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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 6

Joyfule 2005. 7. 23. 03:50


 한국 교회사 6
제12편 1920-30년대의 교회상황  
길 선주목사의 사경회 : 
민족 대표 33인 중 한사람인 길선주목사는 2년의 옥고를 치렀는데 
감옥에 있으면서 요한계시록을 거의 외웠고 
<말세학>이라는 계시록 강해집을 만들었다. 
그의 종말사상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내세지향적으로 
이끌고 간 것이 아니라 말세학에서 
지상의 낙원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독특한 신앙을 가졌다.
김익두목사의 이적집회 : 
스왈른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고 성례를 받기전에 
신약을 백번이나 읽었고 '기도선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평양장로회신학교 3회 졸업생인데 
1926년 남대문교회에서 지식층청년들이 기독교신앙을 
미신적으로 이끌어간다고 반대하기도 하였다.  
그는 억압속에 있는 대중들에게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한국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고 
3.1운동 후에 용기를 불어 넣어 준 예언자였다. 
부흥회수가 776회, 설교횟수가 2만 8천여회였다. 
불행하게도 해방후 조선기독교연맹에 가입하고 
공산당 어용단체에 협력하고도 학살당하는 운명에 처하였다.
이용도목사의 신비주의 : 
개인의 영적체험에 근거한 신비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주님과의 합일, 이것이 그가 끌어낸 신앙의 결론이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열화 같은 반향을 일으켰다. 
1931년 8월 황해노회는 이용도가 재령교회를 훼방하고 
여신도와 서신을 거래하며, 불을 끄고 기도하고, 
무교회주의자라는 이유로 금족령을 내렸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으나 세속화된 기성교회와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공격함으로 스스로의 입지를 좁혔고 
유명화에게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느모로나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 
그는 교회안에 분규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기성교회에 회의를 느꼈다 
무교회주의자인 내촌감산 문하에서 공부하며 영향을 받았다. 
1927년 귀국한 그는 함석헌, 송두용, 유석동과 <성서조선>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기성교회의 교리, 주직, 예배의식을 거부하고 
자기들끼리 신앙공동체를 만들어갔다. 
따라서 우리 민족의 정신사적, 교회사적 사명을 강조하고 
선교사들이 전해준 교파적 신앙을 거부하고 민족신앙을 주창하였다. 
그의 일생을 통해 '2C'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이는 Christ와 Chosun이었다.
적극신앙단 : 
YMCA총무였던 신홍우는 민족주의적인 의식과 반선교사적인 경향을 
자유주의적인 신학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반서북', '반선교사', '반보수'로 나타낸 운동이다.
제11편 사회적변화에 대한 교회의 대응
공 산주의 사상의 대두 :  
레닌은 약소국가들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기에 
뜻있는 지사들과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복음으로 들렸다. 
이는 한국교회의 위기였는데 기독교가 들어가 전도해야 할 대상을 
공산주의가 침투하여 그 사상을 집어넣고 
기독교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연해주의 한인사회당, 바이칼호 근처의 이르크츠크 한인공산당지부, 
아사원의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한인겅산당도 여러 갈래인데,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상해파, 
여운형의 이르크츠크파, 
일본 유학생 중심의 엠엘파였다.
공산당에 의한 기독교의 피해 : 
한양청년연맹은 1925년 10월 주일하교대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반 대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성탄절을 '반기독교의 날'로 정하였다. 
특히 동아기독교회의 윤학영, 김이주등은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최초의 사람들이다.
교회의 농어촌 문제 : 
토지 소유권을 잃은 농촌문제를 해결하고자 전문가인 러츠가 
1920년에 내한하였고 숭실전문학교는 농과를 신설하였다. 
특히 YMCA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20개의 농민지도소가 개설되고 
'한국 농촌'이라는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사 회계몽운동 : 
탄링의 강연회를 시작으로 절제회가 조직되어 금주, 단연, 
물산장려운동이 시작되었다. 
장로교선교사들은 공창폐지운동, 축첩과 잡기하는 폐습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국산품을 애용하고 이제 상품을 배격하자는 물산장려운동은 
조만식에 의해 이루어졌다. 
성경구락부는 1929년, 킨슬러에 의해 시작되었다. 
'개척구락부'라는 이름으로 야학을 시작하여 
1938년 5천명으로 늘어났으나, 신사참배문제로 결국 폐쇄되었다. 
한국전쟁후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54년에는 7천명 이상이 공부를 하였다.
신학적 갈등 : 
한국의 신학적 갈등은 미국이나 일본에 유학한 해외파들에 의해 
비롯되었고 지방색까지 겹쳤다. 
표면화된 것은 송창근 목사의 사임이었고, 
논란은 박형룡과 김재준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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