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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업의 선각자들

Joyfule 2020. 6. 1. 22:18

 

2.기업의 선각자들

 

경제문제를 논할 때 흔히 빠지는 함정이 박정희 시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여 우리나라가 산업화, 근대화가 시작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다. 박정희 시절 산업화, 근대화의 싹은 그 전 시대인 이승만, 장면 정부 시절에 이미 그 씨앗이 심어져 있었기에 가능했다. 건국 지도자 이승만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너무 부족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 1950년대의 우리 경제, 산업현황 등을 조명하는 특집을 7회에 걸쳐서 연재한다. 이 글은 ‘전경련 40년사’ 도입부에 수록된 것으로서 전경련 40년사 편찬위원회의 청탁을 받아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이 취재, 집필한 것이다.

 

 

월간조선

위대한 지도자 이승만의 경제 리더십(2)

●2.기업의 선각자들●

 

기업가와 기업가 정신

 

이원순(李元淳)씨는 그의 저서 ‘인간 이승만’에서 건국 직후의 우리 나라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승만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들로는 경험 있는 인재의 불충분,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인식 부족, 경제 부흥을 위한 필수 자원의 결핍, 일본인의 철수와 동시에 진공상태에 빠진 일본식 교육제도의 잔재, 기본금량에 따르지 않고 국제 환화(煥貨)의 자격도 없는 통화, 군대도 없는 긴급한 국방 문제, 절대적으로 필요한

산업 발전보다 구제사업을 목표로 하는 미국의 원조계획 같은 것이었다…. 일부 정객들은 실질적인 정당 조직을 위한 계획이나 행동의 지표가 되는 전통도 갖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때가 왔다는 기대에 날뛰고 있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당면 문제는 경제재 건과 공산주의에 대한 보루가 될 건전한 민주국가 건설이었다.>

 

모두들 ‘혼란의 시대’라고 불렀던 1945년부터 53년 사이, 서울 시내 도매물가는 508배나 폭등했다. 그 혼란의 시절에도 건국을 위한 몸부림이 시작됐다. 경제 재건을 위한 정책 입안자는 정부 관료지만, 그것을 현장에서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기업가들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國富論)’에는 기업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발견된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은 푸줏간이나 양조장,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휴머니티가 아닌, 이기심을 생각하고, 결코 우리의 필요가 아닌, 그들의 이익을 말해 주어야 한다.>(1)

 

기업가들은 기업 활동을 통해 사회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생산하고, 고용을 창출하며, 납세를 통해 국가 살림에 도움을 준다. 실례로 1962년, 제일제당 한 회사에서 국가 총 조세 수입의 4.61%를 담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1953년 전쟁의 포성이 멎어 가던 시절, 부산에 제일제당을 창업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실제(實際) 정신을 바탕으로 한 구미(歐美)의 여러 나라는 오늘날 그들의 찬연한 물질문명을 열매맺어, 세계의 강국으로, 우주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다. 이에 반해 공상(工商)보다 선비를 더 받들던 우리의 전통 인습은 아직도 영리(榮利)라는 말을 선뜻 선한 것으로 인식하려 하지 않는 잠재 관념이 흐르고 있다. 현금(現今)의 세계가 표면상으로는 이념이니 명분이니 하면서 그럴듯한 수사를 내세우고 있으나 기실 온통 경제전이 불꽃을 튀기고 있는 것이다.

 

비즈니스가 일터를 넓히고 생산과 유동을 증진시킴으로써 국민의 복지와 나라의 부를 결과시키며, 국제간의 치열한 상품 침투전에서 비즈니스맨은 곧 전사(戰士)의 존재로 인식된다. 서양에서는 흔히 대기업의 성공자가 곧 현실의 제패자 내지는 현실 예술의 정화가(精華家)로서 각광을 받는다. 우리도 가장 빠른 시일 내에 빈곤의 멍에를 벗어나려면 비즈니스에 대한 인식과 그 가치를 새로이 할 것이며, 국민이나 정부도 부드러운 기업 풍토를 조성하는 데 보다 더 협력할 것을 요망하고 싶다.>

 

이런 긍정적 관점에서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활동해 온 우리 나 기업가들을 바라보자.

