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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6)

Joyfule 2020. 6. 10. 08:19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6)

 

경제문제를 논할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이 박정희 시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여 우리나라가 산업화, 근대화가 시작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 박정희 시절 산업화, 근대화의 싹은 그 전 시대인 이승만, 장면 정부 시절에 이미 그 씨앗이 심어져 있었기에 가능했다. 건국 지도자 이승만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너무 부족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 1950년대의 우리 경제, 산업현황 등을 조명하는 특집을 연재한다.

 

월간조선

6.전후복구사업의 시동

 

IMF와 IBRD 가입

 

1953년 휴전과 더불어 모든 노력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의 복구와 경제재건, 전쟁이 가져온 인플레 수습에 집중되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 해 12월 한미 정부 사이에 ‘경제재건과 재정안정계획에 관한 합동경제위원 협약’이 조인됐다. 이 협약에 의해 우리 나라는 재정금융의 균형, 단일환율 책정, 자유기업원칙, 대충자금 운영원칙 등 기본적인 경제 재건의 기본 방향이 설정됐다.

 

1950~51년 미국 원조는 1억 달러 수준이었으나 원조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1953년부터는 연간 2억 달러 수준으로 늘었다. 미국 원조의 판매대전으로 조성된 대충자금이 정부의 투융자(投融資)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54년 41.4%, 1957년에는 68.4%이 이르렀다. 이러한 원조를 통해 우리 국가 지도부는 국가의 근본이 되는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1954년 2월에는 미국 원조자금을 정부 예산으로 하여 부흥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대충자금특별회계법’과 ‘경제부흥특별회계법’이 제정됐고, 1954년 5월에는 UNKRA와 ‘한국경제원조계획에 관한 협약’이 조인됐다.

 

7월에는 미국으로부터의 군사, 경제원조 확보와 원조물자 도입에 대한 절차상 문제가 해결됐다. 이듬해인 1955년 5월에 한미 잉여농산물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원조도입액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으로 전후복구를 통한 경제부흥의 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전후복구사업이 시작될 무렵 우리 나라의 기본산업은 보잘 것 없는 형편이었다. 건국 당시 석탄 생산량이 17만5000t, 전기는 북한에서 보내는 것까지 합쳐 12만kW, 시멘트는 4만t에 불과했다. 그나마 산업시설들이 3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큰 피해를 당해 당장 국가의 기본 살림마저 위협을 받는 실정이었다.

 

전력은 북한에서의 송전이 끊겼고, 발전소마저 전란의 와중에 파괴되면서 마산의 발전함에서 얻는 전력 2만kW가 우리 나라 발전량의 전부였다. 시멘트는 삼척시멘트공장이 전쟁으로 피해를 입어 전체 생산량은 고작 2만5000t이 전부였다.

 

더욱 큰 문제는 각 분야의 전문가와 엔지니어였다. 6․25 직후 한국 사회의 모든 통계를 들여다봐도 우리 나라는 전형적인 농업국가였다. 농업인구의 공업인구화는 하루아침에 실현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만난 고초를 무릅써가며 전후복구의 시동을 걸었다.(1)

 

이처럼 숨가쁜 산업시설 건설과 경제의 흐름 중에서도 우리 나라가 국제경제의 흐름에 편입되는 중요한 계기는 1955년 8월26일 국제통화기금(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International Bank of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에의 가입이었다.(2) 이것은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우리 나라가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국제기구 가입을 통해 우리 나라는 전재(戰災)로부터 부흥 발전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동시에, 대외무역 및 외환 거래에서 갖추어야 할 국제적 신의(信義)를 물적으로 뒷받침하는 계기가 됐다.(3)

 

당시 우리 나라는 이 기관에 가입하면서 1875만 달러의 기금과 2500만 달러의 은행 주식을 구입하게 됐는데, 이 기금은 6․25 때 김일환 대령이 진해를 거쳐 미국 뉴욕의 연방준비은행에 긴급 피난시켜 두었던 금괴로 대체했다.

 

IMF와 IBRD는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탄생된 것이다. 인류는 2차대전으로 심각한 파괴와 무질서, 전란의 폐허를 참혹하게 경험했다. 이러한 파괴와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나 번영의 길로 나가자는 차원에서 1945년 12월, 서방 각국 지도자들이 모여 ‘브레튼 우드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의 결실이 IMF와 IBRD다.

 

IMF는 2차대전 후 혼란 상태에 빠진 국제 통화 및 금융 질서를 안정시켜 교역과 금융거래를 원활히 하기 위해 미 달러화를 세계의 기축통화로 하고, 달러의 금 태환(兌換)을 보장하며 환율을 고정시켰다. 또 IBRD는 국제자본의 이동을 쉽게 하여 전후 경제부흥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금융기관이다. 이 두 기관이 국제통화와 금융질서 회복과 안정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국제무역의 확대와 편의 증대를 위해 1948년 1월에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을 발표시켰다. GATT는 국제무역질서가 자유무역주의를 기초로 할 것을 규정했다. 이러한 국제경제상의 새로운 흐름을 GATT-IMF 체제라 하는데, 이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자유무역에 입각한 국제경제질서를 창출하는 기본 축이 된 것이다. 우리 나라가 ‘경제의 유엔'이라 불리는 IMF와 IBRD에 가입한 것은 우리 경제가 자유무역에 입각한 국제경제 질서에 편입됐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공장을 짓자

 

1954년부터 본격 착수했던 전후복구사업은 4년이란 짧은 기간에 마무리됐다. 이처럼 짧은 기간이 전란의 상처를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 관료와 기업가들, 그리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어선 국민들 덕분이었다.

