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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0년대를 바라보는 시각

Joyfule 2020. 6. 1. 22:16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1)

 

경제문제를 논할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이 박정희 시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여 우리나라가 산업화, 근대화가 시작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 박정희 시절 산업화, 근대화의 싹은 그 전 시대인 이승만, 장면 정부 시절에 이미 그 씨앗이 심어져 있었기에 가능했다. 건국 지도자 이승만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너무 부족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 1950년대의 우리 경제, 산업현황 등을 조명하는 특집을 7회에 걸쳐서 연재한다. 이 글은 ‘전경련 40년사’ 도입부에 수록된 것으로서 전경련 40년사 편찬위원회의 청탁을 받아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이 취재, 집필한 것이다.

김용삼

 

●1.1950년대를 바라보는 시각 ●

 

영웅 탄생

 

역사 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고난의 시대에 영웅이 태어난다‘고 말했다.

 

시대는 영웅을 필요로 하고, 영웅은 시대의 날개를 달고 천하를 웅비한다. 과거 정복의 시대에는 승리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명장(名將)이 영웅이었다. 오늘과 같은 경제전쟁의 시대에는 기업가가 영웅이다.

 

그렇다면 기업의 흥망성쇠를 담보하는 기업가는 어떤 사람들인가. 레이건 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업가는 새로운 일자리와 부(富), 그리고 기회를 창조하는 영웅들"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작가 사무엘 스마일즈는 ‘자조론(自助論)‘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완전무결한 사업가는 위대한 시인만큼이나 희귀한 것, 참된 성인과 순교자들보다 더 귀한 존재‘라고 정의했다.

 

세상을 떠난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李秉喆) 회장은 그의 자서전 ‘호암자전(湖巖自傳)’에서 기업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기업가는 기업을 구상하여 그것을 실현시키고 합리적으로 운영하면서, 국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발전적으로 파악하여 하나하나 새로운 기업을 단계적으로 일으켜 갈 때 더없는 창조의 기쁨을 가지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의 흥분과 긴장과 보람, 그리고 가끔 겪는 좌절감은 기업을 해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실하게 그것을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황무지에 공장이 들어서고 수많은 종업원이 활기에 넘쳐 일에 몰두한다. 쏟아져 나오는 제품의 산더미가 화차와 트럭에 만재되어 실려 나간다. 기업가에게는 이러한 창조와 혁신감에 생동하는 광경을 바라볼 때야말로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더없이 소중한 순간인 것이다. 기업가의 이러한 끊임없는 도전과 의욕이, 국가경제 발전에 하나하나 초석이 되고 원동력이 되는 것 아닐까.>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보면 1950년대, 그 고난의 시대에 김연수(金秊洙), 박흥식(朴興植), 이병철(李秉喆), 김용완(金容完), 구인회(具仁會), 설경동(薛卿東), 전택보(全澤珤), 최태섭(崔泰涉), 이정림(李庭林), 정주영(鄭周永), 정재호(鄭載頀), 김성곤(金成坤), 이양구(李洋球), 신덕균(申德均), 김지태(金智泰)씨 등 기업의 선구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들은 해방과 분단, 전쟁과 복구라는 혼란의 소용돌이였던 1950년대의 한국 경제를 이끌어 간 주인공들이었고, 일자리와 부(富), 그리고 번영의 기회를 창조한 영웅들이었다.

 

이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1950년대, 우리들의 초상(肖像)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외국인의 눈에 비쳐진, 대칭되는 두 가지 시각을 통해 50년 전 한국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진보적인 시각으로 한국 현대사를 들여다보고 있는 부르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이라는 자신의 저서 머리글에서 한국의 1950년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953년, 한반도는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남쪽의 부산에서 북쪽의 신의주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은 죽은 자들을 묻고 잃은 것들을 슬퍼하면서, 그들 생애의 남은 것들을 주워 모으느라 여념이 없었다. 수도 서울에서는 콘크리트와 파편이 뒤범벅이 된 길가에, 텅 빈 건물들이 마치 해골처럼 서 있었다. 수도 주변의 미군 병사(兵舍)에는 수많은 거지들이 외국 군인들이 내버리는 찌꺼기를 줍고자 모여들었다….

