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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3편 한국교회의 발전과 확대 2.

Joyfule 2006. 12. 25. 01:40

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 - 제3편 한국교회의 발전과 확대 2.

제2장 일제 탄압에 불굴한 교회의 진흥


1.일제 종교정책의 시행 착오

거족적인 3.1운동의 여파는 무단 일변도로 일관한 일본의 정책을 변경시켜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태로 몰고 갔다. 따라서 일제는 외형적으로나마 정책 노선을 변경하여서 기만과 가식의 방법으로 한국인에 대한 식민 통치를 진행하기로 방침을 바꿔 세웠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육.해군 대장에 국한하였던 조선 총독의 자격을 문관 출신으로 바꾸었고 새로이 부임한 사이또 총독이 곧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정책을 바꾼다고 선언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고 한국인에게도 일본인과 같은 교육의 균등화를 기한다는 뜻을 언명하였고 언론의 통제도 철폐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가 한국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수단 방법의 변형일 뿐으로 본질적인 면에서는 무단 정치와 전혀 다를 바 없었으며, 그런고로 얼마 안가서 그 술책이 속속 탄로나게 되었다.

종교 정책에 있어서는 종교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교회의 교권을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탈취하려 하였다. 그러기 위하여서 일부 한국교회의 불평 분자들을 포섭하여 이간책을 사용하여 교회 분열을 획책하여 약체화 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한 적극책으로 한국 기독교의 일본화를 꾀한 방법이 있었다. 일제는 정부의 어용 기구가 되어 있는 일본 조합교회를 시켜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회유하여 한국교회를 조합교회에 합병케 하여 단일 교회를 만들고 필경은 교회를 총독 문화 정책의 선전 기관으로 만들려고 기도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조합교회의 와다세 목사는 한국인 목사 20여명을 재빨리 4월 18일에 조선호텔에 소집하여 성대한 만찬으로 대접하였다.

그리고 나서 동 회의에서는 특별한 시국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이기로 결의하였고 그 실천 방안으로서 선전 팜프렛의 발간 반포와 순회 강연 등을 시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3.1운동을 일종의 소요 사건으로 규정하는가 하면, 기독교인에 대한 일본 관헌의 만행과 박해를 규탄하는 선교사들의 언동을 크게 반박하여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장,감 양 기성교회의 교인들을 유인하여 자파 교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포섭하려 했다. 그러나 교인들은 호응하려는 기세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조합교ㅗ히는 날로 교세가 쇠퇴하였고 마침내 유명 무실한 교회로 전락하여 일제의 기만적인 교회 정책은 일단 실페하고 말았다.

일제가 아무리 수단 방법을 강구하려 한국 교회를 교란하려고 시도하였지만 끝내 실패로 돌아가자 드디어 법적으로 교회 탄압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것이 소위 1920년에 발표된 '개정포 규칙'이란 것이다. 이러한 온갖 악조거 하에서 한국 교회가 일시적으로나마 낙심하여 침체상태에 빠졌음은 유감이라고 말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결코 완전히 후퇴하거나 쓰러지지 아니하였다. 한국교회는 모진 시련의 골짜기를 넘어서 칠전팔기의 신앙으로 다시 일어나 교회진흥운동을 대대적으로 일으켜 약세를 회복하였다.

2.전국 교회진흥운동의 팽배

한국 백성의 반응이 새로와진 이 시기에 감리교와 장로회에 있어서는 모두 교세 확장을 위한 대규모 조직적인 운동을 추진하기에 인식하지 않았다. 감리교에서는 이 운동을 '백년 전진'(The Centuly Advance)이라 불렀고 장로회에서는 '전진 운동'(The Forward Movement)이라고 이름 붙였다.

          장로회 교세표 (1917-1930년)
 년   도     교회당수    신설교회당      교인수
 1917년      1,648호           52호     149,526명
 1918        1,778            102       160,919
 1919        1,705            115       144,062
 1920        1,738            184       153,915
 1921        1,879            267       153,915
 1922        1,941            308       179,158
 1923        2,090            255       193,850
 1924        2,171            300       191,887
 1925        2,277            213       194,408
 1926        2,265            178       519,060
 1927        2,045              -       194,678


1919년 장로회 총회에서 진흥위원회 위원장이 된 방위량(William N.Blair)목사는 10개 종류의 소 책자를 만들어 전국 도처를 순회하면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각 교회에서는 진흥 비교표를 배부하였고 성적을 노회에 보고케 하였다. 그 내용에는 전도,성경 공부,새벽 기도회 등 9개 종목의 진흥 방법이 포함되어 있었고 우수한 교회에 대하여는 총회에서 성장을 수여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부흥 운동에 가장 큰 성과를 올린 것은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 등이 전국적으로 부흥집회를 인도함으로 얻게되었다. 그들은 설교와 능력을 통하여 한국교회에 새로운 희망과 광명을 던져 주었고 한국 사회를 향해 새로운 시대 정신을 불러 일으켜 다대한 공헌을 남겼다. 그들은 언제나 "한국 교인들이여 일어나라""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절규하여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였고 한국 민족은 모진 비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불멸의 찾아볼 수 있게 격려하였다.

1919년은 한국 민족에게 있어서 거족적인 3.1운동이 있은 중요한 해이기도 했지만 감리교에 있어서는 미국에서 해외 선교부가 발족한지 100주년에 해당하는 뜻있는 해였는고로 한국의 감리교는 '백년 전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던 것이다.편성된 전도대는 전도지와 쪽복음을 손에 들고 집집마다 방문하고 각처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달하였다. 교직자들은 청지기대회를 열어 사명자의 태도를 재확인하였으며 새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특별반을 조직하였다.

