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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4편 한국교회의 고난과 순교 2.하

Joyfule 2006. 12. 28. 01:24


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4편 한국교회의 고난과 순교 2.하

제2장 신사 불참배운동의 궐기 파급


2.항거자들의 결사 반대운동 전개

한국교회 평신도 중에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 대표적 인물이 박관준장로이다. 그는 의사이면서 전도에 열중한 신앙인이었다.

1937년 어느 날, 밤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중에 생명을 바쳐 일하겠다고 서약을 올렸는데, 아침에 신문 보도를 보는대로 숭실학교와 숭의여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는 이로부터 신사참배 저지를 위해 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깨닫고 행동을 개시하였다. 박관준 장로는 조선 총독에게 신사참배를 포기하도록 권고하기 위하여 13회나 총독부를 방문하였다. 그동안 박장로는 두 차례나 투옥되었다.

제27회 장로회 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을 막기 위하여 그는 십자가 깃빨을 만들어 들고 또 경고문을 배포하기 위하여 총회에 임석하려 하였다. 그러나 기미를 알아차린 일본 경찰에 의하여 사전에 감금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그 후에 신사 참배 하는 것이 옳치 않다는 장문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니시모도 평안남도 지사를 위시하여 우가끼 총독과 아라기 문교부장관에게 발송하여 한국 기독교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함은 불가하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1939년 박관준 장로는 일본 국회에서 종교단체법이 상정 통과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이는 일본 국내의 모든 종교를 정부의 승인하에 신봉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이것이 통과되면 기독교인 신앙 생활에 타격을 줄 것임은 명약 관하하였다. 그런고로 그는 이를 저지하려는 의도를 갖고 원본 도오꾜로 향발하였다.

박관준 장로는 그때 신사참배 문제로 선천 보성여학교의 교사를 사임한 여안이숙여사를 대동하였다. 도오꾜에 도착한 박장로는 일본신학교에 재학 중인 아들 박영창을 만나 공동투쟁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들은 1939년 3월 22일 국회 의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박관준 장로는 2층 방청석에 자리를 잡고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종교법안이 상정되자."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이다"라고 크게 외치면서 진정서가 들어 있는 큰 봉투를 단상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의사당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화하였으며 의원들은 이 무서움을 모르는 한국인의 행동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박장로는 즉석에서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치되었다.그는 계속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그는 1941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 및 황실 불경죄의 죄목으로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6년에 걸친 옥고를 격으면서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고 마침내 순교의 영관을 썼다.

교직자 중에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한 분이 많이 있었찌만 그중에서 손양원 목사는 참으로 위대하였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여수에 있는 나병환자 애양원교회에 부임하였다. 그는 신사참배를 극도로 미워하여 강대에서 그 부당성을 통열히 공격하였다. 그는 각처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고 절규하였다.

1940년 9월 25일 손양원 목사는 여수경찰서에 검속되었다. 고등계형사주임이 하는 그 말이 신사참배는 국민 의례이지 종교가 아니며 노회장과 총회장도 국민의례로 다 시인하고 신학교 교수 신학박사도 모두 신사참배 하는데 왜 당신은 반대하느냐고 신랄하게 심문하였다. 그의 대답은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절대로 신사에 절하지 않으며 기독교는 지식적 종교가 아니고 체험적 종교이기 때문에 박사가 못믿는 그 진리를 무식한 노인이나 부인들이 잘 믿으며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이니만큼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고 잘라 말하였다.

이리하여 손목사는 1년 6개월의 징역 언도를 받았다. 그의 옥중 생활의 대부분은 기도와 성경 읽기로 시종하엿으며 감방 안에 있는 죄수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전도하였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그에게 어느 사이에 '옥중성자'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는 혹독한 고난과 온갖 유혹과 회유를 당하면서도 끝내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우상숭배 거절의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광주형무소,서울형무소,청주형무소를 전전하면서 만 5년이란 긴 세월을 모진 옥고를 치루면서 지냈다.

3. 신사 불참배로 인한 순교자 속출

1938년 2월에서 9월 사이에 한국교회의 공적 기관의 대부분이 신사에 참배할 것을 언명하였으나 개교회나 교직자 또는 신도들이 개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1939년 초에 이르러 평북,평남,경남,만주 등지에서 신사 불참배 운동이 점차 조직화되어 확대되는 기운이 팽배히 일어났다.

신사 불참배 운동의 본거지는 물론 평양의 산정현교회이었다. 주기철 목사의 옥중고와 산정현교회의 강력한 불참배 태도는 확실히 전 한국교회의 신사 불참배 운동의 상징이었고 지주가 되어 있었다.

