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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전란의 참화를 딛고 일어서다

Joyfule 2020. 6. 10. 08:16

4.전란의 참화를 딛고 일어서다

 

경제문제를 논할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이 박정희 시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여 우리나라가 산업화, 근대화가 시작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 박정희 시절 산업화, 근대화의 싹은 그 전 시대인 이승만, 장면 정부 시절에 이미 그 씨앗이 심어져 있었기에 가능했다. 건국 지도자 이승만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너무 부족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 1950년대의 우리 경제, 산업현황 등을 조명하는 특집을 연재한다. 이 글은 ‘전경련 40년사’ 도입부에 수록된 것으로서 전경련 40년사 편찬위원회의 청탁을 받아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이 취재, 집필한 것이다.

 

월간조선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4)

 

●4.전란의 참화를 딛고 일어서다●

 

6ㆍ25의 파괴와 혼란, 산업화 시동

 

3년여 밀고 밀리는 전쟁이 휩쓸고 간 상처는 너무도 처참했다. 수백만의 인명 피해는 그 무엇보다 가혹한 것이었다. 파괴의 대열에서 산업 시설은 예외가 될 수 없었다. 3년간의 전쟁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피해는 사회간접자본과 공업 시설의 60%, 주택의 16.9%가 파괴돼 총 피해액은 30억 달러 정도로 추산됐다. 이것은 19449~50 회계연도의 경상 GNP의 두 배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섬유공업의 67%, 인쇄업 75%, 기계공업 32%, 식품공업 30%, 화학 24%, 금속공업 26%가 폭격을 맞거나 부서져 가동 불능 상태가 됐다. 6․25 이전에 남한 유일의 경제적 규모를 갖춘 산업 분야로 가동됐던 면방직 분야는 전쟁 1년만에 방직기의 67%인 22만추, 직기는 47%인 5300대가 완전 파괴되어 고철 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전쟁은 신생 정부의 경제 안정에 대한 노력을 물거품 으로 만들었고, 또 빈약한 산업 기반마저 붕괴시켰다. 산업의 심장이었던 경인공업지대가 인천상륙작전과 수도권 탈환 공방전의 전장(戰場)이 되어 쑥대밭이 되었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산업 시설이 크게 파괴됐다.

 

덕분에 전란의 참화를 면한 영남 지역 기업가들이 전시경제를 등에 업고 성장 가도를 달렸다. 6․25로 인해 전통적 갑부로 행세하던 호남 지주 계급이 몰락하고 영남세가 등장하면서 자유당, 공화당을 거쳐 영남 권력 전성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전쟁의 포성이 멎고 부산 임시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는 전후 복구의 망치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경성방직은 6․25로 인해 30여 년 이루어 놓았던 모든 결과물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영등포의 방직공장을 비롯해 시흥의 염색공장, 쌍림동의 피복공장 등이 모조리 불타고 폭격을 맞아 폐허로 변한 것이다.

 

전쟁 전에는 일부 노동자와 엔지니어들이 좌익계 노동 단체인 전평의 영향으로 파업과 태업에 앞장서는 등 질서가 잡히질 않았다. 그러나 전쟁을 겪으면서 직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절실히 깨달은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경방’의 깃발 아래 모여들어 전후 복구작업에 참여했다.

 

그들은 잿더미에 묻혔던 기계를 파헤쳐 끌어내고 파괴된 기계를 분해하여 쓸 만한 기계로 다시 조립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밤이면 전기가 없어 횃불을 켜 놓고 작업을 진행했다. 종업원들에게 줄 임금도 없었지만 그들은 무보수를 자원하여 폭격 맞은 다른 공장의 잿더미에서 뒹구는 철판과 부품을 주워다 철공소를 만들고 기계를 조립했다.