 

마을들은 텅 비었으며 거대한 댐들은 더 이상 물을 저장할 수 없게 되었다. 동굴과 터널 속의 두더지 같은 생활에서 기어 나온 사람들은 밝은 햇살 속에서 악몽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1950년대 후반까지 한미 경제 협의회의 미국측 경제조정관으로 근무한 바 있는 윌리엄 윈 조정관은 유엔 경제 사회 이사회에 참석, 「한국의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아침 7시를 전후해서 중앙청이 보이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보면 7~8세의 어린이로부터 성년이 된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제복을 입고 손가방을 들고 혹은 메고 가는 학생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씩씩하고 명랑하고 혈색이 좋다. 그들에게는 신생 공화국의 앞날을 책임질 막중한 의무가 주어져 있다. 한국의 교육은 이러한 사명을 충분히 완수할 수 있다고 본다.“>

 

죽은 자들을 묻고 잃은 것들을 슬퍼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새로운 세대를 교육시켰던 시대. 콘크리트와 파편이 뒤범벅이 된 길가에, 텅 빈 건물들이 마치 해골처럼 서 있는 그 황량한 풍경을 딛고 허리띠 졸라맨 채 신생 공화국의 앞날을 책임질 아이들을 학교로 보냈던 시대. 그것이 우리의 1950년대였다.

 

우리는 너무 쉽게 과거를 잊는다. 그 여파로 현대사, 그 중에서도 1950년대는 우리 역사에서 아무 흔적을 남기지 못한 공백기가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이 탄생한 때가 1948년 8월15일.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부가 1960년 4월 시민혁명으로 終焉(종언)을 고할 때까지의 한국 사회와 한국 경제의 흐름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 있게 "이것이 정설이다"라는 시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공백기를 좌익 논리가 침투하여 '그 시대에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는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군사 독재의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한 일부 학자와 언론인들은 현실을 외면한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1950년대를 한국 사회의 제반 모순이 극대화 된 총체적 타락의 시대로 격하시켰다.

 

그러나 이승만(李承晩) 시대의 한복판을 관통하며 국정에 참여한 관료나 그 시대에 기업을 운영했던 기업가들은 한결같이 “역사에서 기적은 없다”고 말한다. 박정희 시대에 국가 근대화와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진 것은 군인들이 현실 정치에 뛰어 들어 죽기 살기로 밀어붙인 결과가 아니라 그 전 시대부터 이미 기적을 가능케 하는 인자(因子)들이 싹트기 시작했고, 국가 근대화에 필요한 경험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가 역사를 대하는 정직한 사고일 것이다.

 

연세대 한국학 연구소의 유영익(柳永益) 석좌교수도 김각중 회장의 시각에 동의한다. 유교수는 “박정희 시대의 고도 성장은 이승만 시절에 이미 그 싹이 트기 시작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혔다.

 

첫째 이승만 대통령은 6․25 직후 노련한 외교로 미국을 상대하여 한미 상호 방위조약 체결과 국군 전력 증강이라는 카드를 받아 냈다. 그 결과 우리는 국방과 안보에 대한 부담을 덜고 경제 개발에 국력을 집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교육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확충해 문맹을 퇴치하고 산업 사회에 필요한 인력을 대량 배출하는 토대를 확실하게 다졌다. 1950년대 후반에는 대학 진학률이 영국을 능가하기 시작할 정도로 고급 인재 육성에 전력을 기울인 공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셋째는 농지개혁이다. 관련 법규가 미비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적 의지와 결단에 의해 농지개혁이 시행됨으로써 우리 나라는 수천 년 고질적으로 이어져 오던 지주-소작인 관계가 근절됐다. 그 결과 국민 모두가 균질화 된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고도 성장기에 계층 간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유 교수를 비롯하여 1950년대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아 온 다수의 학자들은 이승만 시대에 한국 사회의 기초가 되는 중대한 일들이 뿌리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올바른 사고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그 중에서도 이승만 시대의 경제 분야는 뭐하나 제대로 정리된 기록이나 알려진 비화가 없다.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후 상당수 공문서들이 무의식중에, 혹은 고의로 파기되거나 소각, 망실됐기 때문이다. 기록이 없으므로 정밀한 역사 복원은 생존자들의 기억에 의존해야 하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우리 나라 식자층이나 언론, 국민 대부분은 막연히 한국 경제는 그리하여 박정희(朴正熙) 장군이 군사 쿠데타 직후 군사 정권이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하면서부터 국가 근대화가 시작됐다는 논리를 확대 재생산해 왔다. 이것이 별다른 반론이나 저항감 없이 정설로 굳어지는 분위기다.