 

그러나 1957년까지만 해도 우리 정부와 미국 원조당국은 경제운영에 있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해 곳곳에서 마찰을 빚었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 제공하는 원조자금의 사용방법을 놓고 한미 양국간에 큰 의견 차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원조자금의 집행에 있어 한국측 의견이 반영되기를 요구했고, 미국측은 자기들의 의도된 목표를 위해 원조자금이 사용되기를 원했다. 이러한 견해차로 인해 미국의 원조 프로그램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측의 입장은 원조자금이 당장 시급한 민생 분야의 소비재 수입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제(日帝)는 한반도 운영정책을 수립함에 있어 남한을 농업기지화하고 북한에 산업시설을 건설해 놓았다. 남한의 농업에 있어 사활이 걸린 전략물자인 비료공장은 북한 지역인 흥남에 세계적 규모의 질소비료공장을 지어 놓았다.

 

이 상황에서 일제가 물러가고 분단으로 인해 비료공장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남한의 주력산업이었던 농업은 비료가 공급되지 않아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다. 명색이 농업국가인 한국에서 비료가 단 1g도 생산되지 않으니 전량을 외국에서 수입해 오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상황에 몰린 것이다.

 

당시 유엔한국재건단(UNKRA)이 한국 정부에 제출한 건의서에 의하면 1953년부터 57년까지 국내 화학비료 소요량은 40만t. 이것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데는 2억8800만 달러로, 연간 6000만 달러의 외화가 화학비료 도입에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원조규모가 연간 2억 달러 선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전체 원조의 20~30%를 비료 구입비로 날려야 할 판이었다. 결국 국내 비료공장 건설이 무엇보다 시급한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측 입장은 우리와 달랐다. 그들은 원조의 목적이 한국에 산업시설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기아와 질병의 해결’이었다. 한국에서 필요한 비료는 “대한(對韓) 원조자금으로 한국에 필요한 비료 완제품을 공급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비료란 한 번 사용하면 없어지는 소비재다. 그 귀한 원조자금을 한번 사용하면 사라지는 소비재를 도입한다면 그것은 낭비나 다름없다는 것이 우리 국가지도부의 의견이었다. 때문에 우리 정부는 미국측 의견을 고분고분 따르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기회가 날 때마다 내각의 각료들에게 “산업화만이 우리의 살 길”이란 점을 국무회의에서 누차 강조하면서 이렇게 지시했다.

 

“미국이 제공하는 원조자금으로 공장을 지어 우리가 생산시설을 갖추어야 진정한 자주 독립국이 되는 것이다. 공장을 건설하고 기술자를 양성해서 필요한 물자를 생산해야만 우리 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 언제까지 우리가 미국이 실어다 주는 비료에 의존하고 살아야 하는가. 당장은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원조자금으로 공장을 지어야 한다. 내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측과 상의하여 반드시 비료공장을 지어라.”(4)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정부와 미국 원조처는 매년 원조자금 사용 배분 문제를 놓고 큰 견해차를 보였다. 미국은 대한(對韓) 원조자금이 교육을 비롯해 서비스 부문, 철도와 교통․통신, 발전과 같은 사회간접자본(SOC)을 보강하는 데 사용돼야 하며, 비료나 시멘트와 같은 물자는 국제 입찰을 통해 한국에 지원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반면에 우리 정부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우리에게 전화(戰禍)를 복구하라고 원조를 준 이상, 우리가 필요로 하는 곳에 우선적으로 써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다시 말하면 원조자금으로 외국에서 물건 사다가 먹고 쓰고 치울 것이 아니라, 당장은 배가 고프더라도 원조자금으로 비료나 시멘트 등 전략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을 지어 산업화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 뜻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양측 주장이 오랫동안 평행선을 이루어 타협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5)

 

다음은 1956년 5월 재무부장관에 취임한 인태식(印泰植)씨가 ‘재계회고’에서 밝힌 내용이다.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경무대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재무부장관이나 다른 장관들이 미국측에 대해 대충자금(원조물자 판매대금) 사용방향을 바꿔 달라고 여러 수십 차례 교섭을 해왔지만 이렇다할 아무런 성과가 없었네. 자네는 이론도 밝고 말도 잘하니 미국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보네, 나로서는 경제건설을 해야 할 우리 나라 입장에서 이 대충자금은 공장을 세우는 데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이 서 있으니 이런 나의 뜻을 깊이 명심하고 미국 사람들을 이해시키도록 힘쓰게. 어서 바삐 서두르게.”

 

이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나는 즉시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미국측과 맞부딪쳤다.

“대통령의 뜻도 그렇고 하니 경제건설 쪽으로 이제 대충자금을 돌려 쓸 수 있게 합시다.”

“죄송하지만 원칙을 바꿀 수 없습니다.”

