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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5

Joyfule 2005. 7. 23. 03:48


 한국 교회사 5
제9편 한국교회의 조직과 수난  
장로교회의 조직 : 
1901년 마펫은 김종섭, 방기창을 데리고 신학교육울 시작하여 
장로회신학대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1915년에는 등록학생수가 250명을 넘었다. 1
907년 길선주, 방기창, 송인서, 한석진, 이기풍, 양전백, 서
경조 등 7명이 첫 졸업했다. 
1907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창립노회를 개최하여 
목사7명, 장로 53명, 교회988개, 세례교인 70,000명의 교회로 출발하였다. 
1912년에 7노회로 총회가 창립되었는데 
총회장은 언더우드, 부회장은 길선주 목사가 선출되어 
한국장로교회는 세계교회의 일원이 되었다. 
총회 창립후 중국 산동성에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목사를 파송하였는데 크게 성공했다.
감리교회의 조직 : 
1908년 정동교회에서 한국연회가 창설되었고 
남,북 감리교회는 각각의 조직을 운영하다가 
1930년에 하나로 통합되었다.  
일제의 기독교 정책 : 
줄기찬 탄압과 박멸로 일관되었다. 
이등은 기독교에 대해 유화적이었으나 사내정의는 노골적으로 
반기독교적 태도를 보여 1913년에는 모든 학생들이 
국가적 축제일에 일본 천황의 사진에 절하도록 강요했다.
해서교육 총회 사건 : 
장로교회 계통의 학교만도 
1907년에 405개, 1908년 561개, 1909년에 719개로 늘었다. 
1908년 기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해서교육총회가 조직되어 
한 면에 한 학교를 세워 교육에 전념하자고 다짐하였다. 
안명근이 서간도에 학교를 세우려고 모금하러 국내에 들어왔다가 
체포되었는데 일제는 해서교육총회의 회원을 모두 체포하였다.
105인사건 : 
1907년 안창호가 결성한 신민회는 한국인들에 의한 학교들이 
강력한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고 설립되었는데 
일제는 105인사건을 '사내 총독모살사건'으로 규정했고 
총독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기독교인들이 왜곡했다고 주장하여 
목사 6명, 장로50명, 집사 80명을 포함하여 
서북지방 지도자 500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다. 
이 사건에서 선교사들과 미국 본국의 역할이 커서 
일제의 음흉함을 세계에 폭로했다.
기독교 학교의 탄압 : 
총독부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일본학생과 한국 학생들의 차별교육을 규정했고 
국채보상운동을 벌여 대학설립 인가를 청원했으나 거절되었다. 
1919년까지 보통학교가 전국적으로 249개교에 불과하였다. 
1915년 3월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면서 
성경교육을 정규시간에서 빼고 예배를 철폐하라는 규정은 
학교의 존립과 관계되는 문제였다. 
그리하여 1910년에 2,080교가 1915년에는 1,154교로 
다시 1923년에는 649개로 감소했다.
일본교회의 조선교회 간여 : 
일본교회는 조선교회에 일본조합교회를 이식시키려고 획책하였다. 
이에 앞장 선 도뢰상길의 노력으로 
1912년에 전국에 16개 교회가 일본 조합교회에 가입하였으며 
총독부는 이 교회들에 보조금을 비밀리 지급하였다.
교회내의 분쟁 : 
전북 대리회 지역의 최중진 목사는 
장로교회를 탈퇴하여 자유교회를 설립했다. 
이유는 선교사에 대한 적개심인데 최중진은 사기죄로 체포되었다가 
후에 일본 회중교회에 합류했다. 
김장호는 최초로 자유주의 신학을 부르짖고 나선 사람이다. 
1918년 노회는 목사직을 박탈하였고 
김장호는 노회를 탈퇴하여 조선기독교회를 창립하였다. 
이만집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주동자로 활약하였는데 
한 청년이 당회에 문제를 몇가지 건의한 것에 대해 
출교와 책벌하자는 의견에 이목사와 선교사들이 대립하였다. 
이 문제는 법정으로까지 비화하였고 이는 
반선교사 정책을 쓰는 일제의 정책이 교묘히 작용하기도 했다.
일제의 대한 정책 : 
동화정책과 우민화정책,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고 퇴폐문화를 유입하여 
공창,아편을 허락했고 교회를 조직적으로 억압하여 
모든 일을 허가제도로 모든 교회활동을 철저히 제약했다.
제10편 한국교회와 3.1독립운동
3.1 운동의 과정 : 
신한청년단은 김규식을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담에 파견하였다. 
일본 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구성하였고 
2.8독립선언식을 동경YMCA에서 거행하였다. 
국내에서는 기독교인 16인, 
천도교측에서 15인, 
불교 2인이 종로의 명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고 
파고다에서는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읽으면서 
서울,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행해졌다. 
대개 기독교 학교가 있는 곳에서 그곳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퍼져 1920년 3월까지 사망자 7,645명, 부상자 45,562명, 
체포자 49, 818명, 가옥소각 724채, 
교회소각 59개소, 학교소각 3개교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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