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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국가 근대화의 시동

Joyfule 2020. 6. 10. 08:14

 

3.국가 근대화의 시동

 

경제문제를 논할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이 박정희 시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여 우리나라가 산업화, 근대화가 시작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 박정희 시절 산업화, 근대화의 싹은 그 전 시대인 이승만, 장면 정부 시절에 이미 그 씨앗이 심어져 있었기에 가능했다. 건국 지도자 이승만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너무 부족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 1950년대의 우리 경제, 산업현황 등을 조명하는 특집을 연재한다. 이 글은 ‘전경련 40년사’ 도입부에 수록된 것으로서 전경련 40년사 편찬위원회의 청탁을 받아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이 취재, 집필한 것이다.

 

월간조선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3)

 

●3.국가 근대화의 시동●

 

토지개혁의 여파

 

해방 이후 너도나도 사업의 길에 뛰어들었다. 사업은 천당과 지옥의 문이 동시에 새겨져 있는 동전의 양면이나 다름없다. 운이 좋아 때로는 거부(巨富)를 손에 쥐는가 하면 가정이나 가문 전체를 몰아넣는 패가망신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 쓰라린 패배의 사례는 박흥식 회장의 모습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해방 직후 남한은 전력이 부족해 북한으로부터 5만kW의 전력을 공급받아 왔었다. 그런데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은 미군정에 북한에서 송전한 전력의 요금 지불을 요청했다. 그들은 1947년 5월31일까지 남한에 공급한 전력의 대가로 400만 달러 상당의 기계와 전기용품

 

, 기타 물자를 요구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군정 당국은 그 동안 금지했던 남북 물자 교류를 허용했다. 그 선봉에 선 사람은 일제시대부터 화신무역을 통해 국제 교역 경험이 풍부한 박흥식 회장이었다. 박흥식 회장은 북한의 조선상사와 1년 동안 1000만 달러 어치 물자를 공급한다는 계약에 합의한 후 1948년 11월, 당시 우리 나라가 보유한 최대 규모의 무역선인 2000t급 앵도환(櫻島丸)호를 북한 지역으로 출항시켰다.

 

이 배는 생고무ㆍ구리ㆍ면포ㆍ가솔린 등 30만 달러 어치의 물자를 싣고 흥남항에 입항했다. 그런데 북한은 이 배와 선원, 물자를 압수하고 선원들을 억류시킴으로써 박흥식 회장은 앉아서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그 시절에 상업이나 공업은 오늘로 치면 일종의 벤처 산업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경제의 주종이었던 농업은 소작료라는 일정한 수입이 보장된 안정된 산업이었던 반면, 상업이나 공업은 리스크가 대단히 큰 산업이었다. 이윤만 생각한다면 공업이나 상업을 하기 힘든 시대적 분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선각자들이 상공업에 뛰어든 것은 오늘로 치면 벤처 정신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을 지배했던 유교는 돈을 비천한 것으로 규정했다. 황금 천시(賤視)는 곧 상업 천시로 이어졌고, 상업을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도 하에서 가장 비천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 풍토가 깊이 뿌리내려지기에 이른다. 정체된 사회에서 산업마저 태동하지 못했으니 상업 자본이 축적될 토양이 전혀 형성되지 못했다. 그러니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야 하는 산업화는 엄두도 못내는 상황에서 해방을 맞게 된 것이다.

 

국내에 남은 유일한 민족자본이라고는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까지 이어져 온 토지자본이었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토지자본은 건국 초기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을 통해 와해의 길을 걷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 최고, 최대의 공업국이자 선진국이었던 미국에서 수십 년을 풍찬 노숙하며 고급 교육을 받은 당대의 지성인이었다. 그는 미국 망명 생활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선진 공업국의 장점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건국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한국 사회의 근본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농토는 농민에게 돌려야 한다’는 구상을 하게 된다. 그래야만 수천 년 이어온 지주-소작인의 갈등 관계를 청산하고 시장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토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토지개혁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토지개혁의 추진에 있어 북한식의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닌, 유상몰수 유상분배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신문 1948년 12월7일자 보도에 의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식 토지개혁을 할 경우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하게 되어 전에는 부호에 노예 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 같은 신문 12월10일자에는 “자본이 대부분 토지에 있는 한국에서는 지주들이 다 토지를 내 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유상물수 유상분배 형태로 토지개혁이 진행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과거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씨를 농림부장관에 발탁하여 토지개혁을 강도 높게 밀어붙인 결과 1950년 3월부터 농민들에게 ‘분배농지 예정통지서’를 발급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법과 시행령이 완성되기 이전에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에 의해 단행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춘궁기가 촉박했으므로 추진상 불소한 곤란이 있더라도 만난을 배제하고 단행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개정 법령과 시행령이 미처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먼저 행정적 조치들을 신속히 추진한 것이다.