 

식민지 근대화론 등장

 

이런 와중에 미 하버드 대학의 카터 에커트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것을 내놓았다. 에커트 교수는 ‘제국의 후예:고창 김씨와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기원’이란 저서에서 ‘한국 사회의 실제 변화의 기동력은 일본에서 왔으며,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한국의 자본주의적 변혁과 근대화를 촉진했다’면서 ‘박정희 시대에 한국의 고도 성장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그 기반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국내의 소장파 학자들은 에커트 교수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한국 경제는 일제시대의 결과물이 1950년대를 건너 뛰어 박정희 시대에 와서 만개(滿開)했다는 뜻이 된다면서 “역사에서 단절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에커트 교수는 한국에서 역사 단절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올바른 시각의 정립을 위해서는 과거로 눈을 돌려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신생국가 대한민국이 출범하던 당시의 한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해방 후의 시대사로 눈을 돌리기에 앞서 우리는 당시 대한민국의 모든 구성원이 민주주의나 자유 시장경제에 대한 훈련이나 3권분립에 의한 국가 운영 경험도 없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정부 출범 직후인 1948년 9월 이승만 대통령은 향후 국정 운영에 대한 시정 방침을 발표했다. 이 내용 속에 당시 국가 지도부의 경제와 산업에 대한 철학, 나라 살림 운영의 기본 방침이 발견된다.

 

먼저 이승만은 산업 재건의 기본 방향을 농공(農工)균형의 산업 국가 건설에 두되, 이를 위해 연차 계획으로 ▲식량 증산 ▲생필품 자급자족 ▲동력원 확보 ▲지하자원과 수산 자원 적극 개발 ▲이에 수반하는 중요 공업 육성 ▲교통 통신망의 조속한 복구 등을 도모하여 생산 촉진과 실업자 해소를 동시에 이루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신생 대한민국의 첫 출범을 산업 국가 건설에 두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생 정부가 헤쳐 나가야 할 앞길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당대를 살았던 경험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정황이 그려진다. 우선 국토의 분단으로 신생 대한민국의 주권과 통치권 행사가 38선 이남으로 한정되었다는 점이다. 국토의 분할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양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제 식민주의자들은 한반도에 독자적인 산업의 여력을 갖춘 것이 아니라 식민지 경영의 틀에 맞추어 철저히 일본에 종속적인 구도를 요구했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남쪽에는 미작을 중심으로 한 농업지대와 섬유를 중심으로 한 경공업을, 북쪽에는 발전소와 비료공장 등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 지대를 건설했다. 그들은 한반도에 남농북공(南農北工)의 기형적인 산업 구조를 강제한 것이다.

 

그 결과 해방 직전 전국의 발전설비 용량은 총 172만2695kW로, 남북한 점유 비율을 보면 남한이 11.5%(19만8782kW)인 반면 북한은 88.5%였다. 북한 지역에는 압록강의 수풍 발전소, 부전강 장전강 발전소 등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전력을 이용해 흥남 질소비료 공장 같은 세계적 규모의 산업 시설이 건설되어 있었다. 흥남 질소비료 공장에서 생산된 비료는 경원선과 호남선을 이용해 호남 곡창지대까지 공급됐고, 생산량이 워낙 많아 멀리 만주 일대까지 공급됐다.

 

반면에 남한에는 수천 년 경작을 되풀이해 온 탓에 매년 비료를 주지 않으면 생산이 불가능한 농지와, 북한에서 공급되는 전력을 공급받아 가동하는 소규모 경공업 시설이 위치하고 있을 뿐이었다. 중공업 분포도를 보면 남한 21%, 북한이 79%였다.

 

금속공업 생산의 90%가 북한에서 이루어진 반면, 방직공업 생산의 85%는 남한에 치우쳐 있었다. 또 철광석, 선철 등 금속 기계공업에 필수적인 지하지원은 남한에는 매장량이 거의 없었고, 유연탄․무연탄․ 흑연․중석 등도 북한이 독차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남한에는 해방과 더불어 해외 각지에서 몰려들기 시작한 귀환 동포, 이북에서 핍박을 받아 탈출해 온 월남민 등 주거지와 직장이 없는 300만 이상의 피난민이 제각기 살길을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의 파괴와 폭동, 테러와 살인 위협에 맞서 가며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초로 한 자본주의를 접목시키는 작업을 시작해야 했던 것이다.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