 

섬유 산업의 뿌리 경성방직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각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과 지식, 전문적 식견을 가진 인재가 필요하다. 그런데 해방 후 우리가 처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각 분야에서 국가를 운영할 인재의 부족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을 하나의 독립된 경제 단위가 아니라 원자재와 식량 공급 기지로 삼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이 땅에서 벌인 악행이야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악행은 각 분야에서 인재 양성을 봉쇄했다는 점이다.

 

일제시대 국내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제대에 경제학부가 없었던 것은 한국의 고급 경제 인력을 키우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일제시대에 한국인들은 의사나 변호사는 많았지만 상업이나 경제를 전공하여 산업계, 경제계에서 활약하는 경제인은 극히 드물었다. 그 결과 해방 후 우리 사회에는 국정 운영 경험을 가진 지도자나 전문가, 기업 운영 경험이 있는 기업가, 산업 분야의 엔지니어가 턱없이 모자랐다.

 

오늘날 대기업이나 그룹, 재벌 소릴 듣는 기업가들은 해방과 6․25, 시민혁명과 군사 쿠데타의 평지풍파와 정치적 격변 속에서 부단히 생성 소멸된 것이다. 해방 정국에서 일본인의 손에 의해 운영되던 기업이 아닌, 민족자본에 의해 우리 손으로 일군 근대적 의미의 기업이라곤 경성방직과 화신백화점 정도였다. 그러니까 해방 직후 우리 나라에서 기업가라 이름할 수 있는 경영 능력을 가진 사람은 경성방직의 김연수(金秊洙) 회장, 화신백화점의 박흥식(朴興植) 회장 정도에 불과했다는 뜻이 된다.

 

산업혁명의 원조(元祖)격인 영국과 유럽은 방직업을 기계 작업으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산업혁명이 발동되었다. 원면이나 원모(原毛)에서 실을 뽑고, 그 실을 옷감으로 짜는 방적(紡績)과 방직(紡織)을 기존의 손으로 하는 작업에서 기계로 하는 작업으로 대체하고, 또 가내공업 형태에서 대규모 생산 방식으로 개혁한 것이 산업혁명의 시초다. 이것이 기계공업과 중화학공업의 발달로 전이되는 것이 일반적 패턴이다.

 

경방(京紡)은 1919년 일제시대 초기에 ‘우리 옷감은 우리 손으로’라는 기치를 내 걸고 출범한 민족기업이었다.(2) 김각중 회장의 증언에 의하면 경방이 1930년대 초반에 방적을 시작했을 때 이공 계통의 한국인 엔지니어는 진재홍, 김동일, 조강화, 이세훈씨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기술 인력이 부족했던 당시 상황에서 경방은 이런 엔지니어들을 일본 회사에서 스카웃 해다가 자체에서 기술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후반에 경방은 생산라인 확대를 위해 공장 증설을 신청했는데, 총독부가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경방은 만주 소가둔(蘇家屯)에 남만방적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것은 우리 나라 최초의 산업시설 해외진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수당 김연수 회장의 자서전에 의하면 경방이 만주 소가둔에 방적회사를 설립한 이유는 만주 벌판으로 이주한 조선 사람들이 현지인들로부터 온갖 학대와 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게 떳떳한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경방은 남만방적주식회사를 건설한 후 일본 방직회사들의 사례를 본받아 근대적 경영을 했으며, 그 시절에 전직원을 상대로 의료보험을 실시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 우리 나 대표적 산업 시설이었던 면방직공업의 현황을 보면 면방직공업 총자본의 94%가 일본인 소유였으며, 기술진의 80% 이상이 일본인이었다. 이처럼 자본과 기술을 독점하고 있던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하고 한반도에서 철수함에 따라 경방을 제외한 거의 모든 면방직 회사들은 문을 닫거나 가동 중단 상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남만방적이 위치하고 있던 만주 지역이 중국 공산당 지배하에 들어가는 바람에 문을 닫고 현지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기술자 1500명과 그 가족들이 귀국했다. 마침 우리 나라에 있던 일본 방직공장은 일본인 기술자들이 철수하여 공백 상태였다. 경방의 경영자였던 김연수 회장과 김용완 사장은 “누구든 방직공장을 한다면 경방이 돕겠다”고 선언하고 동양방직(제일방직의 전신), 김성곤(金成坤)씨가 운영하던 금성방직에 남만방적에서 귀국한 김지봉, 강창섭씨 등 핵심 기술자를 보내 공장을 가동시켰다. 동양방직 사사(社史)에는 당시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양방직은 일본인이 철수한 뒤의 기술, 관리 면의 인력공백을 메워야 했다. 8․15 직전 동양방직에는 관리나 기술직에 일본인이 독점하고 있을 뿐 한국인 직원은 기숙사 담당 직원 1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공원 아니면 고용원들뿐이었다. 이와 같은 공백은 마침 남만방적에서 해방을 맞아 귀환한 사람들로 충원할 수 있었는데, 남만방적은 경방의 출자로 1940년부터 가동한 방적회사였다. 군정 당국은 귀환 동포의 직장 알선과 동양방적의 인력난 해소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도로 이를 주선하여 인천공장에 사원 26명과 공원 20여 명을 채용하게 했다.>