 

그 결과 지주들은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내놓는 조건으로 지가(地價)증권을 받았는데, 그 후 3개월만에 6?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은 모든 질서와 가치를 파괴한다. 돈의 가치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전란을 통해 막대한 전시(戰時) 인플레가 발생하기 시작했다.(1)

 

부산으로 피난을 온 지주들은 전시 인플레로 인해 휴지 조각처럼 변한 지가증권을 투매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그 결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지주 계급은 완전히 몰락했고, 경제 부흥과 산업 발전을 위한 유일한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은 지주들의 생활비나 소비자금으로 하나 둘 유실되어 갔다.

 

우리와 달리 대만은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에 성공한 나라다. 특히 중소 규모의 지주들이 내놓은 토지를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 후 건실한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 발전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반면 우리 나라는 6?25 전쟁으로 인해 중소 지주들의 지가증권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소비됨으로써 특히 중소기업의 뿌리가 근본적으로 취약한 경제 구조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자본축적이 미약한 상황에서 산업화가 추진된 결과 우리 기업들은 만성적인 자본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우리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원조자금이나 해외 차입금, 은행 차입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구조적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또 중소기업의 뿌리가 허약해 고절적인 대기업 위주의 경제발전 정책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가는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유도

 

우리 나라 유일의 축적된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을 소유하고 있던 지주들이 6?25를 맞아 걷잡을 수 없이 몰락해 갔다. 다급해진 정부는 귀속 기업체 매수자가 타인 명의의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이를 귀속 기업체 인수 대금으로 지불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 즉 지주가 아닌 제3자가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귀속 기업체 매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정부는 지가증권이 더 이상 부스러기 돈으로 공중 분해되는 것을 막고, 산업 쪽으로 유도하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이 제도를 시행에 옮긴 것이다.

 

전시 인플레에 시달리고 피난살이의 와중에 생활비 해결에 애를 먹던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액면가의 40%~80%로 처분하고 몰락해 갔다. 반면에 신흥 기업가들은 지가증권을 싼값에 매입하여 귀속재산 불하 대금으로 납입함으로써 손쉽게 산업 자본가로 도약하는 찬스를 얻게 됐다.(2)

 

삼양사의 김연수 회장은 1950년대 초 울산에 제당공장과 한천공장을 설립하면서 투자 대금의 일부를 지가증권으로 조달했다. 두산그룹의 박두병 회장은 동양맥주 불하 과정에서 34억원의 불하 가격 중 10%를 부친(박승직) 명의의 지가증권으로 납부했고, 나머지 대금도 액면가의 30%로 구입한 지가증권으로 일부 충당했다.

 

선경직물의 창업자 최종건 회장도 선경직물 불하 과정에서 수원 지역 토착 지주인 차철순씨의 지가증권으로 매수 계약금 13만환을 지불했다. 또 한국화약 창업자 김종희 회장은 1951년 6월에 한국화약공판이란 회사를 불하 받는 과정에서 계약금의 일부인 1억원을 시중에서 싼값에 구입한 지가증권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지가증권을 활용한 지주의 자본 전환 성공률은 지극히 낮은 수준이었다. 연세대 이지수씨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농지개혁 당시 20정보 이상의 농지를 분배 당했던 호남지역 지주 418명을 조사한 결과 산업 자본가로 전업한 지주는 이 가운데 47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불과 11%의 지주만이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농지개혁 때 일반 보상으로 지급된 지가증권의 총 보상액 가운데 귀속재산 매입에 동원된 비율은 54%로 집계됐다. 전체 귀속 기업체 불하대금의 절반 정도만 지가증권으로 납입되어 산업 자본화했고, 나머지 절반은 생활 자금, 소비 자금 등으로 부스러기 돈이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부흥부장관, 재무부장관을 역임하며 경제정책 입안과 시행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송인상(宋仁相)씨(효성그룹 고문)는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농지개혁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의해 지주ㆍ소작 제도가 아니라 농민이 그 땅을 소유한다는 원칙 하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대만에서 보듯이 농지개혁에서 얻은 지주자본이 귀속재산 불하와 연결되어 공업자본화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있다. 토지개혁 직후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이 연간 50%를 넘었다.

