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 : 일리아드 (liad)★ 그리스 선단을 둘러싼 싸움
헥토르는 최전선 부대에게 그리스 군 방어선 앞의 도랑을 건너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전차 끄는 말들이 도랑 앞에서 그 너비와 깊이를 가늠해 보고는
무서운지 힝힝힝 울었다.
도랑을 넓고 깊기도 하려니와 바닥에는
끝이 뾰족하게 깎인 말뚝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결국 트로이아 전차병들은 전차는 건너편에다 두고
다섯 명씩 짝을 지어 지휘자의 뒤를 따라 도랑을 뛰어넘었다.
헥토르와 파리스, 헬레노스와 아이네이아스,
그리고 사르페돈을 앞세운 트로이아 연합군은 밀집 대형을 이루었다.
그런 다음 수많은 소가죽 방패로 방벽을 만들어 세우고
그리스의 방어벽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리스 전차들이 드나드는 방어벽의 문은 열려 있었다.
말하자면 그 문은 싸움터에서 후퇴한 병사들을 위한
퇴각로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리스 병사들은 서로 엉킨 채 문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트로이아 군에서 고집세기로 이름난 아시오스가
그 문을 돌파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정면을 향해 밤색말을 몰아갔다.
그러나 먼 북쪽 나라에서 온 두 라피타이 창병이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문 양쪽의 방어벽 위에서 돌덩이와 창을 던지는
전우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시오스의 공격은 두 창병의 창끝에서 좌절됐다.
문 앞은 여전히 퇴각하는 병사와 도망치는 병사들로 어지러웠다.
같은 방어벽의 다른 문 앞에서는 선봉을 맡고 있던
헥토르의 부대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제우스의 새인 독수리가 그들 머리 위를 날다가 부대 한복판에다
살아 있는 핏빛 뱀 한 마리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나쁜 징조로 받아들였다.
공격을 다음 날로 미루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그들에게 말했다.
"가장 좋은 징조가 무엇인지 말해 주랴?
그것은 바로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
트로이아 군의 사기는 이 말 한 마디로 되살아났다.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헥토르의 뒤를 따랐다.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싸움판에서는 시르페돈이 친구이자 전우인
글라코스외 함께 산사자처럼 방어벽으로 달려갔다.
트로이아 연합군은 물밀 듯이 그 뒤를 좇았다.
그들은 마침내 방호벽에 구멍을 뚫었다.
더구나 글라코스가 팔에 화살을 맞는 바람에 화살촉을 뽑을 때까지
퇴각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방어벽의 나무에는 무수한 핏자국이 찍혔다.
어느 지점이 되었든 방어벽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나
고함소리와 창칼 부딪치는 소리로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헥토르 부대는 있는 힘을 다해 나무 문짝을 부수고 방어벽을 허물고자 했다.
그러나 방어 벽 안에는 그리스 군이 방패로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방어벽이 있었다.
방어벽 위에서는 화살과 창이 어지럽게 트로이아 군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헥토르는 커다란 바위(두 사람이 힘을 합해도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바위였지만 제우스 신은 그 바위를 양털보다 가볍게 만들었다)를
번쩍 쳐부서지면서 목재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헥토르는 부하들에게 따라오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자신이 먼저 뛰어들었다.
트로이아 귄의 표효는 둑 터진 산골짝의 물소리를 방불케 했다.
그들은 문을 지나 양쪽에 서 있는 방어용 말뚝 울타리로 접근했다.
밀물 간은 트로이아 군의 공격에 그리스 군은
뒤쪽에 정박해 있던 배 안으로 들어갔다.
트로이아 군이 그리스 전영 한복판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한 제우스 신은,
검은 겔리온 선고물에서 벌어지는 싸움판에서 눈길을 거두고 다른 일을 생각했다.
그러나 바다의 신이자 지진의 신인 푸른 머리카락의 포세이돈은
그리스 군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모른 체하지 않았다.
그는 수레에다 바람같이 빠른 말을 매고는
바다 밑에 있는 궁전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돌고래가 뱃머리와 나란히 달리듯 바다의 괴수들이 그와 나란히 달려나왔다.
마치 해변으로 밀려드는 흰 파도처럼 포세이돈 일행이
물 속에서 솟은 곳은 그리스 진영의 바로 옆이었다.
포세이돈은 지상으로 솟구치자마자 말과 마차는 그 자리에 두고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모습을 감춘 채로 트로이아 군에 밀리고 또 밀리는 그리스 군 사이로 들어가,
그들의 사기를 북돋우면서 한 발도 물러나지 말라고 응원했다.
누구의 격려를 받고 있는지 모르면서도 이로써 힘을 얻은 그리스 군은
철벽 같은 저항을 했다.
포세이돈 신의 힘이 그들에게 흘러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트로이아 군을 밖으로 밀어 내고 검은 선단을 둘러샀다.
밀고 밀리는 어지러운 싸움의 와중에서 헥토르와 아이아스가 만났다.
아이아스는 배의 용골판 굄돌 구실을 하는 바위를 집어
번쩍 쳐들고는 헥토르에게 던졌다.
바위는 방패를 들고 있는 팔 위와 투구 끈 바로 밑을 때렸다.
헥토르는 백정의 도끼에 맞은 황소처럼 무너져 내렸다.
들고 있던 방패와 창이 쓰러진 그의 몸 위로 떨어졌다.
트로이아 군이 재빨리 그를 둘러쌌다.
군사들이 좌우 양쪽과 뒤쪽을 방패로 가려 길을 내자 몇몇 병사들이 그를
싸움터 밖으로 부축해 내었다.
