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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 5 편 한국교회의 재건과 분열 2.

Joyfule 2006. 12. 31. 00:56


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 5 편 한국교회의 재건과 분열

제2장 공산당에 의한 교회의 수난

 

1.북한지역의 교회의 참변
1945년 11월 16일,기독교인들은 조국 해방의 감격을 살리어 보다 나은 국가의 건설을 의도하여 윤하영 한경직목사 등이 주동하여 평안북도 용암포에서 기독교사회민주당을 결성하였다. 공산당은 이를 파괴하기 위하여 연단을 뒤엎고 그 자리에 앉은 장로 한 사람을 타살하였으며 부근의 교회당에 방화하였다.이에 충격을 받은 신의주의 학생들이 총궐기하여 시위를 벌이자 소련군이 비행기와 탱크를 동원하여 기총 소사를 가하여 수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한 것이 소위 신의주 학생사건이다.

1947년 11월에는 평양에서 김화식 목사와 고한규 장로가 기독교자유당을 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결당식을 거행하려는 전 날,11월 18일에 북괴 경찰에 의하여 탐지되어 40여명이나 되는 교회 주동인물이 모두 체포되고 투옥 또는 시베리아로 유배되는 비운을 만났다. 북괴 공산당은 온갖 구실을 내세워 교회 탄압에 광분하였으며 지목되는 주동 인물의 제거를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괴롭혔다.

공산당은 1946년 11월 3일,주일을 기하여 괴뢰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총 선거일로 정하고 기독교인이 여기에 찬동하는지의 여부를 주시하였다. 북한 오도연합노회는 그에 대하여 결사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성수 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에 여하한 행사에도 불참한다는 것,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는 것,교회당은 예배 이외의 어떠한 경우에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성명하였다. 연합노회의 지시를 받은 대부분의 교회는 총선거를 거부하고 참가하지 않았다. 공산당은 얼마 후에 교회의 주요 인물들을 즉 회장인 김진수목사를 비롯하여 김인준,김철훈,이유택,허천기,김길수 목사 등을 체포하였다.

1950년 6월 25일을 기하여 남침 계획을 세운 북괴 공산정권은 기독교인의 철저한 소탕을 단행하였다. 그때까지 잔존하고 있던 이성휘,최지화,이학봉,강문구,김태복,장윤성 목사 등의 지도 인물들을 총 검거하였으며 교회는 모두 폐쇄하였다.

9.28 수복과 함께 국군과 유엔군이 북항하게 되자 북괴군은 후퇴하는 도처에서 기독교인을 학살하였다. 북한 지역에서의 기독교인 수난은 세계 교회사상 유래를 볼 수 없으리만큼 극한 상황이었다.

현재 북한 공산당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는 하나의 교회 한사람의 교인도 표면적으로 찾아 볼 수 없다. 그러하지만 기독교인의 움직임은 아직도 지하에서 계속되고 있다 .평안북도 박천에는 원래 기독교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 지방 사람들은 공산당 정치가 통 마음에 맞지 아니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압제로 인하여 명령에 순종하고 있었다.

박천 국민학교에 여선생 한 분이 있었다. 이 여선생은 어렸을 때 어머님을 따라 교회학교에 잘 다녀서 그 마음에는 일찍부터 신앙이 깃들고 있었다. 그녀는 찬송을 부르고 싶었었으나 마음놓고 소리내어 부를 수 없음이 안타까왔다. 이 여선생은 한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 찬송가 곡조로 동요를 만들어 부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이 동요를 가르쳐 주었다. 어린이들은 집에 돌아가 이 동요를 노래불렀다. 속마음으로는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밖으로는 교인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은 동네 사람들은 이 노래를 들을 때에 찬송가의 곡조가 곧 연상되었다. 어른들은 은근히 마음에 기뻐하면서 너도 나도 이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되었다. 삽시간에 이 노래는 온 동네에 퍼졌다. 이상히 여긴 공산당 정보원들은 그 원인을 조사하고 또 조사한 결과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표현임을 알게 되었다. 동요를 지어 가르친 여선생은 당장 체포되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일체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하는 엄명이 내렸다. 이마만큼 북한 공산치하에서의 기독교인의 수난은 극도에 달하고 있다.


2.남한에서의 적도(赤徒)들의 도량(跳梁)

남한 지역에는 조국이 광복되면서 미군이 진주하였기 때문에 미 군정 기간 3년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로 기독교인들은 마음놓고 전도하여 많은 교회를 전국 도처에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간에도 공산당은 갖은 음모와 술책으로 공산주의를 선전하면서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대한민국 발전을 애써 방해하였다. 때로는 게릴라대를 동원하여 폭동을 일으켜 내란을 음모하는 일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사건이 여수.순천 반란사건이다. 1948년 10월 20일,전라남도의 이 지역에서 공산 도배들은 무력으로 일어나 특히 기독교인들을 많이 살해하였다. 이 때에 손양원 목사의 두아들,동인과 동신 형제가 총살되었음은 너무도 비참하였다.

6.25의 전란을 전후하여 남한 각 곳에서 당한 교회의 참상은 북한교회의 그것과 비교할 바는 되지 못하였지만 그래도 치명적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북괴군에 의하여 수 많은 교역자가 사살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북괴권에 의하여 수 많은 교역자가 사살되었으며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적도를 용서해 준 손양원 목사도 마침내 공산군에게 총살되어 순교하였다. 유능한 신학자 남궁혁,송창근,김영주 목사 등을 비롯한 1백여명의 목사가 북으로 납치되어 갔다. 또한 전쟁으로 인하여 수백의 교회당이 파괴되었다. 특히 한국 기독교 문화재의 집적소인 한국기독교 박물관과 기독교 사료의 보고인 언더우드 도서관이 파괴 되었음은 한국 교회 전체를 위하여 큰 손실이었다.

1951년 1.4후퇴를 계기하여 한국교회는 수십만의 북한 피난 교인을 포함하여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난의 걸음을 재촉하여 마지막 지점인 부산에 집결하였다. 이곳에서는 기독교인의 구호 대책을 모색하기 위하여 '기독교연합 전시 비상 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에 한경직 목사, 총무로서 김양선 목사가 눈부시게 활약하였다. 위원회에서는 미국 대통령과 유엔 사무총장과 맥아더 사령관에게 각각 메시지를 발송하여 한반도에서 유엔군이 철수하지 않고 한국 국민을 구원해야 한다고 호소하였고, 이러한 여론을 환기하기 위하여 한경직 류형기의 두 목사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편 부산 초량교회에 피난 교역자들은 뭉치어 밤을 새워가면서 죄를 뉘우치고 조국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얼마 후 미국의 트르먼 대통령으로부터 "한국교회는 자유와 독립 수호의 생명력이 된다"라는 회답이 내도하였고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은 "미구민은 한국민과 함께 창조의 기쁨에 끝까지 참여할 것이다"라는 희망에 넘친 서신을 보내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백성을 버리시지 않고 지켜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