 

이러한 자력 복구작업에 감동한 미국 보도진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고 그 현황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에 보도하여 세계에 알렸다. 고된 복구작업 끝에 1953년 4월11일에 공장 시동식을 가졌는데, 전 임직원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50년대 초반 한국의 사회ㆍ경제상은 이렇듯 비참한 것이었다. 일본이 남기고 간 공장은 그나마 6ㆍ25로 대부분 파괴되어 폐허로 변한 상황에서 국가 지도부와 정부 관료, 기업가들은 우리 경제를 산업화 쪽으로 방향을 잡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그 단서는 1950년 3월과 1951년 3월 동경서 열린 두 차례의 한일 무역회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회의에는 우리측에서 한통숙(韓通淑) 상공부 차관을 단장으로 하여 송인상(宋仁相) 재무부 이재국장, 박충훈(朴忠勳) 상공부 무역국장, 김용진(金龍震) 기획처 물동국장, 김진형(金鎭炯) 한국은행 동경 주재원 등이 참석했다. 당시 우리 나 대표단은 동경에 가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인상은 일본이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제반 분야의 기술은 물론, 자금을 만드는 시스템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패전국이지만 태도가 당당했다. 그것은 일본이 가진 산업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본은 패전으로 인해 경제 순환 체제가 붕괴되었을 때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유일한 동력원인 석탄 증산에 모든 경제적 역량을 총투입했다. 일본은 수입이 허용된 중유의 전량과 석탄을 철강 부문에 중점 투입하고, 증산된 철강을 다른 자재와 더불어 석탄 분야에 집중 투입했다.

 

여기서 증산된 석탄을 다시 철강산업에 투입하는 등 양 부문간의 투자 교류를 정책적으로 확대시켜 경제 전체를 부흥시킨다는 구상을 수립했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경사(傾斜)생산 방식’이었다. 그 시절 일본의 곳곳엔 ‘일본의 산업 부흥은 석탄으로부터’ 라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내걸려 있었다.

 

이런 모습에 감명을 받은 우리 대표단은 귀국 직후 일본에서 보고들은 내용을 토대로 경제정책, 산업정책에 대한 청사진을 머리 속에 그렸고, 이런 내용을 토대로 상부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당시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 내용에 대해 송인상씨는 시사잡지 ‘월간조선(月刊朝鮮)’과의 인터뷰(2000년 11월)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한일 무역 대표단은 동경에서 돌아와 돌아와서 장관께 동경에서 보고들은 내용을 토대로 이런 설명을 드렸습니다. ‘지금 우리 정부는 토지개혁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그 좁은 토지를 들여다보면서 한국 경제 부흥을 꾀한다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 우리도 일본처럼 빨리 산업화를 해야 한다. 경제 개발을 서두르기 위해서는 국가 전반을 리드할 수 있는 경제계획 같은 것을 만들어 통일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유지로 장관께 보고를 드린 기억이 나는군요.”

 

당시 정부 관료들도 대부분 송인상씨와 비슷하게 산업화, 공업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욕을 가지고 추진했던 경제 안정 15원칙은 집행 3개월만에 6․25를 만나 중단된 상황이었다. 전시 인플레로 물가가 치솟고, 피난민은 들끓는 가운데 전쟁의 양상은 중부전선을 중심으로 교착상태에 빠졌다.

 

우리 정부 관료들이 산업화, 공업화에 대한 의지를 가다듬게 된 계기는 ‘네이산 보고서’ 때문이었다. 1950년 12월 유엔총회는 한국 경제 부흥을 위해 유엔한국재건단(UNKRA:United Nationans Korea Reconstruction Agency)을 결성하고 1951년 7월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UNKRA는 전쟁 중 긴급한 구호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우선적으로 착수해야 할 공업시설 건설사업으로 판유리ㆍ연탄공장ㆍ시멘트공장ㆍ비료공장ㆍ전력시설 등을 내정하고 그 기초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1952년 전란이 한창이던 와중에 UNKRA는 전후(戰後) 한국 경제의 재건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로버트 네이산씨에게 연구용역을 맡겼다. 그 결과 제출된 것이 그 유명한 ‘네이산 보고서’였다.

 