 

미국측 대답은 냉담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방력 강화란 후방경제의 건설과 이에 따르는 경제적 뒷받침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대충자금의 일부를 경제건설에 전용하자는 나의 주장은 예상했던 대로 미국측의 달갑지 않은 반응에 부딪치고야 말았다.

 

6ㆍ25 동란 이후 줄곧 미국측에 요청하고 있던 포항의 정유공장 건설과 충주비료공장 건설 제의는 미국측에 대한 간절한 요망사항이었으나 그때마다 미국측으로부터 수락할 수 없다는 반응에 부딪쳐 온 숙제였고, 내가 처음으로 제의한 시도는 아니었다.

 

충주비료공장 건설에 대해서는 끈질긴 우리 나라 정부측의 요청으로 어느 정도 미국측의 양해를 얻는 단계에까지 이르는 듯 했으나 미국측의 이것마저 시일을 지연시키면서 매듭을 짓기엔 인색한 편이었다. 접촉을 해보고 또다시 교섭을 하는 등 틈만 나면 미국측에 대해 경제외교를 펴 왔으나 미국측의 반응은 여전히 차디찬 반대의사 뿐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미국의 외교정책이란 무엇인가 하고. 미국이 전정 우리 나라의 자주독립성을 지향하도록 원조해주고 있다면 비료공장 하나 건설하자는 데 이처럼 인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나의 머리를 스쳐갔기 때문이다. 대미(對美)교섭의 결과가 별무성과라는 보고를 이대통령에게 했다.

 

“그래 미국 사람들의 태도가 여전하단 말이지. 비료공장 하나를 건설하자는 데 그렇게 인색하단 말이지. 우리 나라를 해방해 준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옹졸하다니…. 몹쓸 사람들 같으니. 우리 나라를 36년간 제압하고 갖은 학대를 일삼아 왔고,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려 했던 전쟁 범죄국 일본에 대해서는 공장 건설이다 뭐다 하며 후하게 원조해 주면서 약소국가인 우리 나라에 대해서는 이렇게 공장 건설 한두 개의 문제를 놓고 인색하니 저 미국 본토에 도사리고 앉아 대외정책을 손질하는 지위가 높은 미국 사람들 중엔 옳지 못한 친구가 있는 것 같아. 공산당과 맞붙어 싸우고 있는 우리 나라를 도외시하고 일본만 원조해 주는 그 사람들은 반드시 후일에 후회하게 될 거야.”>

 

국가 기간산업체 건설

 

당시 정부로서는 비료공장 건설이 숙원사업이었지만 미국측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이승만 대통령은 기발한 착상을 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콜터 장군이 이끄는 유엔한국부흥위원회(UNKRA)의 원조 계획을 활용하여 인천에 판유리공장과 문경에 시멘트공장을 짓도록 교섭한 것이다.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부서진 건물을 세우고 집을 짓는 것이 시급했다. 그러나 건설을 위한 시멘트와 판유리 건설 자재가 없었다. 기초적인 건축자재는 태부족이었고 판유리는 생산이 전무(全無)한 상황이었다.

 

운크라는 판유리가 전후 복구사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설기초자재이며, 원료나 제반 조건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우선 사업으로 정했다. 운크라는 운크라 자금으로 인천에 판유리 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파나마의 빈넬사를 선정하여 1956년 2월 판유리 생산능력 연간 12만 상자에 달하는 공장 착공식을 가졌다. 공사비는 363만 달러와 대충자금으로 지급되는 한화 6억 251만 환이었다.

 

이 공장은 준공에 앞서 민간에 불하하기 위해 입찰을 실시한 결과 최태섭(崔泰涉)씨가 주축이 된 대한유리공업기성회에 낙찰됐다. 공장을 인수한 후 대한유리공업, 한국유리로 상호를 바꾸면서 국내에 판유리를 공급하여 전후복구를 도왔다.

 

사정이 다급하기는 시멘트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남한 내에는 하루 230t 생산 능력의 삼척시멘트 공장 하나만이 외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나마 수시로 고장이 나고 전기 공급이 잘 안되어 가동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았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삼척시멘트공장은 1942년 일본의 오노다사가 퀼른 1기에 연산 18만t 규모로 세운 것이다. 일본이 물러간 후 기계고장, 원료난, 전기부족 등으로 생산량이 급감했다. 게다가 6․25를 맞아 막대한 피해를 입고 한동안 가동 중단상태에 빠졌다가 1953년 운크라 원조자금으로 시설보수공사를 벌여 하루 230t 규모로 재가동하게 된 것이다.

 

1955년 국내 시멘트 소비는 18만 90000t인데 비해 국내 생산은 5만 6000t에 불과해 70%를 수입에 의존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운크라와 협의 하에 판유리에 이어 두 번째 프로젝트로 문경에 시멘트 공장이 건설된 것이다. 건설업체로는 덴마크의 스미스사가 선정됐고 1955년 11월에 퀼른 2기에 연산 24만t 규모, 850만 달러의 자금을 들여 공사가 착공됐다.