 

이런 노력들이 국가 근대화 시기에 섬유산업과 의류 봉제산업을 통한 외화 획득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경성방직이 한국 섬유산업의 뿌리였다면 박흥식 회장은 ‘백화점 왕’ 이었다. 박흥식씨가 화신백화점과 전국 450개의 연쇄점 망을 통해 상권을 장악한 것은 미스꼬시(三越: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조지야(丁子屋:지금의 미도파 백화점), 미나카이(三中井)와 같은 일본 상권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백화점과 연쇄점 사업을 통해 거부(巨富)를 축적한 박흥식 회장은 1937년에 제주도흥업이라는 회사를 설립, 제주도에 200만평의 목장을 확보하고 제주도를 아시아의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구상을 했다. 관광 제주의 꿈이 이미 1937년에 박흥식이란 기업가의 머리 속에서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또 박흥식 회장은 무역을 통해 세계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 1941년 화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국제 무역업 진출했다. 일제시대에 이미 박흥식 회장은 독일인과 일본인을 위탁 고문으로 고용하여 동남아는 물론 유럽과 아프리카, 미국까지 진출하여 해산물과 운동화, 의약품, 사과, 명태, 간유 등을 수출했다. 또 중국 시장 개척을 위해 천진에 출장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조선비행기공업 등 군수산업에도 손을 댔다.

 

공교롭게도 해방 전 민족자본의 대명사이자 한국을 대표하던 기업가 두 사람은 정부 수립 직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끌려가 영어(囹圄)의 몸이 된다.(3) 일제시대에 기업 운영을 통해 일제 식민지 정책에 협조했다는 죄목이었다.(4)

 

한국 기업가들의 특성

 

산업 혁명과 자본주의의 고향인 영국 속담 중에 ‘애국이란 말은 악당들의 마지막 핑계’라는 말이 있다. 이익이 남는다면 지옥이라도 마다 않는 것이 자본의 속성이다. 따라서 기업의 절대 목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윤 창출이며 애국이나 산업보국(産業報國)은 자신들의 행위를 미화하기 위한 허언(虛言)이란 뜻이다. 세계 산업사에 큰 족적을 남긴 많은 유수의 기업들은 이 원칙에 충실했다.

 

그런데 해방 후 혼란기에 탄생한 우리 나라 기업가들은 자본주의 본향의 기업들과는 약간 다른 궤적을 보였다. 이윤 창출이란 대명제와 함께 애국애족의 실천에도 등한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기업가들의 애국적 일면을 상징하는 장면들을 엿보게 하는 장면을 몇 가지 살펴보자.

 

해방 후의 혼란상은 노동계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좌익계는 해방과 더불어 조선노동자조합 전국평의회(약칭 전평)를 설립했고, 여기에 맞서기 위해 우익 측에서는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을 만들어 대립했다. 전평은 1945년 11월 설립된 이후 1946년 9월에 총파업을 주도하는 등 강력한 조직력과 일사불란한 행동력, 압도적인 머릿수로 노동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전평 소속의 조직원들은 각 산업체에 침투하여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방해하고 파업과 사보타지, 기물 파괴, 경영진 퇴진 운동을 벌이는 등 태풍의 눈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좌익계 노동운동이 기업 활동을 방해하고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감으로 다가올 때 기업가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그 적절한 해답은 경방의 경영자이자 전경련 회장으로서 재계(財界)를 이끌었던 ‘동은(東隱) 김용완’ 전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 자서전의 내용이다.