보고서 내용은 한국이 우선 농업에 집중 투자하여 농업부문의 생산성을 높이고, 증산된 쌀을 해외에 수출해서 얻은 외화로 긴급물자를 조달하는 방식으로 공업화의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농업 근대화를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줄거리였다. 구체적인 계획은 1953~54년 미국 회계연도를 제1차연도로 하여 1959년까지 5년간 1억2000만 달러를 투자, 매년 국민총생산을 5000만 달러씩 증가시켜 목표연도인 1959년 국민총생산액을 25억1000만 달러로 높이자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이 보고서가 제출되자 많은 논란이 제기됐다. 우리 나라의 정부 관리들은 네이산 보고서 내용에 적극 반대하는 한편, 한국민의 높은 교육수준과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하여 공업화로 산업발전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이산 보고서와 관련된 논란에 대해 송인상씨는 자서전 ‘부흥과 성장’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네이산 보고서는 여러 각도에서 논란이 되었지만 나는 반봉건적인 동양식의 영세농업구조와 관련, 농업 중심의 투자계획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는 뜻을 여러 차례 전달했다. 그러나 네이산씨는 자본의 축적정도나 기술수준, 경영능력에 비추어 볼 때 한국경제의 공업화를 지금 시작하는 것은 부적당하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 네이산 보고서는 결국 채택되지 못한 채 사문화(死文化)되고 말았다. 역사를 거꾸로 읽어갈 수는 없지만 당시 네이산 보고서가 그대로 정책으로 채택되어 우리가 농업국가로 되었다면 오늘의 우리 경제가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을지 흥미로운 일이다.>

 

송인상 효성 고문은 자서전에서 네이산 보고서와 관련, ‘나는 그 때 농업에 의해 한국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구상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곤 했다’고 기록해 놓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상공부 전기국장, 광업국장, 공업국장을 비롯해 부흥부차관, 부흥부장관을 지내며 중요한 산업정책을 입안, 집행했던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그 시절 대부분의 정부 관료들은 우리 나라가 산업화로 나가야 한다는 점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것은 국가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의 확고한 원칙이기도 했다.

 

우리 돈으로 철강공장을 지어라

 

정부가 겨우 안정을 찾은 것은 1955년 무렵. 이때부터 사회 각 분야 사람들이 산업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정부 관리나 국회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전, 피난수도 부산에서는 한국 산업사의 진행에 있어 중대한 의미를 갖는 두 가지 작업이 검토 진행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전후 복구사업에 긴급한 철강공장 건설이요, 다른 하나는 수입대체산업의 상징이랄 수 있는 제일제당 부산공장 건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현대 산업문명에 대한 이해와 깊은 통찰력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가 산업문명의 핵심이 철강공업에 있으며, 철강이 산업의 쌀이라는 사실은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과정에서 깨달은 화두(話頭)였다. 6ㆍ25의 휴전 문제가 흘러나오던 1953년 부산 임시정부는 이미 전후복구를 위한 그랜드 디자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철강산업에 대한 의지를 피력한 것은 1953년 4월4일의 일이다. 이날 이대통령은 내각에 다음과 같이 특별지시했다.

 

“전쟁이 끝나면 하루 빨리 부흥사업을 펼쳐야 할 것이니 그 기초가 되는 철강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 특히 주택건설사업을 위한 함석, 철판 등의 공급을 담당할 제강사업 건설계획을 우선적으로 강력히 추진하라.”

 

관계부처는 철강산업에 대한 기본 대책을 검토한 끝에 대통령령으로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현재 인천제철)를 국영기업으로 출범시키고, 파괴된 공장을 복구하는 작업으로 연산 5만t 규모의 평로(平爐:구식 용광로)를 건설하여 제강공장과 압연공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우리 경제는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을 때다. 미국으로부터 오는 무상원조액 4억 달러에 달하는 등 우리 나라의 모든 경제계획은 미국의 경제고문관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정부는 철강공장 건설계획을 수립한 후 미국 원조기관에 철강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이런 소식을 접한 미국 원조당국은 “지금 수백만의 피난민들이 굶주리고 있는데 무슨 철강공장인가. 시급한 민생문제부터 해결하자”며 우리측 요구를 거절했다.

 

보고를 받은 이대통령은 “못이나 양철이라도 만들어야 판잣집이라도 지을 것 아닌가” 하면서 미국이 돈을 못 낸다면 우리 정부가 보유한 자체보유불로 공장을 지으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극심한 달러 부족으로 장관이 외국 방문을 할 때면 손수 달러를 세어 주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외환사정이 지극히 어려운 전시(戰時)에 철강공장 건설을 위해 140만 달러를 투자키로 결정한 것은 역사적 결단이었다.

