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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미국의 역할

Joyfule 2020. 6. 10. 08:18

5.미국의 역할

 

경제문제를 논할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이 박정희 시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여 우리나라가 산업화, 근대화가 시작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 박정희 시절 산업화, 근대화의 싹은 그 전 시대인 이승만, 장면 정부 시절에 이미 그 씨앗이 심어져 있었기에 가능했다. 건국 지도자 이승만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너무 부족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 1950년대의 우리 경제, 산업현황 등을 조명하는 특집을 연재한다.

 

월간조선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5)

이승만 대통령의 공헌: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교육시설 확충

 

대한민국의 산업화는 이처럼 전쟁과 전후복구라는 급격한 변화과정을 거치며 시동이 걸렸다. 바로 이 시기에 우리 나라 산업화의 진전을 결정적으로 도운 것은 미국의 원조였다.

 

경제학에서는 경제의 3대 요소를 자본ㆍ기술ㆍ경영이라고 한다. 해방으로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간 후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자본과 기술과 인력이 이 땅을 빠져나가면서 우리 나라의 산업은 마비상태에 빠졌다. 이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국 원조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는 원조자금으로 식량ㆍ유류ㆍ생고무ㆍ목재 등 산업용 원자재를 도입했고 디젤기관차를 도입해서 철도 수송 혁명을 가져왔다. 또 원조자금으로 서독제 전화시스템을 도입하여 통신 서비스를 개선했고, AID 주택이라 하여 오늘날 주택사업의 선구가 되는 사업이 시작되기도 했다. 건국의 혼란과 6․25의 참상을 겪은 우리 나라를 결정적으로 일으켜 세운 것은 미국 원조였던 것이다.

 

해방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국은 점령지역 행정구호계획(GARIOA:Government and Relief in Occupied Area)을 통해 혼란에 빠진 한국 경제 재건을 도왔다. 1949년 경제원조처(ECA:Economic Cooperation Administration)가 발족되어 체계적인 원조사업이 진행됐으며, 1961년 국제원조처(ICA: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의 원조가 중단될 때까지 미국은 한국에 약 13억 달러 상당의 원조자금을 제공했다.

 

우리 정부는 이 원조자금으로 대충자금(對充金:Counterpart Fund)을 설치했다. 즉 원조로 들어온 달러는 사전에 합의된 환율에 의해 원화로 환산되어 대충자금에 들어갔다. 이 자금을 UN군의 전비(戰費)에 충당하거나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기 위해 세입으로 편입됐다.

 

또 대충자금은 산업자금에 융자 혹은 투자 방식으로 방출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중소기업 지원자금으로 2700만 달러와 대충자금을 묶어 400여 개가 넘는 중소기업에 대출함으로써 우리 나라 중소기업 발전의 씨를 뿌렸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나라의 기업들은 금속으로 된 똑딱단추나 벽시계조차 기술이 없어 못 만드는 형편이었다.

 

정부는 대충자금 프로그램을 통해 신진자동차 같은 기계공업을 지원했고, 종로3가에서 안경점 하던 사람이 플라스틱 안경테 제조를 신청하여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이 자금이 경제 각 분야에 지원되어 우리 나라 산업 근대화의 불씨 역할을 한 것이다.

 

미국은 물품 원조 외에도 각 분야에서 최신 기술을 가진 기술자와 테크노크라트들을 한국에 파견해 국가 근대화를 도왔다. 미국에서 온 인재들에게 우리 나라 관리와 기술자, 기업가들이 교육을 받고 계몽도 당하면서 산업화, 근대화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사 연구가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을 담보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우리 나라는 국방과 안보에 대한 부담을 덜고 산업화에 매진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조인을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을 상대로 엄청난 흥정을 하여 다음과 같은 전리품을 얻어냈다.

 

▲휴전이 성립된 후 한미 군사조약 체결(이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장기간의 경제원조와 2억 달러의 제1차 원조 제공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이에 적당하게 해공군력 증강.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 석방 등의 카드를 동원하여 이러한 요구사항을 관철시킴으로써 다시는 공산군의 침략을 받지 않도록 군비를 갖추는 데 성공한 셈이다.