 

문경시멘트공장 역시 1957년 9월 준공에 앞서 이정림(李庭林)씨의 대한양회에 불하되었다. 이 공장은 1975년 1월 쌍용그룹에 흡수 합병되어 오늘날은 쌍용양회 문경공장으로 문패를 바꿔 달았다. 운크라 자금을 동원한 문경시멘트공장과 인천 판유리공장 건설은 원조자금으로 소비재 수입에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론에 매달려 있던 미국 정부를 향한 일종의 시위였다.

 

우리 정부가 UNKRA를 이용해 산업시설을 건설하자 미국도 따라오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1955년 전체 원조금액의 25% 이내에서 산업건설을 지원한다는 원칙 아래 마침내 AID(미 국제협조처)의 원조자금으로 비료공장을 설립키로 한미간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생산할 비료의 종류는 요소비료로 하고, 공장 규모는 연산 8만5000t으로 한다는 데까지는 쉽게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미국측은 건설업자 선정, 계약내용 등에 대해서는 무조건 미국 입장을 따라올 것을 요구했다. 비료공장의 연료문제도 우리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석탄으로 할 것을 주장했으나 미국측은 석유를 사용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우리 정부는 “그렇다면 정유공장도 함께 세워 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국측은 “차라리 외국에서 유류를 수입 해다 쓰는 것이 더 유리하다”며 거절했다.

 

공장 위치는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하여 충주가 최적지로 결정됐다. 미국은 공장 건설업체로 미국의 하이드로 카본회사와 매그로사를 선정, 1955년 5월13일 연간 8만5000t 규모의 대규모 비료공장인 충주비료공장 건설계약을 체결했다. 미국측의 결정에 따라 턴키 베이스로 시공하되 공사비는 추후 정산하는 방식이 채택됐다. 착공식은 1955년 9월에 거행됐다.(6)

 

투자재원은 주한미국경제협력처(USOM)의 협조로 국제협력처(FOA) 원조계획에 따라 국제개발처(AID) 차관 3333만8000달러가 지원되었고, 국내 자본은 2억7500만원이 조달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초 1950만 달러였던 공시비가 1958년에 가서는 3000만 달러 이상으로 오르는 바람에 미국측 원조 증액 없이는 준공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8년 9월 송인상 부흥부장관이 김태동 부흥부 조정국장, 이한빈 재무부 예산국장을 대동하고 미국 방문 길에 올라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충주비료공장 건설이 진행되는 와중에 국내에서는 관련 기술자 68명을 선발, 미국 비료공장에 유학을 보내 기술을 익혀 오도록 했다. 최초 계획에 의하면 공장은 1958년 4월에 준공될 예정이었으나 미국측과의 투자재원 마련, 그리고 국내 기술진 미비 등의 이유로 1959년 시운전에 착수했고,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인 1961년 4월에 준공되어 연간 8만5000t의 비료를 생산했다.

 

충주비료공장(제1비) 건설은 우리 나라 비료공업의 시초로서 국내 최초의 현대식 화학장치공장 건설이었다. 이 공장을 시작으로 정부는 1958년 국내 자본으로 호남비료공장(제2비)을 건설했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사업의 일환으로 울산에 영남화학(제3비), 진해화학(제4비)을 건설하게 된다.

 

충주비료공장은 국내 화학비료 자급자족의 길을 연 동시에 훗날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사업의 핵심인 석유화학공업 건설의 중대한 선도산업 역할을 했다.(7) 그것은 곧 우리 나 중화학공업 발전의 초석을 다지는 대규모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그토록 원조자금을 이용해 산업시설을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원조자금 사용실적을 보면 1954~61년 말까지 원조 자금 도입액 중 전체의 74.7%가 원자재 도입에 사용됐고, 공업화를 위한 시설재 도입은 23.6%에 그쳤다.

 

전원(電源)개발사업

 

전후 복구사업은 1957년 무렵까지 양국간의 의견 차로 인한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져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충주비료공장 건설과 함께 급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차츰 관계자들 사이에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 하에 서로간의 견해차를 좁히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미국으로부터 도입 물자의 수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또 우리 정부가 UN군에게 대여했던 대여금 상환이 이루어져 식량을 비롯한 중요 물자의 수급상태가 개선되기 시작했다.

 

또 한 가지 전후복구사업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은 전원(電源)개발사업을 통한 기의 원활한 공급이었다. 전기는 현대 산업사회의 원동력이나 마찬가지다. 해방 후 북한에서 전기를 얻어 쓰던 우리 나라 입장에서 1948년 5ㆍ14 단전이라는 수모를 당했다.

 

그 결과 5만kW에 달하던 남한의 발전량은 기타 발전시설의 가동으로 6ㆍ25 직전에는 8만kW까지 늘었으나 6ㆍ25 전쟁 과정에서 국내의 발전시설과 변전소 등은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됐다. 서울변전소는 전쟁기간 중 시설의 60%를 파괴당했다. 그 결과 남한 내 수력발전시설의 56%, 화력발전시설의 52%가 피해를 입어 발전량은 1만1000kW로 급격히 떨어졌다.

 

6ㆍ25 당시 정부의 가장 큰 관심은 화천 수력발전소였다. 일제시대인 1944년 5월, 한강수력발전주식회사가 건설한 화천 발전소는 남한 입장에서 볼 때 최대의 발전량을 자랑하는 수력발전소였다. 6ㆍ25 전만 해도 38선 이북이었으나 전쟁의 와중인 1950년 10월 유엔군이 이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우리 소유가 됐다.