 

이대통령은 전쟁 부상자 치료를 위해 부산에 와 있던 서독 적십자병원장 후버 박사에게 한국의 철강공장 건설에 서독이 기술지원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이대통령이 서독과 교섭에 나선 이유는 미국이 우리 나라 철강공장 건설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 무렵 서독은 2차대전 패전 후 마샬 플랜에 의해 전후복구가 한창이었다. 때문에 서독 기업들도 해외 공사를 수주하여 달러를 벌어들이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을 받은 후버 박사는 한국의 철강공장 건설계획을 서독 정부에 알렸고, 서독 정부는 일본에서 활동하며 유엔군에 물자를 공급하던 유태인 중개상 아이젠버그를 교섭 상대로 내세워 적극적인 수주 활동을 벌였다.

 

1954년 실시된 대한중공업공사의 5만t 규모 평로 제강공사 국제입찰에는 미국, 스위스, 서독의 전문회사가 참여하여 경합을 벌였다. 그 결과 서독 최대의 제철시설 제조회사인 데마그사(社)가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이어 1956년 2단계로 실시한 380만 달러 짜리 압연공장 건설사업도 데마그사에게 돌아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강공장 건설공사가 진행되는 인천의 대한중공업공사 현장을 수시로 방문하여 건설작업을 독려했다. 마침내 1956년 하반기에 인천중공업의 평로 제강공장 건설이 완공되어 첫 출강식(出鋼式)이 거행됐다. 이것이 우리 나라 철강산업 발전의 결정적 전기가 된 것이다. 평로 제강공장에 이어 압연공장 건설이 완료되면서 본격적인 생산이 개시된 것은 1959년의 일이다.

 

정부는 철강공업육성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연산 20만t 규모의 제철소 건설안을 마련하여 미국 국제원조처(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에 건설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동해안에 건설하려 했던 이 제철공장은 코크스를 쓰는 용광로 제철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무연탄을 활용하는 전기제철공장 건설안이었다. 문제는 이 공장의 가동을 위해서는 전력공급을 위한 발전소 하나를 새로 지어야 하는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1958년 들어 대한중공업공사의 압연공장 건설공사가 진전되자 김일환 상공부장관이 서독을 방문하여 데마그사와 연산 20만t 규모의 제철소 건설문제를 협의하고 서독, 미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노르웨이 등이 힘을 합쳐 국제차관단을 조직하는 문제를 협의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가 6ㆍ25 직후에 외국 차관 한푼 안 들이고 순수한 우리 자본으로 제강공장을 건설한 것은 2차대전 종전 후 후진국에서 벌어진 최초의 중공업 프로젝트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강력한 반대를 물리치고 자체보유불로 철강공장 건설이라는 결단을 내릴 정도로 국가 근대화에 대한 깊은 안목과 식견을 가졌던 지도자였다. 철강공장 건설과정에서 수많은 한국의 기술자와 관리자들이 서독에 가서 현대식 철강산업을 배우고 돌아와 우리 나라 철강산업의 기초를 닦았다. 이 때 양성된 인력들이 박정희 정권 시절 포항제철 건설에 대거 참여하여 오늘의 ‘포철 신화’를 이룬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산업계 관련 인사들은 “이승만 대통령이야말로 우리 나라 중공업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라고 평한다.

 

전시(戰時)무역에서 제조업으로 전환

 

위기는 곧 기회의 다른 말이다. 포탄은 철통같은 방위선을 뚫지 못해도 상인들의 이재(理財)는 그것을 뚫고 들어가 물자를 교역한다. 물자가 교역되는 곳에서 경제가 싹트고 산업이 개화한다.

 

전쟁은 기존의 체제와 질서를 허물고 새 질서를 창조하는 기회가 되었다. 졸지에 인민군의 남침으로 산업의 터전을 잃은 기업가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와 해외 무역을 통해 물자를 조달하면서 새로운 사업의 기초를 닦아가기 시작했다. 전쟁상황이던 당시 우리 나라의 주력 수출품은 고철과 탄피였다. 전장(戰場)에서 수집된 고철과 탄피는 일본이나 홍콩으로 수출되어 귀중한 달러 수입원 역할을 했다.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에 의하면 당시 중간 규모의 무역회사였던 삼성물산의 경우 1951년 한해 동안 3억원을 출자하여 무역을 한 결과 1년 후에는 출자금이 출자금의 20배인 60억원으로 늘어났다. 그 대부분이 고철과 탄피를 수출하고 생필품과 의약품을 수입해서 얻은 수익이다.