 

또 교육부문에 대대적인 투자와 복구를 통해 문맹을 퇴치하고 고급 인재를 육성하여 산업사회에 필요한 인력을 대량 배출하는 바탕을 마련했다고 지적한다. 이승만 정부가 총력을 기울인 것은 누가 뭐래도 교육이었고, 산업화의 시초를 교육으로부터 시작했다. 국가 지도부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교육시설의 복구와 개선을 국가운영의 최우선과제로 삼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교육시설 확충을 위해 폐쇄됐던 교육계를 개방하여 사립학교를 대대적으로 허가했다. 그리하여 사립학교가 곳곳에서 설립되면서 전체 숫자가 공립학교를 능가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이런 노력으로 이승만 시대에 이미 우리는 교육 분야에서 세계 선진국에 육박하는 수준까지 올라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 부산 영도에 전시(戰時)연합대학을 설립했다. 대학이래야 천막을 치고 칠판 하나 걸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시 연합대학 문을 연 후 국내 대학 재학생들은 다 등록시켰다. 그리고 내각에 지시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생들은 보존해야 한다”며 군에 입대시키지 않았다. 그러자 사방에서 “못 배운 핫바지들만 전쟁터에 나가 총알받이가 되란 말이냐” 하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대통령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조금만 더 견디면 전쟁이 끝난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나라를 새로 건설해야 한다. 전후 복구와 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인재가 필요하다. 그 때를 위해서 대학 재학생들을 보존시켜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그의 혜안은 그대로 적중했다. 교육보급율은 경제발전에 직결되는 것이 몇 년 후부터 서서히 그 성과가 나타난다.

 

1950년대 정부 예산 구성비를 국방비가 전체 예산의 50%, 문교 예산이 20%를 차지했다. 국방비를 제외하면 전체 예산 중 문교 예산이 비중이 가장 클 정도로 교육을 중시한 시대였다. 임영신(任永信)씨가 중앙대학교를 세우고 건물 등 시설을 짓기 위해 기자재를 외국서 수입할 때 정부는 무관세로 통관시켜 학교시설 확장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교육에 대한 투자는 당대에는 별다른 혜택을 보지 못했지만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0년대에 우리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교육이었다. 만약 이승만 시대에 교육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면 박정희 시절의 고도성장이 과연 가능했을까.

 

기술원조

 

미국의 원조 중에서 우리 정부 관계자들이 유효 적절하게 사용한 것이 미국 원조 중에 포함되어 있던 ‘기술원조’라는 항목이었다. 이것은 원조를 제공받는 나라의 경제 사회 발전에 필요한 인재양성이나, 기술습득, 행정능력의 효율성을 높이는 작업, 혹은 그 나라가 필요로 하는 산업기술 인력의 파견 등에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었다.

 

이승만 정부에서 부흥부장관, 재무부장관을 지낸 송인상 효성 고문은 자서전에서 “미국의 원조계획이 한국에 남긴 것 중에서 가장 성공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기술원조계획이었다고 답변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다.

 

그 시절에 정부 관료들은 대부분 일본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과 대화가 잘 통하질 않았다. 그래서 지도층 인사들은 “기술원조 자금으로 인재를 길러 사회 각계에 진출시켜야 나라 운영이 제대로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시절 기술원조 자금으로 이루어진 인재육성 사례는 다음과 같다.

 

우선 서울대와 미네소타대학의 공대ㆍ의대ㆍ농대간에 700만 달러를 들여 계약을 체결하여 교수를 상호교류하고, 우리 학생 상당수를 미네소타대학에 유학을 보냈다. 게다가 연구와 관련된 많은 기계와 설비들이 미네소타대학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 나라 박사 중에 미네소타대학 박사가 가장 많은 것은 이승만 시절에 노력한 결과다. 중고등학교 교육 프로그램은 피보디사범대학과 연계해서 개선작업을 시작했다.

 

또 워싱턴대학과 연세대ㆍ고려대간에 협정을 맺어 경영학과를 신설했다. 해방 후엔 화신의 박흥식씨나 경방의 김연수씨 정도를 제외하면 한국에 경영자다운 경영자가 없었는데, 연세대와 고려대에 경영학과가 설치됨으로써 많은 인재들이 기업경영의 선진기법을 공부하는 기회를 맞게 되어 우리 나라 기업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이밖에도 서울대학교의 행정대학원, 국방부 산하의 국방대학원이 미국의 기술원조자금으로 설립되었다.