용맹스러운 장수 헥토르가 죽은 듯이 끌려나가는 것을 본 그리스 군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포세이돈 신은 그 때까지도 그들 속에 있었다)은
바다위로 휘몰아치는 폭풍 소리보다 더 큰 함성을 지르면서
트로이아 군을 방어벽 너머로, 도랑 너머로, 이윽고 평원으로 밀어 내었다.
제우스 신이 다시 토로이아를 내려다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제우스는 평원으로 밀리는 트로이아 군과 병사들의 부축을 받고
크산토스 강가에 이른 헥토르가 피를 토하고 있는 걸 보게 되었다.
그는 그것이 자기 아우 포세이돈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포세이돈이라면 제우스에게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힘으로 보아도 결코 제우스에게 뒤지지 않는 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제우스는 태양의 신이자 활의 신이며 인류에게
공포를 불어넣은 신 아폴론을 불러 내었다.
그리고는 지상으로 내려가 헥토르에게 새로운 생명과 헥토르 자신도
일찍이 보도 듣도 못한 정도의 힘을 불어넣어 주고 오라고 말했다.
아폴론은 태양의 눈으로부터 새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지상으로 날아내려갔다.
헥토르는 부하들로부터 찬물 찜질을 받고 있었다.
아폴론은 헥토르에게 새로운 생명과 신성이 깃든 힘을 불어 넣어 주어다.
그러자 헥토르는 벌떡 일어나서 갑옷을 찾아 입고는 다시 싸움터로 되돌아갔다.
그리스 병사들의 눈에 폭풍우같이 밀고 들어오는 헥토르의 모습이 보였다.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을 본 그리스 병사들은 혼비백산했다.
무수한 그리스 병사들이 선단 쪽으로 후퇴햇지만,
아이아스와 최전선의 투사들은 인간 방패를 만들고 헥토르를 대적했다.
그러나 헥토르는 트로이아 전차 부대를 이끌고 천둥치는 소리를 내면서 달려와,
던져진 창이 가죽 방패를 뚫듯이 갓 만들어진 방패를 돌파했다.
최전선이 무너지면서 그리스 병사들이 풍비박산했다.
평원과 도랑과 방어벽 문 앞에서는 무수한 인간이 무수한 인간을 죽이는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
트로이아 병사들이 시체에서 갑옷을 벗기려 하자 헥토르가 외쳤다.
"지금은 그까짓 전쟁 쓰레기를 챙길 때가 아니다. 선단으로 공격해 들어가라.
뒤에서 얼쩡대는 놈이 있으면 죽여서 개들에게 던져 주리라!"
헥토르는 채찍을 어깨 위로 높이 쳐들었다가 말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그 뒤를 따르는 전차들이 제우스 신의 벼락 같은 소리를 내면서 지축을 흔들었다.
병사들이 내던지는 창은 흡사 제우스 신이 던지는 번개 같았다.
트로이아 군은 도랑 앞으로 전차를 몰고 갔다.
이번에는 말들고 도랑 바닥에 끝이 뾰족하게 깎인 말뚝이 촘촘히 박혀 있었는데도
흠칫거리지 않았다.
전차가 도랑을 뛰어넘는 모습은 마치 가라앉아가는 배 위를 뛰어넘는 파도 같았다.
전차는 바닥에 걸리적거리는 시체 더미는 물론이고 막사의 천장 지붕과
울타리까지 뛰어넘고는, 앞을 가로막던 그리스 군을
빗자루로 쓸어 버리듯이 내몰며 나갔다.
창칼과 도끼를 휘두르면서 그들은 선단 속으로 진입했다.
그리스 군은 겔리온 선 갑판에 비둘기 무리처럼 오구구 모여
해전 때나 쓰는 긴 갈고리를 들고 트로이아 군에 대항하려고 했다.
가장 격렬하고 중요한 전투가 계속될 동안, 신으로부터
신통한 힘을 나누어 받은 헥토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싸움터에 있었다.
싸움으로 인한 광기로 그의 눈은 벌겋게 이글거리고 있었고
입가에는 양털 같은 게거품이 묻어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영웅의 광휘가 횃불처럼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는 전차를 달리면서도 끊임없이 고함을 질렀는데,
그 소리는 온 싸움터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불을 질러라! 검은 선단에 불을 질러라!"
병사들은 먹을 것을 조리하던 모닥불 불씨로 횃불을 만들어 들고는,
말꼬리 같은 연기가 나는 불꽃을 머리 위로 흔들면서 헥토르의 뒤를 따랐다.
죽은 자들이 켜를 이루며 두껍게 쌓여 있었다.
산 자들은 헥토르의 지휘 아래 시체의 산을 딛고 배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갑판에서는 그리스 군이 필사적으로 트로이아 군의 승산을 저지했다
트로이아 군이 맨 앞에 있는 겔리온 선을 지나 물밀듯이 밀려들자
아이아스가 부하들에게 소리 쳤다.
"힘을 내라. 힘을 내 헥토르를 막아라.
저놈이 우리 선단 사이를 누비면서 하는 짓거리.그것은 춤이 아니다."
아이아스는 이갑판 저갑판으로 뛰어다니면서 키 큰 사람의
서너 길은 족히 되어 보이는 갈고리로 적군을 찍었다.
그 모습은 흡사 네마리의 말을 몰면서 이 말잔등에서 저 말잔등으로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기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연기와 불꽃이 솟구쳐 오르면서 소금물에 절여져 있던
배의 널빤지가 우지직우지직 소리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서도 헥토르의 전령은 계속해서 외쳐대었다.
"불을 질러라! 검은 선단에다 불을 질러라!"
파트로클로스가 싸움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따라서 그리스 지영 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에우뤼폴로스의 막사를 나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파트로클로스가 보기에 선단의 반은 불길에 휩싸인 것 같았다.
전투는 선단을 중심으로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