 

인플레 때문에 지주가 가지고 있던 지가증권의 가치가 폭락했고, 그 결과 산업자본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유일한 민족자본이었던 토지 자본이 공업자본화 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자본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이런 의견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당시 우리 나라 지주 계층이 근대식 경영을 해 본 경험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토지자본이 산업자본화 했다 해도 실제 경영은 불가능했을 것이란 의견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 격이 김각중 경방 회장이다.

 

김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에 근대식 방직공장이 들어온 것이 1850년대. 그 후 일본은 산업혁명을 경험한 나라들이 겪은 코스를 그대로 답습하며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즉 방직업에서 기계산업, 중화학공업 등으로 이행한 결과 태평양전쟁 무렵에는 미국이나 유럽 열강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의 세계적인 공업국 대열에 오를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 패전 후에도 그들은 산업화에 대한 100여 년의 풍부한 경험과 기술진이 그대로 남았으며, 대규모 기업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경영진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본만 뒷받침될 경우 손쉽게 전후(戰後)복구가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에 우리 나라는 사회 지도층이었던 지주와 양반 계급이 해방될 때까지 공업이나 산업의 개념이 무엇인지 인식조차 없었다. 해방 후에는 우리 나라 기업인이 창업한 기업 중 경성방직이 유일한 산업 시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업 수준이 보잘 것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지개혁으로 지주들이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 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산업시설 운영 능력이나 경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성공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전주 지방에서 120정보를 소유하고 있던 이부영(李富榮)씨를 비롯한 지주들의 전주방직 실패기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이부영씨를 비롯한 전주 지방의 대지주 5명은 지가증권의 3분의 2씩을 투자하여 방직공장을 불하 받고 실무는 일제 때 근무했던 종업원들을 모아 그들에게 경영을 맡겼다. 그러나 근대적인 회사 경영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지주들에겐 예기치 않았던 부담이 뒤따랐다. 공장을 인수하여 재가동하기 위해서는 불하자금 외에 운전 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던 것이다.

 

5명의 지주들은 다시 돈을 모아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운영자금 외에도 상당한 부담이 뒤따랐다. 결국 회사 운영을 포기하고 삼양사에 공장을 넘기고 말았다. 사업에 뛰어든 지 불과 1년만에 다섯 명의 지주는 지가증권을 다 날리고 빚만 잔뜩 지게 됐다. 이런 사례는 당시 우리 나라 지도층들이 산업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이해시키는 일반적 사례일 것이다.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사연을 가슴에 안은 채 시행된 농지개혁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차원에서 복잡한 문제들이 노출된 것은 예기치 못한 전쟁이 가져다 준 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지개혁은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지주계급은 대대로 토지를 세습하며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되풀이해 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지주계급이 소멸됨으로써 뿌리 깊게 이어져 오던 지주-소작인, 즉 부자와 貧者간의 갈등을 일거에 불식시킨 것이다. 그 결과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가.

 

학자들은 세계의 여러 나라 중 경제가 고속으로 성장하면서도 소득 분배가 한국처럼 공평하게 이루어진 나라는 유래를 찾기 힘들다고 평한다. 그 공로는 이승만의 농지개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농지개혁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은 근대화 출범 초기부터 지주-소작인간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균질한 사회로 출발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첨예한 계급 갈등의 소지를 미래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농지개혁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성과다.

 

동아시아에서 농지개혁에 성공한 일본, 한국, 대만은 중산층이 두텁게 자리잡아 경제 성장의 초석과 사회 균형자 역할을 수행한 반면, 남미(南美) 여러 나라들은 농지개혁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극단적인 빈부 격차가 존재하는 계급사회가 된 것을 비교하면 그 뚜렷한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우리 나라는 조선조 500년 동안 뿌리 깊게 이어졌던 반상(班常)의 계급 구분이 사라졌고, 건국 후 농지개혁으로 인해 부자와 빈자(貧者)의 격차가 무너졌다. 전 국민이 계급 없고, 빈부 격차가 사라진 ‘차별 없는 시대’가 열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기회의 균등이 실현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 풍토가 훗날 한국인을 상징하는 ‘하면 된다(Can do spirit)’는 의욕과 참여 동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3)

 

경제 안정 15원칙 시행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가 지도부의 긴급 과제는 치솟는 물가를 안정시키고 인플레를 진정시키는 것이었다. 1950년 1월1일 이승만 대통령은 방송을 통해 다음과 같은 신년사를 국민에게 전했다.