 

전시(戰時)의 무역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훗날 재벌의 반열에 올랐던 당대의 기업가들, 즉 삼성의 이병철, 럭키의 구인회, 두산의 박두병, 한일합섬의 김한수, 동양화학의 이정림, 쌍용의 김성곤 회장 등은 피난수도 부산에서 무역업을 통해 거부(巨富)를 축적한 사람들이다.(1)

 

당시 임시수도 부산은 6․25 전쟁물자가 부려지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각종 산업시설, 특히 대한민국 산업의 심장이라 불리던 경인공업지대가 파괴되면서 산업 활동이 거의 마비됐다. 전란으로 고통받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생활필수품과 의약품, 식량과 사치품이었다.(2)

 

이러한 무역을 통해 거부를 축적한 기업가들 중 선각자들의 생각은 다른 곳으로 발전해 가기 시작했다. 즉 단순히 무역으로 이윤을 축적하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 생필품 공장을 지어 값싸고 질 좋은 소비재를 직접 생산해 공급하자. 그리하여 국민들의 의식(衣食) 문제를 해결함은 물론, 전란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경제부흥에 일조하자는 착상을 하게 된다.

 

그것은 곧 축적된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이행되는 길이기도 했다. 그 상징적인 변모를 보여준 것이 이병철 회장의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이었다. 제일제당은 그간 수입에 의존하던 기호품을 국내에 공장을 지어 수입대체화함으로써 상업자본의 산업화라는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제당공장 건설 아이디어는 한국무역협회를 이끌던 전용순씨로부터 나온 것이다. 전용순씨는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으로부터 설탕공장이 수지맞는 산업이란 정보를 입수했다.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대만을 점령했는데, 대만에서 공급되는 사탕수수를 원료로 설탕을 만드는 제당공장을 지은 기업가가 큰 재미를 봤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다.

 

마침 전용순씨는 야당 인사를 두둔했다 하여 집권층의 눈밖에 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정치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 부산에서 숨어 지내던 무렵, 이병철씨에게 제당공장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귀가 번쩍 뜨인 청년 사업가 이병철이 무역에서 번 돈을 집중 투자하여 제일제당 공장을 부산에 건설한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제당공장 건설에 착수한 1953년은 아직도 6․25 전란의 포성이 멎지 않은 때였다. 참모들은 전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불투명한 전시 상황에서 가장 안전하고 수지맞는 사업은 외국에서 소비재를 수입 해다 국내에 파는 무역업이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상식을 뛰어넘는 아이디어로 제당공장 건설에 나섰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모험이었고, 값비싼 투자였다.

 

당시 설탕은 100% 외국에서 수입되고 있었다. 만약 국내에 설탕공장을 지어 생산하면 수입품보다 월등히 싼 가격으로 대량 공급할 수 있다. 이런 확신이 이병철 회장을 제당공장 건설이라는 외길로 내몬 것이다.(3)

 

제일제당이 본격 가동되면서 이병철 회장은 돈벼락을 맞게 된다. 아침에 설탕 한 트럭을 싣고 나가면 오후에 한 트럭을 돈을 싣고 올 정도로 제당업은 수지 맞는 장사였다.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에서 “제당 설립 불과 2년만에 나는 거부(巨富)의 칭호를 받았다”고 말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1953년 우리 나라 설탕 수입량은 2만3800t이었다. 수입가격은 t당 35달러선. 그때까지 수입의존도 100%였던 설탕은 제일제당의 가동으로 인해 수입의존도는 1954년에 51%, 1955년 27%, 1956년에 7%로 급격히 떨어졌다. 제일제당의 성공이 자극제가 되어 동양, 삼양, 대한 등 7개 제당업체가 난립하는 양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병철 회장이 다음으로 도전장을 던진 분야는 의복 분야였다. 국민에게 질 좋은 양복지를 값싸게 공급하여 의(衣)생활을 해결하고, 수입에 의존하던 양복지를 국산화함으로써 외화를 절약한다는 사업구상이었다. 제일모직 건설과정은 우리 나라 기업사 뿐만 아니라 산업사에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기업(企業)이란 업(業)을 기획하는 것” “경영(經營)에서 경(經)이란 밧줄이나 끈으로 줄을 쳐놓는다는 뜻. 영(營)이란 줄쳐 놓은 둘레를 두루 쌓는다는 뜻”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경영이란 새로 집을 짓거나 길을 닦을 때 미리 해 놓는 측량계획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 시절 우리 나라 재계(財界)의 사업 규모가 일천하여 주먹구구식의 전근대적 경영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제일모직의 건설 가정에서 이병철 회장은 근대화 된 선진 경영의 진수를 우리 사회에 보여주게 된다.