 

화천 발전소를 얻은 우리 정부는 전란 중에 피해를 입은 시설 복구에 착수하여 1950년 11월8일, 제1호기 시운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11월11일 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바람에 복구했던 모든 시설은 폭파되고 말았다.

 

그 후 화천 발전소는 국군과 공산군의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결국 1951년 4월, 국군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우리 소유로 넘어오게 됐다. 정부는 화천 발전소 복구에 전력을 기울여 1954년 10월9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제2호기 준공식이 거행됐다.

 

종전 후 정부의 가장 큰 숙제는 발전소 복구였다. 공장을 아무리 복구해도 전기가 공급되자 않으면 일손을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영월화력발전소를 4만kW의 발전량을 목표로 건설사업에 착수했다. 미 원조당국의 협조를 얻어 이 공사가 완공된 후에는 1만kW의 당인리 화력발전소 가동에 돌입했다.

 

이처럼 전후 활기차게 진행된 전력복구사업에는 많은 엔지니어가 요구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모자라는 전력 분야 엔지니어의 확충을 위해 손원일 국방장관에게 특명을 내렸다. 명문대 출신의 육해공군 기술장교 중 45명을 선발하여 제대시킨 후 미국에 9개월간 발전교육을 보낸 것이다. 졸지에 대통령 특명으로 제대한 기술장교 출신들은 미국으로 건너가 발전과 송전, 배전, 발전소 운영방법 등을 배워 와서 우리 나라 전력산업의 소중한 일꾼이 되었다.

 

만난 고초를 겪으면서도 전후복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이처럼 전후복구가 빠른 기간 내에 진행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정부의 경제정책 수립에 참여했던 내각의 국무위원들과 경제관료들의 숨은 노고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신현확(申鉉碻) 부흥부차관과 송정범(宋正範) 기획국장이 주도하는 기획위원회의 활동이 주효했고, 이한빈(李漢彬) 예산국장과 김정렴(金正濂) 이재국장이 이끄는 재정위원회의 재정안정정책이 통화량 증가를 억제하는데 성공한 것이 크게 도움이 됐다.

 

그 결과 1957년에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기만 하던 물가가 -0.27%로 하락했으며, 1958년에는 처음으로 얼마 되지는 않지만 경제가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이것이 전후의 극심했던 인플레를 수습하고 안정기로 들어서게 된 계기다.

 

그러나 우리의 전후복구와 일본의 전후복구는 그 속도나 질과 양 측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일본은 비록 전쟁에는 패했지만 동남아와 중국을 침략하고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벌일 정도로 막강한 공업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 한국전이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아 전후복구는 물론, 경이적인 부흥과 발전이 가능했다.

 

반면 우리 나는 자본은 말할 것도 없고, 변변한 기술이나 산업적 여건, 기업가나 경영자도 없는 상태에서 한국전이라는 엄청난 재앙을 당해 모든 것을 파괴당했다. 때문에 일본과 같이 빠른 시간 내에 경제 부흥이 어려웠던 것이다.

 

땔감문제 해결과 산업기반 조성

 

1950년대 상황에서 우리 나라에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식량과 땔감의 확보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모자라는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1955년 5월, 미국과 한미(韓美) 잉여농산물 협정을 체결했다. 당시 한국은 6ㆍ25 전란의 여파로 농업기반과 생산구조가 거의 파괴되었고, 농업인력도 상당히 감소된 상황이었다. 또 북한으로부터 유입된 피난민으로 인해 식량 사정이 절박한 상황이었다.

 

사정이 이쯤 되니 춘궁기엔 보릿고개라 하여 농민의 대다수가 초근목피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8)

 

1957년 국내 식량수요는 2894만석. 이에 비해 국내 공급은 2254만석이 고작이었다. 모자라는 640만석은 해외에서 수입하거나 그것도 안되면 굶어야 하는 판국이었다. 당시 우리 국민 1인당 하루 영양섭취량은 2000kcal. 오늘날의 2832kcal에 비하면 70% 수준으로 간신히 활동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척박한 땅에 낮은 농업 생산성은 이 땅의 인구를 먹여 살리는데 역부족이었다. 1957년까지 우리 나라의 식량 자급률은 78%에 불과했다.

 

정부는 위기에 처한 식량문제를 해소하고 전후 경제 복구에 활로를 뚫기 위해 미국과 한미 잉여농산물 원조 협정을 맺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PL-480이다. 1956년부터 본격 도입된 미국의 잉여농산물은 첫해에 23만8000t이 도입됐다. 이것은 국내 전체 양곡 생산량의 15%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이었다.

 

미국 잉여농산물은 1967년까지 총 5억7000만 달러 어치가 우리 나라에 유입됐다. 이 중 밀이 41.3%로 가장 많고, 원면이 39.4%, 보리 8.6%, 쌀 4.7%, 옥수수 0.9%, 수수가 0.6%를 차지했다.