 

<“금년 정월 초하루에 이르러 1년 전의 우리 경제와 비교해 보면 여러 갑절 진전된 것을 누구다 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미 ECA(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경제원조처)의 원조 물자를 받은 우리로서는 민중의 많은 노력과 정부 당국의 주야 근무 결과로 석탄 채굴량이 많이 늘었고, 따라서 전력이 크게 증가되었습니다. 식량도 추수가 풍족해서 강제로 미곡을 수집하던 제도를 다 폐지하고도 오히려 여유가 있어서 외국에 반출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을 극복하고 정크 무역과 마카오 무역으로 우리 나라 경제는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단계였다. 해방 직후의 시대를 살았던 기업가나 정치가, 정부 관리들은 어떻게 하든 당당한 독립국가를 건설하여 국민이 배불리 먹고사는 나라를 만들자는 의욕으로 강하게 뭉쳐 있었다. 당시 우리 나라 총 수출액은 3500만 달러, 국민소득 1인당 50~60 달러에 불과하던 시기였다. 수출품도 김이나 한천, 머리카락, 텅스텐 정도였던 시절이다.

 

무엇보다 골치는 치솟는 물가, 주저앉는 통화가치였다. 자고 일어나면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뛰는 바람이 서민 생활은 물론, 사회가 안정을 찾지 못했다. 정부는 인플레 수습을 위한 중대조치로서 ‘한국 경제 안정 15원칙’을 1950년 2월23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고, 같은 해 3월4일에 시행됐다. 이 제도를 입안했던 송인상씨는 “경제 안정 15원칙이 자유당 시절에 만든 정책 중 가장 잘된 것 중의 하나”라고 평했다.(4)

 

우리 정부가 시행한 ‘경제 안정 15원칙’은 패전으로 파탄에 직면해 있던 일본의 경제 재건을 위해 맥아더 장군의 요청으로 일본 경제 재건 조사단을 이끌고 온 닷지의 권고안(닷지 라인), 즉 ‘일본 경제 안정 9원칙’과, 일본 정부가 세제(稅制)개혁을 위해 초청한 세정(稅政) 전문가 샤우프의 권고안을 토대로 하여 만든 것이다.

 

사실상 오늘날의 ‘부강한 일본’을 만든 것은 이 닷지 라인과 샤우프 권고안이라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러한 닷지 라인과 샤우프 권고안 모델을 참고로 하여 만든 우리 나라의 경제 안정 15원칙이 1950년 3월부터 시행됨에 따라 통화량 증가 추세는 한풀 꺾였고, 물가 안정과 사회 혼란이 수습되어 가기 시작했다.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제공되는 원조를 토대로 각 부분의 생산 계획을 수립해 나갔다. 방직ㆍ철강ㆍ도자기ㆍ카바이드ㆍ유지공업 등의 실태 조사와 생산 계획이 수립됐으며, 경인지구 군수공장 실태 조사, 공업 원자재 실태 조사 등이 이어졌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토대로 1950년부터 종합적인 생산 계획을 수립하고 미국 원조자금의 지원을 얻어 제철ㆍ조선ㆍ시멘트ㆍ비료ㆍ판유리 등 주요 산업과 전력ㆍ지하자원 개발계획을 본격화한다는 청사진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런 원대한 구상은 6ㆍ25로 인해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전쟁이 터지기 직전 서울 시내 곡가(穀價)는 쌀 한 가마에 2300백원이었다. 인민군 남침 하루 뒤인 6월26일에는 쌀 한 가마에 5000원으로 두 배 이상 폭등했다. 6월25일은 마침 일요일이라 은행이 문을 닫았다. 6월26일 은행 문이 열리자마자 예금 인출 인파가 몰려들어 대혼잡을 이루었다. 은행에는 1인당 10만원까지만 지불하라는 긴급 지시가 내려졌다. 6월26~27일 이틀간 은행을 빠져나간 돈은 총 77억3000만원으로, 전체 화폐발행액의 13%에 달하는 규모였다.

 

당시 한국은행에는 현찰과 금괴, 은괴가 보관되어 있었다.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로 진격해 오자 국방부는 김일환(金一煥) 대령의 인솔하에 한국은행 금고에서 금괴 1070kg, 은괴 2513kg가 든 상자 89개를 긴급 호송했다. 이 금괴와 은괴는 경남 진해까지 피난을 떠났다가 미국으로 이송되어 보관되었다가 우리 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에 가입할 때 그 기금 불입에 사용됐다.

 

그러나 한국은행 금고에 보관 중이던 엄청난 양의 현금을 미처 대피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됐다. 인민군들은 남한 점령지에서 이 현찰을 마구 사용해 물자 구입과 대금 지불에 사용하는 바람에 훗날 재무부장관이 이적 행위자로 몰리기도 했다.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