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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 5 편 한국교회의 재건과 분열 3.

Joyfule 2007. 1. 1. 03:50

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 5 편 한국교회의 재건과 분열3.

제3장 신앙로선 상충에 따른 장로교회 분열


1.출성옥도들의 독선신앙 고조(高調)

일제하 신사참배 문제로 야기된 한국교회의 파문은 장로회나 감리교 할 것 없이 조국 해방과 함께 교회 기상도에 세찬 바람을 불러 일으켜 급격한 분열의 불씨가 되었음은 불행사이었다. 교회 지도자들에게 그 후유증을 아물게 할 능력이 없었고 배후에 있은 선교사들의 보조가 불일치하였음도 교회 분열의 일단의 책임이 되었음을 면할 길이 없다.

주의 몸된 교회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범죄가 발생하였을 때 과감한 개혁의 수술이 수행되어야만 하는 것인데 어물 어물 넘어간 것이 두고 두고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되었음을 무시하지 못한다. 해방 후 잠시 평양 산정현교회를 시무한 한상동 목사는 공산당의 탄압이 심해지자 북한에서의 교회 재건의 지난을 느껴 남하하였다.

그는 박윤선 목사와의 합의로 경상남도에 고려신학교를 세울 것에 합의하였다. 1947년 박형룡 목사가 신학교 교장을 수락하므로 이는 확정되었다. 박형룡 목사는 신학교는 반드시 전국의 교회를 배경으로 해야만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승락을 얻은 바 있었다. 그런데 그후 메첸파에 속한 선교사들이 귀국하므로 박형룡 목사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박목사는 메첸파의 신학사상이 건전하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처음부터 한국 주재 선교회인 미국 북장로회,남장로회,카나다 장로회,호주 장로회의 선교사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고로 이러한 전국 교회 판도에 이상이 있을 것을 예상하여 그들과의 합작의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소위 출옥 성도들은 박목사의 의견에 찬동은 하면서도 메첸파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보수 신앙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드디어 박형룡 목사와 사이에는 신앙노선의 상위로 피차 결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박형룡 목사가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물러나자 경남노회 안에서는 심각한 분열의 위기가 감돌았다. 출옥 성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파와 이에 맞선 상대파와의 대립은 불가피한 사실이었다. 1951년 5월 부산 중앙교회에서 모인 제36회 계속 총회는 일선에서는 동족 상살의 6.25동란의 전쟁이 한창 계속되고 있는 와중이었고,피난 수도 부산에서 모인 눈물겨운 성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출옥 성도들을 여지없이 정죄하였다. 그러자 고신 계열의 출옥 성도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독선 신앙을 과시하면서 경남 법통노회를 조직하였다.

이와같은 분열의 여파는 양편이 다 막심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출옥 성도들이 주장하는 통회 자복, 진리 후소, 신앙 순화와 고조는 바람직하였으나 그러나 그들에게 아량과 관용이 너무나 부족하였다. 주의 몸된 교회가 언제나 거룩해야 함은 두 말할 것 없거니와 그러면서 죄인과 약한 자들이 모인 집단이 교회 임을 인식해야 한다.

2.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대두(擡頭)

한국 교회사의 흐름은 신학교가 걸은 역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무시하지 못한다. 선교 초창기 이래 40년의 장구한 역사 속에 보수 신학의 전통을 지켜온 장로회 평양신학교는 1938년 9월 3일 일본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무기 휴학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경영자인 미국인 선교사들은 일본당국에 의하여 모두 강제 추방되어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말하자면 한국 교회에서 교역자 양성은 중단 상태에 빠졌다.

그런고로 1940년 서울에서 조선 신학교가 개교되었음은 있음직한 일이었다. 물론 조선신학교는 일본이 요구하는 신사 참배에 찬동하였기 때문에 경기도 지사로부터 설립이 인가되었다. 조선신학교는 한국인에 의하여 세워진 최초의 신학교로서 선교사의 주도권에서 벗어나 세워졌기 때문에 보수주의 신학 노선을 탈피하려는 시도는 어렵지 않게 수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가 일제 말엽에 기독교가 탄압을 받고 있는 사정 하에서는 그러한 것의 실현이라든지 또한 그러한 문제의 거론조차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었다.