신사 불참배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생명을 내걸고 활동한 주도 인물로 평안북도의 이기선 목사와 경상남도의 한상동 목사 그리고 평안남도의 이주원 전도사등을 말할 수 있다. 이기선 목사는 1938년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신사 불참배 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채정민 목사를 만나 신사참배를 결사 반대하는 동지를 전국적으로 규합하여 신사참배를 아니하기로 태도를 취하는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는 김의창 목사와 함께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김형락 박의흠 게성수 김성심 오영은 김창인 김화준 심일철 등의 신앙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때로부터 만주와 평남,경남 등지에서 신사 불참배 신도들이 현 교회를 이탈하여 그룹예배를 드리는 일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경남에서의 신사 불참배 운동의 개시는 1938년 10월 24일 한상동목사가 부산 초량교회에서 신사참배 항거 설교를 한데서 비롯되었다. 1939년 12월 평양의 이주원 전도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그는 거창의 최남고 목사와 남해의 최상림목사,마산의 최덕지 전도사,함안 진주의 이현속 전도사,부산의 손명복 전도사와 조수옥 전도사 등의 신사참배 결사 반대동지들을 흡수하여 이 운동을 확대해 나갔다.

신사 불참배 운동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선교사들의 지원은 큰 힘이 되었다. 평양 주재의 하밀톤(F.E. Hamilton,)과 말스버러(D.R.Malsbury,馬斗元)

선교사 등은 운동자금을 제공하였다. 만주 흥경 주재의 한부선(B.F.Hunt 韓富善)선교사는 신사참배 반대 이유서를 인쇄 반포하여 만주 방면에서의 신사 불참배 운동을 지도하였다.

1940년 4월 3일에는 평양에서 신사 불참배운동자 연합회가 모였다. 이 회는 후일에 총회로 발전시킬 예정으로 있었다. 이렇게 신사 불참배 운동이 표면화 확대되자,경찰은 신경을 곤두세워 불참배 운동의 내용을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1940년 5월에 주기철 목사를 재검거하고 전국의 불참배 운동자를 일제히 체포하였다. 1945년 5월 18일부터는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위반 또는 불경죄 등을 적용하여 중형으로 처벌하였다.

일제에 의한 신사참배 강요로 장로회신학교가 폐쇄되었고 2백여의 교회가 해체되었으며 2천여 신도가 투옥되었고 50여의 교역자가 순교하였다. 실로 한국교회가 일본의 태양신 앞에 허리 굽혔음은 엄연한 사실로서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비록 절대적 수는 아니었지만 이에 항거하여 진리를 사수한 교역자가 있고 순교자의 정화가 있어 한국교회를 향해 오늘도 빛나는 생명력을 던져주고 있음을 간과하지 못한다. 이 순교정신의 발로야말로 금자탑적 존재로서 한국 민족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기약하면서 영원히 빛을 발하고 있다.

제2장 신사 불참배운동의 궐기 파급

2.항거자들의 결사 반대운동 전개

한국교회 평신도 중에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 대표적 인물이 박관준장로이다. 그는 의사이면서 전도에 열중한 신앙인이었다.

1937년 어느 날, 밤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중에 생명을 바쳐 일하겠다고 서약을 올렸는데, 아침에 신문 보도를 보는대로 숭실학교와 숭의여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는 이로부터 신사참배 저지를 위해 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깨닫고 행동을 개시하였다. 박관준 장로는 조선 총독에게 신사참배를 포기하도록 권고하기 위하여 13회나 총독부를 방문하였다. 그동안 박장로는 두 차례나 투옥되었다.

제27회 장로회 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을 막기 위하여 그는 십자가 깃빨을 만들어 들고 또 경고문을 배포하기 위하여 총회에 임석하려 하였다. 그러나 기미를 알아차린 일본 경찰에 의하여 사전에 감금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그 후에 신사 참배 하는 것이 옳치 않다는 장문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니시모도 평안남도 지사를 위시하여 우가끼 총독과 아라기 문교부장관에게 발송하여 한국 기독교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함은 불가하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1939년 박관준 장로는 일본 국회에서 종교단체법이 상정 통과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이는 일본 국내의 모든 종교를 정부의 승인하에 신봉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이것이 통과되면 기독교인 신앙 생활에 타격을 줄 것임은 명약 관하하였다. 그런고로 그는 이를 저지하려는 의도를 갖고 원본 도오꾜로 향발하였다.

박관준 장로는 그때 신사참배 문제로 선천 보성여학교의 교사를 사임한 여안이숙여사를 대동하였다. 도오꾜에 도착한 박장로는 일본신학교에 재학 중인 아들 박영창을 만나 공동투쟁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들은 1939년 3월 22일 국회 의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박관준 장로는 2층 방청석에 자리를 잡고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종교법안이 상정되자."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이다"라고 크게 외치면서 진정서가 들어 있는 큰 봉투를 단상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의사당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화하였으며 의원들은 이 무서움을 모르는 한국인의 행동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박장로는 즉석에서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치되었다.그는 계속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그는 1941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 및 황실 불경죄의 죄목으로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6년에 걸친 옥고를 격으면서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고 마침내 순교의 영관을 썼다.