 

이러한 잉여농산물 도입은 한편으론 신흥재벌 그룹을 잉태하는 젖줄 역할을 했다. 이른바 제분․제당․방직 등 3백(三百)산업이 번성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3백산업은 미국의 잉여농산물에 섞여 들어오는 원조물자를 독점하여 오늘의 재벌그룹의 외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 대표 격이 앞서 소개한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창업한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다. 뒤를 이어 김성곤 회장의 금성방직, 김용주 회장의 전방(全紡)과 신한제분 등이 거부(巨富)의 대열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잉여농산물은 우리 나라의 식량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지만 값싼 농산물이 무차별적으로 도입됨으로써 저곡가가 형성되어 국내 농가가 큰 피해를 당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잉여농산물 판매대금은 미국측이 15%를 떼어가고, 나머지는 대부분 우리 나 국방비로 사용됐다.

 

우선 급한 대로 식량문제는 미국 원조로 해결이 가능했으나 땔감 문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겨울이면 온 국민이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해다 때는 형편이었으니 산에 나무가 남아나질 않았다. 보다 못한 이승만 대통령은 석탄 생산 장려와 전란으로 황폐화 된 탄광을 복구하기 위해 대한석탄공사에 군부대를 파견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육군 파견단이 탄광 현장에 투입된 것은 1954년 12월27일. 육군 파견단장은 김일환 육군 중장(후에 상공부장관 역임)이었다. 육군 파견단은 1957년 8월8일 철수할 때까지 2년 9개월간 각 탄광의 전후 복구 사업과 석탄증산을 도왔다. 우선 광부들에게 군 작업복 1만8000여 벌, 광목 200마, 모포 7000매, 겨울 내의 8000벌을 무상 지급했다. 또 갱목과 자재 운송을 위해 군 트럭 50대를 투입했다.

 

각 탄광촌에 군 공병대가 투입돼 광원용 사택을 보수하여 입주시켰고, 원주 1군사령부의 지원을 받아 광업소 주변에 학교 신축, 교실 증축, 문맹자 퇴치를 위한 직원교육을 실시했다. 또 정부미 2만5000석을 확보하여 식량 배급을 실시했고 소금과 담배 등 기호품까지 공급했다.

 

육군 파견단은 군 트럭 100대를 동원하여 석탄 수송을 돕는 한편, 공병대를 투입하여 태백 탄전지대에서 수도권으로 향하는 수송로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또 6ㆍ25로 중단됐던 영암선 철도공사에 군 공병대를 투입했다. 경북 영주와 강원도 철암을 잇는 영암선 철도공사는 1949년 착공된 이래 6ㆍ25 전쟁으로 공사가 전면 중단됐다가 휴전 이후 재개됐으나 자재와 자금 부족으로 지지부진한 상황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 현장에 군 공병대가 투입되면서 공사가 빠르게 진척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지대한 관심 속에 1955년 12월30일 영암선 철도가 개통됐다.

 

그 결과 태백 탄전지역에서 생산된 석탄이 영암선-중앙선을 통해 수도권까지 철도 수송이 가능해져 땔감 문제 해결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영암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태백 탄전지대에서 생산된 석탄은 묵호나 심척까지 기차로 운송한 다음 선박에 실어 해로를 통해 동해-남해-서해를 거쳐 인천항까지 운반됐다. 여기서 다시 트럭에 실려 수도권까지 운반해야 했다. 이처럼 험난한 여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석탄 가격보다 운송비가 훨씬 더 비싸지는 모순이 발생하게 됐다.

 

영암선 개통은 철도를 이용한 석탄의 수도권 직송(直送)이라는 수송혁명을 가져왔고, 국민연료를 장작에서 석탄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고비가 됐다. 1955년 무연탄 생산량은 130만t에 불과했으나 영암선 개통 후인 1957년에는 244만t, 1959년에는 413만t, 1960년에는 535만t으로 급격히 늘었다. 그 결과 광공업 생산은 1957~60년 사이 연평균 12.3%의 고속 성장을 했으며, 전력은 1954~56년 사이에 15.4%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한편으로는 국가 기간산업 수행을 위한 공장들이 속속 건설되기 시작했다. 1953년 6월 대한중공업을 선두로 1954년 7월에 동국제강, 1955년 3월 한국유리공업, 1955년 충주비료공장, 문경시멘트공장이 잇달아 착공됐다. 본격적인 전후복구와 산업 근대화의 첫 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우리 나라는 1956년 2월 ‘원자력의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한미간 협력 협정’을 맺었고, 1957년 8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하여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적 협력의 발판을 다졌다. 1958년 3월에 원자력법을 제정 공포하고 같은 해 12월에 원자력원의 직제를 대통령령으로 공포하는 등 원자력 연구개발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9)

 

국민소득 60 달러에 불과한 나라에서 미래의 에너지였던 원자력산업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긴 것은 당시 국가 지도자의 놀라운 통찰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어려웠던 시절에 노망이 들었다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력산업의 기초를 닦았다. 또 원자력을 이용해 전력 문제를 해결한다는 차원에서 1958년 20명의 유학생을 선발해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당시 유학을 다녀온 이동영(李東寧) 박사, 이관(李寬) 박사, 김호철(金湖鐵) 박사 등이 우리 나라 원자력 산업의 기초를 닦는 역할을 하게 된다. 원자력 연구생의 해외 파견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달러화를 유학생들의 손에 쥐어 주기도 했다.

