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험담과 뒷담화에 관하여2. ♣
험담에 ‘틀린 대목’이 전혀 없다면, 험담꾼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일까.
우리는 누구에 관한 부정적인 팩트들을 그의 등 뒤에서 서로 나누며
공분을 키우거나 욕설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일까.
그것도 인간의 사회에서 당연히 생겨나는 소통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뒤에서 나눈 험담으로, 그 당사자가 받는 고통은,
그 험담의 ‘사실성’에 근거하여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험담이 쉽게 유통되는 까닭은, 그것을 들어주는 귀가 있고
그것에 맞장구를 치는 입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들어주는 귀는, 흥미로운 일을 만나니 즐겁고
맞장구를 치는 입은 그 이야기를 증폭시킴으로써
누군가에게 가해하는 쾌감을 느낀다.
이 모든 일들은,
그 대상자가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것이니 잠정적으로는 안전하다.
그 어떤 험담꾼도 자기 자신을 험담하는 일은 없다.
왜 자기를 험담하지 않는 것일까.
자기에 관한 팩트를 다룰 때,
인간은 결코 ‘악의적인 견해’를 포함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팩트만 엄격하게 다루거나
팩트보다 나쁘지 않게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자기 자신에 관한 팩트들은, 잘 알고 있기에,
그것을 스스로가 오해할 가능성은 많지 않다.
이 점을 고려해본다면 험담이 생겨나는 원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팩트’에 대해 아는 정도가 자기 자신 만큼 되지 않는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자기 자신을 대하듯 배려하지 않고
거기다가 악의를 개입시키기 쉽다는 점이다.
험담꾼이 험담을 늘어놓았을 때 그것을 듣는 상대가 바로 그 대상이었다면
험담은 결코 증폭되거나 다시 다른 곳으로 유통되기 어렵다.
험담을 듣는 귀 또한 ‘자기에 관한 팩트’라면 엄격하게 다룰 것이고
애정을 가지고 의견을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 자기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험담을 듣는 귀 또한 험담을
자기에 관한 것과 동일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험담의 공격성’에 일정하게 가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험담이 유통되는 건,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소통문화’의 병폐라 할 만하다.
이것은 인간관계를 황폐화시킨다.
타인에 관한 험담을 ‘자기 스스로에 대한 험담’ 수준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험담의 유통은 불가능하다.
타인에 관한 험담들은, 어디서든 누군가가 자기를 험담할 수 있는
‘불안’을 키우는 어리석음이기도 하다.
타인에 대한, 배려없는 뒷담화는, 자기 성찰을 놔버린 세상의 뒤숭숭한 소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