조국이 해방되고 신앙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자 이러한 문제는 활기를 띄며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49년 조선신학교는 남부 총회에 청원하여 총회의 직영을 허락 받았고 이때부터 교수로 있은 김재준은 보수 신학을 난타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신학교는 한국에 주재하고 있은 각 선교회와 유대 체졀과 후원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카나다 장로회를 제외한 다른 선교회에서는 모두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더우기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의 태도는 극히 강경하여 교수진의 총사퇴를 요구하면서 정통적인 성경 해석과 신학을 가르칠 것을 요청하여 사태의 추이는 대결 상태로 인도되었다.

때마침 죤 맥카이와 에밀 부룬너의 한국 내방이 있었는데 이것이 엉뚱하게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교수를 중심한 신학자들과 박형룡 박사를 중심한 교회 지도자들과 사이를 격리시켜 놓는데 주효하였다. 김재준 측이 이들의 이름을 번번히 사용한 것과 박형룡 측이 지나치게 신경을 쓴 것이 모두 좋지 않았다. 이 두 신학자의 대립 경향은 한국교회 전체를 양분하는 기세에 박차를 가하였다. 거기에다가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의 강의가 자유주의라고 하여 그의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진정서를 총회에 제출한 바 있었기 때문에 긴장은 더하였다. 이러한 과정으로 전국의 교회는 흥분의 도가니로 화하여 소위 진보계와 보수계의 두갈래가 급속도로 격화되었다.

1949년 6월,51명 학생을 중심으로 장로회신학교가 서울 남산에서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하여 개교되었다.이 신학교는 평양신학교의 후신임을 자처하면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전국의 교회로부터 많은 동정이 집중되었다. 믹구 남장로회나 북장로회 선교부의 후원도 뒤따르게 되었다. 한 총회 안에 입장을 달리하는 두신학교의 존재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50년 제36회 총회는 조선신학교 측을 다수의 힘으로 몰아치우려 하였다. 그러자심한 격론이 일어났고 그 도가 지나침으로 한국교회사 상 미증유의 경찰 동원이란 치욕적 사건마저 유발하기에 이르렀음은 일대 유감사라고 말 아니 할 수 없다.

1951년 9월, 총회에서는 직영 신학교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구에서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개교하였다. 그러나 조선신학교는 계속되었다. 1952년의 제37회 총회는 김재준 교수를 파문하였다. 그리고 조선신학교의 총회 직영을 취소한다고 재확인 결의하였다.

1954년 6월,새로운 신학 사상의 수립을 지향한다는 조선신학교측은 그 명칭을 '한국 기독교장로회'라고 하면서 새로운 총회를 구성하여 출범하였다. 이는 분열의 명분을 내세운 떳떳한 행동이기는 하였으나 새로운 신학의 선언으로 인하여 두 진영의 화해의 성립은 불가능사로 아주 굳어지고 말았다.

3.MAE 대 에큐메니칼 논쟁

한국의 최대 교파를 자랑하는 장로회는 또 세번째로 크게 갈라지는 불행을 만났다. 복음동지협회 (NAE=National Assembly of Evangelists)란 단체에 의하여 주도권 중상 모략이 의외로 주효하여 1959년 제44회 총회 시에 교회가 분열되는 비극을 연출하게 되었다.

이 분열 원인에 관하여 총회신학교의 기지 확보를 위한 3천만환의 행방을 추궁한데서 박형룡 교장의 진퇴를 지지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과 사이에 충돌로부터 발단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는 하나 결정적인 요소는 보수 신학과 신앙의 순수성을 주장한다고 하는 NAE 계통의 목사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은 신신학으요 용공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여론을 악화시키는데 크게 기인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교회의 세계교회협의회(WCC=World Council of Churches)와의 단결을 주장하다가 총회원 다수의 찬동을 얻지 못하게 되자 총회를 정회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고 따로[합동총회]를 열어 분리하였다.

한편, 세계교회와의 유대를 끊을 수 없다고 판단한 총회원들은 [통합총회]를 열었으며, 그러나 형제 사이의 분열의 비극은 어떻게 해서든지 극복해야 하겠다는 노력의 표시로 세계교회협의회의 잠정적 탈퇴마저 감행하면서 하나가 되자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거절 당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표면상의 양보보다 근본적인 동기가 앞서고 있다는 사실이 여기에 있으며 신학이 아닌 노선의 차이로 분열한 교회의 양상을 여기에서 뚜렷히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