 

이런 노력들이 계기가 되어 1971년 국내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1호기 기공식을 가진 이래 우리 나라는 원전(原電)이 국내 총 발전량의 40% 이상을 담당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뿐만 아니라 북한 신포지구에 한국 표준형 원자로를 건설해 주는 경수로 건설사업 단계까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이다. 우리가 북한에게 전기를 얻어 쓰다가 1948년 5ㆍ14 단전이란 치욕을 당한지 50년만에 그 처지가 역전되는 계기는 그 어렵고 힘들던 이승만 시절에 그 기초가 닦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 철학

 

여기서 우리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경제원칙과 철학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1950년대의 한국경제를 살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이승만의 경제에 대한 리더십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통설은 이승만이 정치나 외교 분야에서는 달인(達人)이었지만 경제에는 별다른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에 몸담았던 인사들은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 것”이라며 “그의 경제적 비전은 경제학자들의 원칙론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10)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최고급 교육을 받은 엘리트다. 그는 미국이 경제 강국으로 부상한 기본이 무엇인지를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장점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우리 땅에 정착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는 고도의 정치적 고찰을 통해 대일(對日), 대미(對美) 외교정책의 일환으로 경제 문제를 풀어 갔다. 그는 미국 대통령이나 미국 정부를 상대로 우리의 국가 의지를 관철시키는 높은 수준의 정치 경제적 안목을 가진 리더였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우리 정부는 늘 외화 부족 상태였다. 수출의 경우 1954년 2400만 달러, 1955년에는 1700만 달러에 불과했다. 반면 수입은 1954년 2억4300만 달러, 1955년 3억4100만 달러로 수입이 수출의 10배 이상 급증세를 보였다. 또 수출품이라고 해봐야 중석(텅스텐), 흑연 등 약간의 광산물과 김, 오징어 등 수산물이 거의 전부였다. 제조업의 경우 수출은커녕 국내소비조차 충당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반면 수입해 와야 할 산업재와 생필품은 늘어만 갔다. 비료 한 품목을 수입하는 데만 매년 4000만~6000만 달러가 필요했다. 정부는 외화가 부족해 해외 공관 수선이나 현지 주재 외교관들의 봉급을 보낼 때마다 큰 어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고민 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해외 공관에 근무하는 외교관과 주재 무관(武官)들은 부인을 동반할 수 없도록 하라”는 지침을 내려 이것이 정부 방침이 되었다. 이런 방침 때문에 현지에 부임하는 외교관들은 본의 아니게 홀아비 신세를 면치 못했다.

 

또 재무장관 재량으로 교환해 줄 수 있는 달러의 한도가 100 달러에 불과했다. 단 돈 몇십 달러라도 지출할 때는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외환사용 신청 공문은 반드시 직접 결재했는데, 신청서에 ‘가만(可晩)’이란 대통령 결재를 받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달러를 대단히 아꼈고, 또 저환율 정책을 고수했다. 원래 미군이 한국에 진주할 때의 환율은 1달러 당 15원이었는데 1952년 말에는 600원으로 치솟았다. 하는 수 없이 1953년 2월11일에 유엔군 대여금 상환 촉진과 환율 유지를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100분의 1로 절하(切下)했다. 그래도 환율이 계속 올라 1950년대 후반에는 고정환율은 500원인데, 시중환율은 900원~1100원대를 넘나들 정도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화가 절하되면 우리 국력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생각하여 환율을 절대 올리지 않겠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농민에게 배급하는 유안 비료 1포대가 환율 500원대에서는 1860원인데, 환율이 1000원대가 되면 값이 곱절로 뛴다. 이렇게 되면 농민에게 피해가 가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하여 500대 1의 환율정책을 엄격히 지키도록 명령한 것이다.

 

그 시절엔 환율 변경이 너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정부는 1955년 11월17일에 미국과 맺은 협정에 의해 1955년 9월중 물가를 기준 100으로 하는 서울 도매물가지수가 6개월 간 125%를 넘거나 떨어지면, 변화된 비율만큼 환율을 개정하기로 했다. 때문에 정부는 물가 125% 이하, 환율 500원대 유지에 모든 정책 수단을 집중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철학은 시장경제 원칙을 따르되, 실물(實物)경제에서는 물가 안정과 500원대 환율 고수에 집중한 것이다.

 

