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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의 '神曲'(La Divina Commedia)

Joyfule 2009. 7. 15. 08:38
     
    2.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의 '神曲'(La Divina Commedia)        
    작가 약전 
    단테는 1265년 5월 30일 르네상스의 요람이며 
    중세 유럽 문학의 중심지였던 플로렌스 시의 가난한 귀족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단테는 일찍 생모를 잃고 계모의 손에서 양육되었으나 18세 때에는 아버지마저 별세하였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은 
    9세 때 천사와 같이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테를 알게 된 일이었다. 
    그에 대한 순결한 사랑은 평생 동안 그의 영혼에서 사라지지 않고 
    시정을 움직여 세계적인 명작 "신생"과 "신곡"을 쓰게 하였다. 
    그는 1290년에 그 소녀가 죽자 한때 방종한 생활에 빠졌으나 
    그 소녀가 천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믿게 되어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자신도 그만큼 고결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학문에 열중하였다. 
    26세 때에는 플로렌스 시의 명문 출신인 겜마 도나티와 결혼하여 
    1302년(37세) 그 시에서 추방당할 때까지 함께 살면서 네 자녀를 두었다. 
    그는 시인이면서도 학문에 대한 연구를 지속했고 애국적 열의도 높아 
    정치에도 참여했으며 전쟁에 나가기도 했었다. 
    그는 격렬한 당파 싸움에 휩쓸려 1302년 4월에 반역 등의 죄명으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리고 귀국하거나 체포되는 경우에는 화형에 처한다는 가혹한 선고를 받았다. 
    이렇게 되어 단테의 고독한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단테는 항상 고국에 돌아갈 날을 꿈꾸고 있었으며 
    1301년 플로렌스 정부가 모든 정책을 완화하여 
    벌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그에게 귀국을 허가하였으나 
    단테는 자기의 무죄를 명확히 하지 않는 한 귀국할 수 없다고 거절하여 
    정부는 그에게 다시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리하여 단테는 유럽의 망명 시인의 시조가 되었다. 
    아니 정치적인 망명에 관례적인 위엄을 부여하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볼로냐 파류아 라벤나의 프란체스코 사원 안에 있는데 
    그 비문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플로렌스 땅은 무정한 어머니같이 그를 낳았을 뿐 
    단테는 어머니인 조국으로부터 쫓겨 나서 이곳에 잠들다" 
    단테가 죽고 여러 해가 지난 후에 플로렌스 정부는 
    국보와 같은 위대한 인물에게 가혹했음을 후회하고 그의 작품을 
    모든 사원과 일반인들에게 강독케 하고 연구 주해라는 명령을 내렸다. 
    맨 먼저 나타난 "신곡"의 주해자는 단테를 이탈리아 민족의 독특한 광휘라고 평가하고 
    단테와 더불어 현재 이탈리아 어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였다. 
    교황 레오 11세 때의 단테의 유골을 플로렌스로 옮기려 하였으나 
    시민들의 반대로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단테가 죽은지 600여 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세계의 존경과 애정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 이탈리아의 시골에서는 
    가난한 농부들이 단테의 시를 애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