 

이병철 회장은 오랜 검토 끝에 양복지를 생산할 주(主) 기계는 독일제로, 보조 기계는 영국ㆍ이탈리아ㆍ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최고 성능을 자랑하는 제품을 선별 도입했다. 그리고 모직공장 건설에 필요한 온도와 습도 등 기상조건에서부터 전력ㆍ노동력ㆍ교통ㆍ용수ㆍ수질은 물론, 종업원에 대한 기술지도와 훈련에 이르기까지 48개 항목을 상세히 메모하여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우리 나라 기업 경영에 ‘기획 및 계획’ 개념이라는 최신 경영기법을 처음 도입 시행한 최초의 사례였다.

 

제일모직도 제일제당처럼 대단한 성공을 거두면서 전후(戰後)의 산업 질서는 상업자본의 산업자본화에 누가 빨리 선착하느냐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이병철 회장의 성공에 자극 받은 기업가들은 앞을 다투어 대한모직, 한국모방, 경남모직 등의 모직회사를 청업했고, 다른 기업가들은 전시(戰時) 무역으로 축적한 상업자본을 투자하여 락희화학, 한국유리, 대한양회, 동양제당, 삼양제당과 같은 근대적인 산업시설 건설에 도전했다.

 

이처럼 전후에 ‘상업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시류의 흐름을 탄 기업들은 훗날 한국에서 대기업군 형성의 기폭제로 작용하게 되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은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었고 대한모직은 신일그룹, 경남모직은 한일합섬 그룹으로 발전해 나갔다. 락희ㆍ개풍ㆍ삼호ㆍ삼양사ㆍ대한전선ㆍ금성방직ㆍ동양제당ㆍ대한제분 등 초창기 대기업그룹군은 모두 이 시기 흐름에 편승하여 성장의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반면 시대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상업자본에만 계속 매달려 현실안주를 택한 기업가는 경쟁의 대열에서 낙오해 갔다. 이러한 트랜드의 변화가 벌어진 현장은 피난수도 부산이었고, 대부분의 제조업이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에 밀집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산업화의 첫 토대는 부산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어 거부(巨富)의 대열에 들어선 사람은 삼호그룹의 정재호 회장이었다. 대구에서 양말공장을 운영하던 정재호 회장이 삼호방직을 창업한 것은 1950년. 양말업에서 방직업으로 전환한 삼호방직은 전란의 여파로 다른 지역에 위치하던 방직시설이 대부분 파괴됐으나 공장 시설이 대구지역에 위치한 관계로 파괴를 면해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삼호방직 운영으로 부를 축적한 정재호 회장은 조선방직을 인수하고 대전방직을 복구하여 짧은 기간 내에 한국 제일의 방직왕 대열에 올랐다.

 

뒤를 이은 기업가는 개풍의 이정림 회장. 개성상인 출신인 이정림 회장은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56년 문경시멘트공장을 인수하여 대한양회를 설립했다. 대한산업의 설경동 회장도 당대에 주목받던 기업가다. 그는 부산에서 중석을 수출하고 밀가루와 비료를 수입하여 부를 축적했고, 이어 방직업, 대한전선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포목상으로 출발한 구인회 회장도 부산에서 플라스틱, 치약, 비누, 전자공업에 손을 대 크게 성공했다. 이양구 회장은 설탕과 밀가루 도매업을 하다가 동양제과, 동양시멘트의 길로 진출했다.

 

이 시기에 성공한 기업가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이 무역업이나 도매업을 통해 축적한 상업자본을 산업 자본화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다. 또 일제시대 호남 지주들이 대부분이었던 재계의 주도권이 영남지역 재력가에게 넘어가는 모습이 발견된다. 전국 대부분의 지역이 6․25 때 공산군에게 점령돼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파괴되고 재산이 상실됐으나, 영남지역은 그나마 파괴를 면했기 때문이다.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