그는 철저한 시장경제의 신봉자였고, 자유 민주주의 원칙을 뿌리내리는 데 앞장 선 건국의 지도자였다. 그의 경제에 대한 진면목은 1953년 2월15에 단행된 화폐개혁 과정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송인상 효성 고문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정부가 화폐개혁을 단행한 것은 유엔 대여금 상환을 미국측에 촉구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목적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6ㆍ25 발발 직후 유엔은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한 한국이 공산군의 기습 공격을 받자 즉각 전투부대의 한국 파견을 결정했다. 이에 미군을 선발대로 한 유엔군이 한국전에 참전하면서 전쟁 수행을 위해 당장 한국의 원화가 필요했다. 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유엔군에 원화를 공급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그런데 공산군의 기습 남침으로 워낙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체결된 협약이라 대여금 상환방식이나 기한, 대여한도, 이자 등에 관한 중요 사항이 협정서에 명시되지 않았다. 때문에 정부로서는 어떻게 하든 유엔군에게 빌려준 돈을 받아 내야 하는 절박한 심정을 배경에 깔고 통화 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화폐개혁 과정에서 정부의 실무 담당자들은 자본주의 원칙에는 위배되지만 국가 산업발전을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찾아냈다. 즉 일정 한도 이내의 액수는 100대 1의 비율로 새 화폐로 교환해 주되, 일정 한도를 초과하는 자금에 한해서는 2~3년 간 정부에 거치 시켜 산업자금으로 전환하고, 2~3년 후 원금에 이자를 얹어 상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전국에서 화폐 교환이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서울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李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 시점에서 왜 통화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대해서는 내가 이해를 하겠소. 그런데 일정 금액을 초과하는 돈에 대해 2~3년 간 산업자금으로 전용한다는 것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겠소. 국민이 피땀 흘려 애써 번 돈을 정부라 해서 권력을 가지고 강제로 2년 혹은 3년 동안 동결시켜 못쓰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조치라고 봅니다. 원래 자본주의의 가장 좋은 점은 사유재산을 엄격히 보호해 주는 것이 기본입니다. 정부라 해서 국민의 재산 사용을 마음대로 제한한다면 누가 정부의 말을 믿고 따르겠소.”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산업자금을 2~3년 간 동결한다는 조항이 백지화되다시피 한 상태에서 관련법규가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산업화에 대한 의지, 그리고 경제철학은 1공화국 당시 부흥부장관을 지냈던 송인상씨의 ‘부흥과 성장’이란 회고록 곳곳에 잘 나타나 있다. 그 중 몇 대목을 소개한다.

 

<이대통령은 항상 “미국 원조자금은 한국 국민의 피의 대가인데 이것을 가지고 일본산(産) 완제품을 들여와 소비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라며 기회 있을 때마다 “더 많은 원조자금을 공장 건설에 투자하라”고 말하곤 했다. 한미 양측이 가장 날카롭게 대립한 것의 하나는 매년 할당된 원조자금을 판매재와 시설재로 나눌 때의 비율 문제였다.>

 

<이대통령은 전화(戰禍)로 인해 폐허가 된 경제를 하루속히 재건시켜야 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업화를 서둘러야 하고, 따라서 원조자금은 이 목적에 사용해야 한다는 확고부동한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은 달랐다.

 

원조자금으로 유엔군의 작전에 필요한 원화자금을 조달키 위한 대충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한국이 공업화로 나가면 대충자금을 새로이 적립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기계 설비를 도입하는 경우 외화는 물론 국내에 이미 적립되어 있는 대충자금까지 써야 하므로 이중으로 대충자금 적립률이 낮아진다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한사코 그들은 비료공장과 시멘트공장을 세우고자 하는 한국 정부의 의도에 반대하면서 원조 자금을 유효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력과 교통을 포함한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해야 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투자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미합동경제위원회가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대통령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통령께서는 대한민국의 수반으로서 합동경제위원회가 권고하거나 승인한 안건의 집행에 대해 행정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지도자로서 솔직 담백하면서도 확고한 신념과 위엄을 가지고 한국 경제가 요구하는 검약생활을 솔선 수범했다>

 

<미국무성의 초청을 받아 출발에 앞서 이대통령을 예방하자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원래 한국인은 남에게 돈 달라는 이야기를 못해. 속담에 ‘우는 아이 젖 준다’고 그러지 않나. 우리의 어려운 사정과 억울한 이야기를 미국 조야(朝野)에 널리 알리게. 미국이 제 나라에서 치러야 했을 전쟁을 우리 땅에서 했으니 우리로서는 할 말이 있지 않나. 원조를 좀더 많이 달라고 해 봐. 그리고‘「조그마한 일에까지 너무 간섭하지 말아 달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게. 그렇지만 사람이 너무 잘게 굴면 위신이 서지 않아. 하물며 나라 일을 맡아 하는 사람에게는 나라의 위신이라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되네. 정정당당히 조리 있게 이야기해 봐.”

 

이야기가 끝나자 李대통령은 외교하는데 보태 쓰라고 흰 봉투 하나를 주었다. 1000달러가 들어 있었다. 100달러 사용도 주저하는 이대통령으로서는 큰돈이었다.>

 

<세간에는 흔히들 자유당 내각은 부패와 비능률의 표본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다. 내가 1957년 국무위원이 되어 첫 국무회의에 출석했을 때보고 느낀 바로는 상당히 능률적인 내각이었고, 나라를 위해 몸바쳐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이 솔직한 첫 인상이었다.

 

열두 사람밖에 안 되는 국무위원은 어떤 안건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토의를 했고, 어느 안이 나라 건설에 유익한가를 모든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연로한 대통령이 국무위원을 쓰는 방식은 전적으로 일을 맡기는 대신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가차없이 책임을 묻는 스타일이어서 국무위원들은 항상 긴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철학은 고도의 정치적 고찰에 바탕을 둔 정치관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한국의 생명선이 다름없었던 대미(對美)․대일(對日)관계는 순수한 경제 이론으로는 통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늘 한국전쟁 특수(特需)로 일본이 엄청난 돈을벌고 있는데 미국 원조자금이 국제입찰에서 최저가라 하여 일본 물자만 들여오는 데 대해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