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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의 '맑은 가난' - 엄상익 변호사

Joyfule 2023. 3. 15. 05:03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회사원의 '맑은 가난'



아버지는 박봉에 시달리는 말단 회사원이었다. 소년 시절 아버지의 일터를 더러 찾아갔었다. 신문사 공무국은 온통 납투성이였다. 기술자들이 천정까지 쌓여 있는 납 상자 앞에서 원고를 보면서 활자를 골라냈다. 아버지는 그 구석에서 사진기자가 보낸 필름을 얇은 납판위에 인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유리판을 손에 들고 독한 화학약품을 붓는 모습을 봤었다. 아버지는 허기와 노동의 땟국을 퇴근길에 소주 한병과 순대국으로 풀었다. 동네에서는 아버지가 번듯한 신문사에 다니는 걸로 부러워 했지만 속 사정은 달랐다. 봉지쌀을 사다먹고 하도 닦아서 반들거리는 양철 소반 위에 담긴 어머니의 김치국이 음식에 관한 나의 추억이다. 

나는 세상에 한이 서린 어머니의 아바타였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가 최고가 되길 바라고 성공하길 갈망했다. 어머니는 남이 무식하다고 조롱하면 내 새끼를 키워서 너희같이 잘난 척 하는 놈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소리쳤었다. 그런 어머니의 기대에 나는 질식할 것 같았다. 어머니의 기대 때문에 가게 된 속칭 명문학교에서 내가 느낀 것은 변두리적 자의식이고 상대적 박탈감이었다. 

절대적 빈곤의 시대에 명문이라는 창을 통해 왕같이 사는 사람을 엿보게 된 것이다. 부자 친구의 생일에 일급호텔의 양식당으로 초대를 받았다. 나는 당황했다. 삼각의 유리잔에 담긴 애피타이저를 알 리가 없었다. 처음 보는 수세식 변기를 보고 난감했다. 물을 뺄 방법도 몰랐다. 넓은 잔디밭에 지하 홈바까지 마련된 재벌의 저택을 보고 그런 집도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벌친구의 엄마가 아버지에 대해 물었다. 그 엄마는 말단인 아버지의 지위를 사장에게 말해서 올려줄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나는 열등감속에 깊이 잠겼고 속이 뒤틀렸다. 모두 배가 고픈 절대적빈곤의 시대였지만 나는 일찍부터 배고픔보다 더한 배아픈 질투의 감정을 느꼈다. 

나는 아버지 같이 되기 싫었다. 개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같이 공부하던 재벌집 아이의 밑에서 평생 부하 노릇을 하기 싫었다. 노력이나 능력보다 태어난 배경이 더 결정적인 세상이 못마땅했다. 그 시대가 다들 힘든 세상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봤다. 나중에 남들이 좋은 세상이라고 하는 시절을 지났지만 나는 더 우울하고 어두운 그늘을 목격하기도 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원서를 써서 아버지 앞에 내놓았다. 법대를 가서 고시 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아련한 눈으로 나를 쳐다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서울 법대를 나오고도 고시 낭인이 되어 평생을 낙오자로 보내는 사람이 많단다. 서울 법대에 갈 성적부터 안 되는 네가 고시에 합격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아버지는 나의 실패와 좌절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남과 비교하면서 너무 애쓰고 살 필요가 있을까? 우리 회사의 사장이 겉으로는 화려하고 돈도 많을지 모르지만 골치 아픈 일이 많은 걸로 안다. 나는 회사의 말단사원이지만 일이 끝나면 나름대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한다. 마당 한 구석에 나팔꽃과 수세미를 심고 즐기지 않니? 작은 방에 새장을 들여놓고 잉꼬나 카나리아, 문조를 키우지 않니? 휴일이면 산에도 가고 낚시도 간다. 우리회사 사장이 말단직원인 나보다도 더 그런 여유를 즐길까? 나는 그렇지 않을 걸로 생각한다. 어떠니? 너도 야망 때문에 힘들게 살지말고 아버지 같이 회사에 취직해서 소시민으로 행복하게 사는 게 어떨까?”​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는 너무 애쓰지 말고 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그 깊은 위로와 사랑을 몰랐었다. 그저 실패한 자의 자기변명으로만 여겼다. 나는 아버지와 반대 방향으로 나갔다. 젊은 날 나는 내 인생의 순간순간을 위만 보면서 열등감으로 시달렸다. 나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사랑하는 데 쏟지 못하고 엉뚱한 데 소모했다. 나는 나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살았다. 아버지는 회사 내에서도 승진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냥 자기를 살면서 정년퇴직했다. 퇴직을 한 다음날 아버지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평생을 회사를 다니다가 이렇게 집에 있으니까 이상하다. 내가 만두 만드는 재주는 있는데 길거리에 나가서 만두 장사를 하면 어떻겠니?”​

그게 아버지의 성격이었다.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사소한 일상 속에서 주어진 것을 누리며 마음을 따뜻하게 가꾸는 분이었다. 손이 많이 가고 상하기 쉬운 길거리 만두 장사는 힘들 것 같았다. 아버지는 변두리 신혼부부가 많이 사는 연립주택단지에 새를 파는 가게를 냈다. 허가를 받아 그 구석에 담배를 팔 수 있는 박스를 설치했다.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내가 더러 보급소에 가서 담배를 받아왔다. 아버지는 가난도 노년의 외로움도 병도 죽음도 모두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인생 칠십 고개에 오른 나는 지금에야 아버지의 그런 ‘맑은 가난’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