 

이밖에도 AID 자금으로 정부 관리, 기업체 사원, 기술자들을 외국에 파견해 3개월, 6개월, 1년 단위로 연수를 시켰다. 그 하나의 사례가 발전소 운영요원 연수였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 당인리(10만kW)와 묵호(5만kW), 마산(5만kW)에 화력발전소가 건설됐다. 이 발전소 운영을 위해 이공계통의 젊은 기술자들을 기술원조 자금으로 디트로이트의 에디슨 전기회사에 연수를 보냈다.

 

이들이 귀국해 최신식 발전소를 차질 없이 운영한 것이다. 당시 10만 kW의 당인리 발전소에 근무한 인원은 총 180명. 미국이 똑같은 규모의 화력발전소를 파키스탄에 지어주었는데, 그곳 운영요원은 1500명이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우리 엔지니어들은 열심히 공부를 하여 최소 인원으로 발전소를 원활히 운영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국 정부가 필요로 하는 미국인 기술자도 기술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에 초청할 수 있었다. 우리 정부는 각 분야에서 미국 원조기술단을 초빙했는데, 그 중 가장 성공을 거둔 사례는 철도였다. 우리 나라에 온 미국 철도기술 고문단은 총 25명이었다. 그런데 다른 분야와 달리 철도 고문단은 현장 기술자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드 그로 고문단장은 텍사스주의 철도기사 출신이었는데 이들이 불철주야 노력하여 서울-부산 간 정시운행 시스템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시절만 해도 혼란한 사회 분위기, 정비되지 않은 운행 시스템 등으로 인해 기차가 연착하지 않고 정시에 도착한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무렵 우리 나라 철도는 100% 증기기관차로 운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기관차 연료인 유연탄이 비밀리에 명동 음식점으로 흘러나가 연료로 사용됨으로써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한미 양측의 담당자들은 디젤기관차를 도입하여 연료를 탱크에 넣고 봉인하여 운행하면 연료의 외부 유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에 합의했다. 더구나 증기기관차는 열효율이 5%인 데 비해 디젤기관차는 18%나 된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리하여 제너럴일렉트릭에서 도입한 디젤 기관차 27대가 도착했고, 이를 운행할 기관사 양성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미국 철도 고문단은 한국인들의 천재적인 소질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런 각고노력 끝에 우리 나라는 1960년대 초까지 수송의 애로를 완전 타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 미국의 기술원조는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고, 특히 교육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계기가 됐다. 박정희 시절의 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한 엘리트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승만 시절에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미국 원조자금으로 정부 관계자들은 문맹퇴치에 앞장섰고,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하여 세계 유수의 교육수준을 유지하는 나라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에 파견된 미국 원조단은 높은 수준의 안목과 역량을 가진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늘 한국 관리들에게 “하루빨리 자립경제로 나가려면 수출을 적극 장려하고, 또 외국 회사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라”고 권고했다. 정부가 1959년에 외자도입법을 제정, 공포한 것도 미국 전문가들의 조언 덕분이다. 이런 노력들이 1960년대에 수출드라이브 정책으로 꽃을 피웠고, 걸프 오일(Gulf Oil) 등 석유회사, 영남화학을 비롯한 비료회사 등등 외국기업이 한국에 진출하는 발판을 만든 것이다.

 

그 시절 한국의 정부 관리들은 외국에 나갈 때마다 그 지역의 한국 유학생들을 만나 “하루빨리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 정부 일을 도와 달라. 정부는 당신들의 아이디어와 정열, 패기와 지식이 필요하다”고 요청하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40여 년을 세계의 최고 산업국이자 선진국인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최고급 교육을 받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다. 그는 선진국 생활을 통해 인재의 중요성, 산업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고 또 산업화를 하려면 무엇이 기본인지, 어떤 일부터 해야 하는지 그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반면에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은 이러한 산업적 통찰력 면에서 이승만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또 세계 최강의 선진국인 미국이 세계전략 차원에서 한반도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해방과 건국, 6․25라는 미증유의 혼란기에 우리가 세계사의 흐름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이승만이란 인물을 지도자로 만난 것은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