 

<하루는 고하(古下:송진우의 호)로부터 동은(東隱:김용완의 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김군인가?”

“예.”

“경성방직에 돈이 얼마나 있나?”

“돈 없습니다.”

“여보게,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일이야. 돈 있는 것 전부 거두어 주게.”

고하의 전화는 거의 명령조였다. 당시 고하는 한민당에 관계하고 있었는데 공산당에 대처하기 위한 정치자금을 대라는 것이었다. 동은은 이 일을 혼자서 임의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장인 수당(秀堂;김연수의 호)에게 고하로부터 받은 전화 내용을 상의했다. 동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당은 한참 동안 묵묵히 있다가 단호히 말했다.

“돈을 내세. 나라가 이렇게 혼란에 빠지다가는 모든 게 공산당 수중에 들어갈 수도 있네. 경성방직보다는 나라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결국 긴급 중역회의를 소집하게 되고 경성방직은 재고품을 몽땅 처분하여 당시로는 거액이랄 수 있는 300만원의 자금을 마련했다.>

 

삼성그룹의 창업자 고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해방 후의 혼란상을 경험하면서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심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자주독립 국가의 경제 건설에 응분의 소임을 다해야 한다. 민생의 안정에는 경제 질서의 확립이 선행되어야 하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의 보장을 위해서는 정치 안정이 불가결하다. 그 정치의 안정을 확고하게 만드는 기반은 우선 경제의 안정에 있고, 거기에 수반하여 민생도 안정된다. 민생과 경제와 정치는 삼위일체의 것이어서 서로 적절하게 보완 결합되어야 국가 사회의 발전이 비로소 약속되는 것이다.

 

참으로 당연하고도 평범한, 그러나 매우 중요한 이 진리를 깊이 터득하게 되었다. 무릇 사람에게는 저마다 능력과 장점이 있다. 그것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국가와 사회에 대한 봉사이자 체험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의 국가적 봉사와 책임은 사업의 길에 투신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각성은 그 후 기업을 일으키고 그것을 경영하는 데 있어 일관된 나의 기업관이 되어 왔다.>(5)

 

이러한 국가 우선주의적 발언들은 그의 어록집 ‘기업은 사람이다’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병철 회장을 비롯한 우리 나라 기업가들이 이윤 창출보다는 애국, 산업보국이란 명제에 깊이 천착하는 계기는 일제 식민지 경험, 해방과 분단, 그리고 6․25를 겪는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은 때문이 아닐까.

 

서울에서 삼성물산공사라는 무역회사를 차리고 무역업으로 승승장구하던 이병철 회장은 6ㆍ25가 터지자 ‘서울 사수’라는 정부의 약속을 믿고 피난을 떠나지 않았다가 모진 고생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인공(人共) 치하에서 숨어 지낼 때의 심정을 전경련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피난을 못 가고 적치(敵治) 90일을 체험하고 보니 공산주의가 책에서 보던 것과 말로 듣던 것과는 너무 차이가 있었습니다. 도저히 인류 사회에선 있을 수 없는 사회였습니다. 그때 자유민주주의와 국가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게 됐고, 내 인생관도 바뀌었습니다. 국가가 있고 나서야 사업도 있고 가정도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당시 얼마나 고생이 심했으면 이병철 회장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한 맥아더 장군을 ‘세계사상 위대한 군인’ ‘한국의 은인’이라고 칭송했을까. 그는 맥아더 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경기도 용인의 호암미술관 앞뜰에 맥아더 장군 동상과, 그가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부조를 새겨 놓았다.

 

이병철 회장은 인공 치하 3개월을 자신의 승용차 운전기사였던 위대식씨 집 다락에 숨어 지냈다. 전쟁 후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 이병철은 위대식씨를 평생 이사로 임명했다. ‘사업으로 국가에 보답한다’는 뜻이 담긴 사업보국(事業報國)이란 이병철의 기업가 정신은 자신의 행위를 미화하기 위한 슬로건이 아니라 식민지 시절의 체험과 해방 후의 혼란, 6ㆍ25의 세파에 담금질되며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누구나 태어날 때는 빈손으로 오지만 살아가며 축적하는 승리와 성공, 실패와 좌절은 천태만상, 천차만별이다. 훗날 재벌의 대열에 오른 기업가들도 그 출발은 초라했다. 이 나라가 처한 역사와 운명은 다른 나라처럼 민족자본이나 상업 자본을 축적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제 치하에서 대부분 정미소나 쌀가게, 식료품, 양조장, 포목상에 종사하고 있는 모습들이 발견된다. 백화점 왕 박흥식 회장은 쌀장사로 모든 돈으로 인쇄소를 차렸고, 여기서 축적한 이윤으로 백화점업에 뛰어들었다. 이병철 회장은 정미소와 김해 평야 땅 투기, 설경동 회장은 날품팔이로 모은 푼돈으로 미곡상을 차렸다가 수산업에 진출했으며, 여기서 자금을 축적하여 훗날 대한전선을 창업하게 된다.