1923년은 동양 선교 75주년을 기념하여 특별 전도운동을 폈으며 그 다음해에는 남북 감리교가 합동하여 연합협의회를 조직하였고 전도,교육,문서 출판 등의 11개조의 진흥 방안을 구체화하여 추진하였다. 이때의 감리교의 유명한 부흥사로는 유한의 목사가 있었으며 그는 노방 전도와 함께 야시 전도의 특이성을 살려 전도의 성과를 크게 올렸다.

이 시기의 부흥 운동은 한국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 추세로서 전도단들이 세계를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1923년에는 미국의 비더울프 목사를 단장으로 한 부흥단이 내한하였으며 서울을 비록하여 평양,선천,대구,광주 등 12개 도시를 두루 누비면서 순회 전도를 하여 어디에서나 대성황을 이루면서 수많은 결신자를 획득하였다.

특히 3.1운동 이후에 출감한 기독교 인사들의 영향으로 조직된 대.소 전도단의 활동은 주목할만 하였다.이들이 하는 강연및 설교의 내용은 주로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과 구원의 역사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인권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정신을 은연 중에 강조하였다. 그런고로 일제 경찰들은 이를 중지시키기 위하여 뒤를 쫓아다니면서 여러모로 위협하였다. 그러나 연사들은 열띤 어조로 언제나 군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으면서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한국 민족은 절망적인 시련의 골짜기를 능히 교회의 진흥을 통하여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전진을 계속하였다.

3. 성경.찬송가 발간에서 민족교회관 수립
선교사업 진행에 있어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성경 및 찬송가의 역간이라 하겠다. 하물며 프로테스탄트 교회야말로 성경을 중심한 교회이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그 어디에나 선교지에 들어가기만 하면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케 하는 과업을 먼저 수행하였다.

한국에 있어서는 유독 선교사가 정식으로 입국하기 전에 국외에서 성경이 번역 출판되었고 이것이 국내에 반입 전포되었다는데 특색이 있다. 그러나 만주에서 출간된 로쓰 번역(Ross Version) 성경이나 일본에서의 이수정 역 성경은 단시일에 너무 급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역이 많았다. 또 지방 사투리의 표현이 섞여 있었다. 그런고로 표준어로 되는 정확한 성경의 번역은 필수적 요청이었다.

1887년 언더우드,아펜셀라,스크랜톤,헤론의 네 사람으로 조직된 성서위원회는,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않는 외국인들이면서 참고 서적이나 한글 사전도 없는 상황에서 고생을 다하면서 번역사업에 착수하여 20년이 지난 1906년에 신약성경의 결정본을 출간하였다.

1908년에 김정식,김명준,김창식의 한국인 세 사람이 번역 위원으로 가담되었음은 한국민족 교회사 상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 사실로서 기뻐할만 하다. 1911년에는 구약성경의 번역이 끝나면서 출간되었고 또 그해에 신구약의 합본 성경도 간행되는 거사를 만났다.

성경이 나오기 전 해인 1910년은 국가적으로 한민족이 일본에게 합방 당한 너무나 슬픔에 가득찬 해이었다. 그러기에 당시의 수백만 한국인들은 한글로 된 성경을 보자 열렬히 애독하였다. 나라 잃고 멸시 당하는 힘겨운 처지에 빠질수록 더욱 우리말과 우리 글의 귀중함을 뼈아프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교인들 뿐 아니라 일반 민중 사이에도 널리 보급되어 한글을 퍼쳐 한국 국문학사에도 불멸의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이 성경의 내용이 진리로서 무지와 몽매를 깨우치면서 겨레 사랑하는 마음을 함양하여 애국 애족심을 크게 일깨웠은 두말 할 것 없다.

찬송가의 편간도 한국교회의 문서 선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선교사들은 성경 번역과 거의 동시에 찬송가의 편간 사업에 착수하였다. 1896년에는 감리교 찬송가로 '찬미가'가 나왔고 1898년에는 장로회에서'찬셩시'를 출간하였다. 초대 교인들은 정확한 곡조로 유창하게 찬송가를 부르지는 못하였으나 나라 잃은 설음 속에서 그 얼마나 열심히 찬송을 불렀는지 모른다.

1.우리 황상폐하 천지일월 같이 만수무강
산높고 물고운 우리 대한국에 하나님 도우사 독립부강

2.이천만 동포난 한맘 한뜻으로 직분하세 사욕은 버리고 충의만 앞세워
임군과 나라를 보답하세

위는 초대교회에서 찬송으로 부른 애국가의 몇 절을 뽑은 것이다. 초대 교한국교회는 태극기와 십자가를 항상 걸엇으며 말하자면 태극기와 십자기는 애국하는 한국교회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찬송의 연창은 우리 민족이 도탄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새 희망을 찾으려고 애쓴 그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실로 이는 한국 민족교회관 수립에 있어서 크게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장로회 교세통계표 (1884년-1900년)
 연    대  미조직교회 조직교회  자립교회  세례교인  학습교인
 1884-85            1        -         -         6         -
 1885-86            2        -         -         9         -
 1886-87            2        -         -        25         -
 1887-88            2        1         -        65         -
 1888-89            2        1         -       104         -
 1889-90            4        1         -       110         -
 1891-92            6        1         -       127         -
 1892-93            6        1         -       141         -
 1893-94            7        1         -       236         -
 1894-95           13        1         -       286         -
 1895-96           26        1        15       530         -
 1896-97           73        1        40       932      2344
 1897-98          205        1       170      2079      2800
 1898-99          261        2       230      2804      3426
 1899-1900        287        2       255      3690      4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