교직자 중에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한 분이 많이 있었찌만 그중에서 손양원 목사는 참으로 위대하였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여수에 있는 나병환자 애양원교회에 부임하였다. 그는 신사참배를 극도로 미워하여 강대에서 그 부당성을 통열히 공격하였다. 그는 각처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고 절규하였다.

1940년 9월 25일 손양원 목사는 여수경찰서에 검속되었다. 고등계형사주임이 하는 그 말이 신사참배는 국민 의례이지 종교가 아니며 노회장과 총회장도 국민의례로 다 시인하고 신학교 교수 신학박사도 모두 신사참배 하는데 왜 당신은 반대하느냐고 신랄하게 심문하였다. 그의 대답은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절대로 신사에 절하지 않으며 기독교는 지식적 종교가 아니고 체험적 종교이기 때문에 박사가 못믿는 그 진리를 무식한 노인이나 부인들이 잘 믿으며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이니만큼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고 잘라 말하였다.

이리하여 손목사는 1년 6개월의 징역 언도를 받았다. 그의 옥중 생활의 대부분은 기도와 성경 읽기로 시종하엿으며 감방 안에 있는 죄수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전도하였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그에게 어느 사이에 '옥중성자'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는 혹독한 고난과 온갖 유혹과 회유를 당하면서도 끝내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우상숭배 거절의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광주형무소,서울형무소,청주형무소를 전전하면서 만 5년이란 긴 세월을 모진 옥고를 치루면서 지냈다.

3. 신사 불참배로 인한 순교자 속출

1938년 2월에서 9월 사이에 한국교회의 공적 기관의 대부분이 신사에 참배할 것을 언명하였으나 개교회나 교직자 또는 신도들이 개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1939년 초에 이르러 평북,평남,경남,만주 등지에서 신사 불참배 운동이 점차 조직화되어 확대되는 기운이 팽배히 일어났다.

신사 불참배 운동의 본거지는 물론 평양의 산정현교회이었다. 주기철 목사의 옥중고와 산정현교회의 강력한 불참배 태도는 확실히 전 한국교회의 신사 불참배 운동의 상징이었고 지주가 되어 있었다.

신사 불참배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생명을 내걸고 활동한 주도 인물로 평안북도의 이기선 목사와 경상남도의 한상동 목사 그리고 평안남도의 이주원 전도사등을 말할 수 있다. 이기선 목사는 1938년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신사 불참배 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채정민 목사를 만나 신사참배를 결사 반대하는 동지를 전국적으로 규합하여 신사참배를 아니하기로 태도를 취하는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는 김의창 목사와 함께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김형락 박의흠 게성수 김성심 오영은 김창인 김화준 심일철 등의 신앙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때로부터 만주와 평남,경남 등지에서 신사 불참배 신도들이 현 교회를 이탈하여 그룹예배를 드리는 일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경남에서의 신사 불참배 운동의 개시는 1938년 10월 24일 한상동목사가 부산 초량교회에서 신사참배 항거 설교를 한데서 비롯되었다. 1939년 12월 평양의 이주원 전도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그는 거창의 최남고 목사와 남해의 최상림목사,마산의 최덕지 전도사,함안 진주의 이현속 전도사,부산의 손명복 전도사와 조수옥 전도사 등의 신사참배 결사 반대동지들을 흡수하여 이 운동을 확대해 나갔다.

신사 불참배 운동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선교사들의 지원은 큰 힘이 되었다. 평양 주재의 하밀톤(F.E. Hamilton,)과 말스버러(D.R.Malsbury,馬斗元)

선교사 등은 운동자금을 제공하였다. 만주 흥경 주재의 한부선(B.F.Hunt 韓富善)선교사는 신사참배 반대 이유서를 인쇄 반포하여 만주 방면에서의 신사 불참배 운동을 지도하였다.

1940년 4월 3일에는 평양에서 신사 불참배운동자 연합회가 모였다. 이 회는 후일에 총회로 발전시킬 예정으로 있었다. 이렇게 신사 불참배 운동이 표면화 확대되자,경찰은 신경을 곤두세워 불참배 운동의 내용을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1940년 5월에 주기철 목사를 재검거하고 전국의 불참배 운동자를 일제히 체포하였다. 1945년 5월 18일부터는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위반 또는 불경죄 등을 적용하여 중형으로 처벌하였다.

일제에 의한 신사참배 강요로 장로회신학교가 폐쇄되었고 2백여의 교회가 해체되었으며 2천여 신도가 투옥되었고 50여의 교역자가 순교하였다. 실로 한국교회가 일본의 태양신 앞에 허리 굽혔음은 엄연한 사실로서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비록 절대적 수는 아니었지만 이에 항거하여 진리를 사수한 교역자가 있고 순교자의 정화가 있어 한국교회를 향해 오늘도 빛나는 생명력을 던져주고 있음을 간과하지 못한다. 이 순교정신의 발로야말로 금자탑적 존재로서 한국 민족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기약하면서 영원히 빛을 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