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황소개구리들의 울음 - 김달성

Joyfule 2012. 12. 27. 10:19

 

황소개구리들의 울음 - 김달성

 

 

 

교회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수련회에 동행했다.

수련회 장소인 모도로 가기위해 우리는 아침에 인천 월미도에서 배를 탔다. 중부지방에 많은 비를 쏟아 부은 장마전선이 북한 쪽으로 잠시 올라간 사이 오랜만에 눈부신 햇볕을 맞았지만 아침부터 푹푹 찌는 날이었다.

수십 대의 차량과 많은 피서객들을 삼킨 큰배는, 사람들이 바닷물 위에 던져주는 과자 부스러기를 물에 덤벙덤벙 빠지면서 받아먹는 갈매기들의 묘기를 잠시 구경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영종도에 닿아 삼킨 것들을 토해냈다..

국제공항이 들어서면서 새로 난 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달려 국제공항 옆을 지나 석모도 선착장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배로 갈아탔다. 한 발짝만 살짝 뛰어도 건널 듯한 신도에 내려 다시 자동차로 해안도로를 따라 20여분 달리자 모도로 건너가는 잠수교가 눈앞에 시원하게 들어왔다.

영종도와 강화도 사이의 작은 섬, 모도의 나직한 산자락엔 30여 가구가 올망졸망 모여 살고 있었다. 부락 꼭대기에 솟아있는 교회 첨탑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 누워 살갗을 검게 그을리고 있는 갯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부락 옆에 자리한 자그마한 학교에 우리는 짐을 풀었다.

단 네 개의 교실을 가진 분교였던 모도초등학교는 6년 전에 폐교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학교 건물 지붕 위 여기저기 자란 잡초들이 손 내밀며 우리를 반가이 영접했다.

잔디가 깔려있는 학교 마당 구석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교실 두어 칸을 청소하는 일부터 시작한 우리는 라면으로 늦은 점심을 때운 뒤 곧 산너머 해변가로 달려갔다. 길게 이어진 고운 백사장에서 공놀이를 즐기던 학생들은 어느덧 물장구 치며 뛰노는 개구쟁이들로 돌변했다. 개구쟁이들은 다시 폭도들로 변신하여, 바닷가에 단지 바람만 쏘이겠다고 다짐하며 나와 점잖게 앉아있는 교사들과 여학생들을 예외 없이 수색, 납치하여 바닷물에 내던졌 다. 손뼉치며 깔깔대고 웃으면서...

붉은 노을을 뒤로하고 돌아온 우리의 모임은 저녁 식사 뒤 밤이 깊어지면서 더욱 무르익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황소개구리들의 어색한 울음 소리는 그래도 우리의 모임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일이 분마다 한번씩 뜨고 내리는 비행기의 굉음은 우리의 대화를 불가능하게 할 정도여서 아쉬웠지만...

늦은 밤, 서로 아픔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손전등으로 급조한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한 사람씩 나아와 편지 형식으로 쓴 자기의 아픔을 드러낼 때 다른 사람들은 어스레한 달빛만이 스민 교실 마루 바닥에 둘러앉아 조용히 경청했다.

처음으로 나온 중2 여학생 정 연이는 밤새워 일하고 새벽에야 귀가하는 어머니에 대해 말하다가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어엿한 공장을 운영 하던 아버지가 당뇨병으로 쓰러진 뒤 겪은 그 동안의 아픔을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신히 전했다.

가정이 부유하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고1, 광 욱에게도 의외의 고통이 있었다. 형의 연이은 가출이 늘 가정에 그늘을 드리웠던 것이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형의 가정과 학교에 대한 부적응이 가족 전체의 아픔 이었다고 고백했다.

중1 여학생 보람이는 병약한 몸 때문에 수련회에도 오기 어려웠지만 너무 오고 싶어 부모에게 떼를 써 간신히 왔다고 했다.

감기는 달고 살다시피 하는 데다 툭하면 편도선염과 폐렴으로 학교에 결석하는 일이 잦다.

공업고에 다니는 세영이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에 대한 상처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그러나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부모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인사도 빼놓지 않았다.

평소 발랄한 모습만을 보여온 은영이에게도 속앓이는 있었다. 지난봄 등교하던 만원 버스 안에서 성추행 당한 충격에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심정을 토로했다. 요즈음도 그 사건과 연관된 악몽을 자주 꾸게 된다고 했다.

다른 남학생은 집에서 잦은 다툼으로 불편한 관계에 있는 형과의 갈등을 이야기했다. 그래도 자신이 한번은 몹시 아파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을 적에 형이 찾아와,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위로할 때 눈물을 흘렸노라고 고백했다.

어릴 적 부모의 이혼으로 큰 상처를 떠 안은 한 여학생은 그 동안 언니와 단 둘이 외롭게 살아온 얘기를 했다. 항상 사랑이 고파 방황하며 인간관계를 원만히 가질 수 없었음을 그녀는 술회했다.

이 밖에도 여러 학생들의 아픔들을 나누는 동안 우리는 서로 공감하고 아파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학생들의 아픔을 접하면서 나에게는 왠지 모르게 아주 오래된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마도 내가 다섯 살쯤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중한 병 치료를 위해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고 떠날 때 차창 너머로 보이는 엄마의 수심어린 얼굴을 쳐다보며 함께 가겠다고 떼를 쓰고 몹시 울었던 기억이다.
이 세상에 아픔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심야, 모두가 취침에 들어간 뒤 나는 홀로 살며시 밖으로 빠져 나왔다.
교문으로 나가 학교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연못가에 앉았다.
도회지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시골에서 자라면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아주 낯선 황소개구리 울음소리에 이끌린 것이다.
땅바닥을 울려 나오는 듯한, 낮고 굵은 베이스 소리가 여기 저기서 울렸다.
한 두 마리가 우는가 하고 가만히 귀기울이면 이내 여러 마리가 합창을 하곤 했다. 얕

은 곳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깊은 곳에서도 울렸다. 매끄러운 소리를 내는 놈도 있지만 바이브레이션이 심한 녀석도 있다.

잠시 잠잠하여 이제 그만 울겠지 하고 있으면 또 이어진다.

그들은 분명 울고 있었다. 먼 이국 땅에서 흘러 들어왔다는 그들에게 남모르는 깊은 아픔이 있는 게다.

어찌 그들에게 향수병이 없겠는가. 또 이주해 온 이곳 사람들의 편견과 질시와 구박은 얼마나 심한가.

그리고 이곳 이웃들과의 의사소통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화적 차이로 인한 고통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무겁고도 깊은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사는 황소개구리들도 학생들처럼 그 밤에 그 많은 아픔들을 토해내고 나누며 함께 우느라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도 날마다 이렇게 하면서 낯선 땅에서의 고달픈 삶을 극복해 가고 있는 것이리라.

피곤할텐데도 학생들은 일찍 일어나 재잘거리고 웃으며 새로운 아침을 맞았다. 학생들의 얼굴이 어제보다 훨씬 더 밝아 보였다. 그들을 보는 나의 마음도 아침햇살만큼이나 상큼해진 기분이었다.

그 아침에 나는 밤이 가면 아침이 오듯 그 날도 학생들과 나의 마음에 아픔은 가고 기쁨만이 오기를 기원했다.

물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로 살아가리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 감성을 위한 ━━ >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인의 보석 - 손상희   (0) 2012.12.29
충청도 장모 vs 서울 사위  (0) 2012.12.28
어떤 궁금증 - 임병식  (0) 2012.12.26
합창 - 강연홍   (0) 2012.12.24
우리 집 크리스마스이브 - 김현자  (0) 2012.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