 

해방 후 최초의 재벌 칭호를 얻었던 태창의 백낙승 회장, LG의 구인회 회장, 이양구 회장은 포목상 출신이다. 이들은 해방 직후엔 구멍가게 정도의 영세성을 면치 못했지만 사업으로 국가에 보답한다는 정신만큼은 이병철 회장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기업가 정신이야말로 다른 나라 기업가 세계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우리 나라 1세대 기업가들에게 공통적으로 자리잡은 덕목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국가 차원의 경제 개발 아이디어 제공

 

슘페터가 지적한 대로 새로운 상품의 도입이나 새로운 생산 방식의 도입, 새로운 시장의 개척에 천재적 안목을 가진 기업가들은 해방과 분단의 혼란을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그들은 중국과의 정크 무역, 마카오 무역에 뛰어들어 해방의 혼란으로 인한 극심한 물자 부족 현상에 빠졌던 우리 나라에 생필품과 원자재를 공급하는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정크 무역은 중국의 천진, 대련, 청도 등지에서 중국에 주둔했던 일본군 군용 창고나 일본 상사의 창고에 보관 중이던 농산물과 화공약품, 공산품 등을 비공식 루트를 통해 한국으로 실어 오는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물자 대금으로 오징어와 말린 새우, 미역, 한천, 인삼 등을 받아 갔다. 말하자면 물물교환 형식의 원시적 무역이었던 셈이다.

 

해방 후 서해 상에서 벌어진 정크 무역의 특징은 우리 나라에 아직 관세 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밀무역이나 다름없었다. 덕분에 무역업자들은 10배가 넘는 폭리를 취할 수 있는 노다지 장사였다. 1946년 1년 동안 300여 척의 정크선이 인천항에 입항했다.(6) 싣고 오는 물자의 양이 엄청나 인천과 서울을 오가던 화물 트럭 업자인 조중훈씨가 덩달아 호황을 누리게 됐다. 이것이 훗날 한진그룹과 대한항공의 태동으로 꽃을 피운다.(7)

 

그러나 정크 무역은 마카오 무역과 홍콩 무역에 밀려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1947년 3월17일 마카오에서 영국 국적의 무역선 페어리드호가 인천항에 입항함으로써 마카오 무역 시대가 개시됐고, 그 해 8월에는 홍콩 무역선 아이비스호가 부산에 입항하여 홍콩 무역 시대가 열렸다. 홍콩과 마카오에서 온 화물선들은 시계와 양복지를 비롯해 신문용지, 생고무, 면사, 견직물, 잡화류, 페니실린, 설탕 등을 쏟아 놓았다.

 

정크 무역이 활성화되는 것과 동시에 혼란한 경제계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런 목소리는 곧 전용순(全用淳)씨가 중심이 된 조선상공회의소, 김도연(金度演)씨가 중심이 된 한국무역협회, 김용완 회장이 중심이 된 대한방직협회 등 경제단체 설립으로 이어진다.

 

조선상공회의소는 1946년 5월19일 창립총회를 거쳐 정식으로 출범했다. 초대 임원은 회두(회장)에 민규식씨, 부회두에 최순두, 이동선, 전용순, 이춘옥, 유일한 등이 선출됐다.(8) 1946년 8월1일에는 한국무역협회가 발족했다. 해방 직후부터 대부분 외국인에 의해 진행되던 무역 분야에서 자주성을 찾기 위해 출범한 단체가 곧 한국무역협회였다.(9) 당시 무역업은 사회 혼란 속에서도 그나마 활발하게 움직이던 분야였기 때문에 무역업계 리더들이 재계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뒤를 이어 1947년 4월에 대한방직협회가 출범했다. 이 단체는 GARIOA(점령지구 행정구호원조) 자금에 의한 원면 도입과 원면 배정의 필요성에 따른 실수요자들의 모임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설립회원으로는 경성방직, 조선방직 등 10개 업체가 주축을 이루었다.

