 지역이었다. 그것은 순교자 주기철,최상림 그리고 손양원,주남선,한상동 목사 등이 이 지역에서 출생 또는 목회한 영향이 적지않게 작용한 때문이었다. 1945년 9월 18일 부산진교회에 모인 교역자들은 경남 재건노회를 조직하였으며 11월 3일에는 제47회 경남노회를 개최하여 주남선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하여 교회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추종하여 남한 각 지역에서의 모든 교회가 복구 재건에 노력하여, 노회 형성의 실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1946년 6월 12일에는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가 소집되었다. 이는 남한의 교회만이 모인 회합이라 해서 남부 총회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1947년 4월 대구에서 모인 남부 총회는 제33회 총회로서 개최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것은 남북 통일의 희망이 희박해재고 또 불원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 독립 국가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남한에서만이라도 총회를 재건하는 것이 교회 발전을 위해 유익할 것이라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총회는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교역자들에게는 친지 목사의 3인의 보증과 추천으로 신분을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개척 전도에 주력하여 남한 지역 도처에 많은 교회를 설립하였다.
해방 직후 감리교에서는 일제 당시에 교권을 장악하였던 목사와 초야에 묻혀 교회를 물러났던 교직자들과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면서 교회 재건의 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8일 남부 대회란 이름으로 교단 대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 대회의 불법성을 지적한 이규갑 변홍규 윤성범 나사행 이봉구등은 감리교 중앙재건위원회를 조직하여 일제시대에 교권을 남용한 인물들의 후퇴를 요구하면서 신도대회를 열어 맹렬히 통박하였다. 이는 재건 감리교회라 불려지게 되었다.
한편 남부 대회를 열어 교단 고수를 지지하는 교계 인사들은 1946년 6월 수표교회에 회집하여 부흥 감리교회를 형성하여 교회의 재건은 숙청이 아니라 신앙의 부흥을 통하여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서로 대립이 격화되었다.
감리교는 감독 정치인 고로 감독에게 교회의 영도권이 대폭적으로 부여되어 있다. 그런고로 자연히 감독 직의 획득을 위한 쟁탈의 분규는 우심할 수 밖에 없다. 재건과 부흥 양파의 세력은 백중하여 모두 자신의 정통을 주장하면서 양보하지 않았다. 이 이상 더 분규가 계속되면 감리교의 자멸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때, 재건파의 주장하는 합동안이 부흥파에서 받아 들여진 바 되어 1947년 1월 연합 총회가 회집되었다. 그러나 간부 선정에 있어 부흥파 인물들이 절대 다수가 되자 화해는 회의를 재개하였으나 또 다시 시행의 불철저로 깨어져 재건파는 단독 총회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교회의 분열을 통탄히 여긴 평신도들은 분연히 일어나 양파의 합동을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1949년 4월 20일 통일 총회의 소집이 무르익어 김유순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함으로 양 파는 모두 납득한 바가 되어 감리교의 합동 통일은 성취되었다. 이 합동의 공은 평신도에게 있었으므로 이때부터 교히 문제에 대한 평신도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일제 말 시대에 한국의 성결교는 해산 명령을 받아 전국 교회는 완전히 폐쇄되었고 교회당 건물은 군수 공장으로 징용되었다. 약 5만의 성결교 신도들은 해방될 때까지 장로교나 혹은 감리교로 가서 신앙 생활을 유지하는 방도를 취하였다. 해방과 동시에 3년간 폐쇠되었던 교회의 문은 열었으며 1945년 11월 9일 총회를 개최하여 사멸되었던 교회 재건에 박차를 가하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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