 

정크 무역, 마카오 무역, 홍콩 무역이 개시되고 한편에선 경제단체들이 속속 창립되면서 우리 기업가들은 세계 경제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보세가공 아이디어를 얻어 훗날 원자재를 도입 해다 보세가공 하여 수출을 산업의 중심으로 하는 ‘수출입국’의 경제 성장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천우사의 전택보 회장이다.

 

해방 전부터 중국과 만주에 수산물을 수출하던 전택보 회장은 1947년 중국에 수출한 오징어 대금을 받기 위해 상해로 갔다. 그는 막대한 수출 대금을 수금했는데, 이를 눈치챈 국민당 군과 중국 팔로군 첩자들에게 습격을 당해 목숨이 위험하게 되자 홍콩으로 탈출했다. 마침 홍콩은 중국 본토에서 모택동 공산군에 쫓겨 홍수처럼 밀려든 피난민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전택보 회장은 물까지 수입 해다 먹어야 하는 홍콩이 몇백만의 피난민에게 일터를 제공하고도 활기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홍콩은 작은 섬이라 홍콩 내에서 직접 생산하는 원자재는 하나도 없었다. 원부자재를 모두 외국에서 수입 해다 가공 수출하는 보세가공을 통해 그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택보 회장은 홍콩의 집집마다 부녀자들이 재봉틀을 가지고 아동복이나 봉제완구,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만드는 현장을 보았다. 이런 제품들을 해외로 수출함으로써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무릎을 쳤다.

 

“홍콩 사람들도 저렇게 재봉틀로 옷을 만들어 팔아먹고 사는데, 우리라고 못할 것이 없지 않은가. 우리의 살길은 수출뿐이다”

 

그는 피난민이 들끓는 홍콩에서 보세가공을 통한 수출산업화의 꿈을 키웠다. 1959년부터 자신의 회사에 보세가공부를 두어 가발과 간단한 의류 봉제품을 가공수출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4ㆍ19 이후 장면 내각에서 꽃을 피우려다 그만 5ㆍ16 혁명을 만났다.(10)

 

해방 후 ‘국가 차원의 경제 개발’이라는 정책적 비전을 가졌던 인물은 천우사의 전택보 회장과 강원탄광의 창업자 정인욱 회장이었다. 전택보 회장이 보세가공형 수출산업으로 국가 발전을 추구했다면 정인욱 회장은 태백산 지역의 지하자원을 개발해서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비전을 가진 기업가였다.

 

일제시대 와세다 대학 채광야금과에서 수학(修學)한 정인욱 회장은 해방 공간에서 지하자원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는 해방 직후부터 미군정 관리들에게 정선-삼척-강릉을 잇는 태백산 삼각지대를 개발하여 이곳에 무진장으로 매장되어 있는 석탄․철․흑연․금 등 지하자원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석탄을 개발하여 이것을 원료로 하는 화력발전소를 건설하고, 진기를 에너지원으로 하여 산업 부흥에 시동을 건다는 구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 광업계 인사들과 함께 대한석탄공사 창립을 주도했으며, 직접 탄맥을 찾아내 강원탄광이란 회사를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원대한 구상이 이승만-장면 정권을 거쳐 박정희 시대에 이르러 태백산 종합개발 사업으로 꽃을 피운 것이다.

 

정인욱 회장은 탄광 운영에서 그치지 않고 채굴한 석탄을 이용해 연탄을 대량생산하여 전국의 각 가정에 보급했다. 그 결과 산의 나무에만 의지하던 국민들은 더 이상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하게 됐다. 그 덕에 산림녹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땔감이나 대체연료가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공권력을 동원해 단속을 하고 입산금지, 산림녹화를 외쳐야 저절로 국토가 푸르러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가들은 구호가 아닌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장작 대신 땔감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연탄을 대량 공급함으로써 더 이상 국민들이 산에 갈 필요가 없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적인 성공 사례로 인정받는 우리 나라의 산림녹화는 광부들의 목숨과 석탄을 맞바꾸는 고난 끝에 성공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