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풍금이 있던 자리 - 신경숙
다리도 안 성한 사람이 이게 무슨 짓이여!
어머니께서 한사코 말렸지만 점촌댁은 줄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마을 아주머니 몇 사람이 모여 앉아 하는 얘기로는
점촌댁이 제사장을 봐 머리에 이고 오는 중에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짐자전거를 피하려다 다리 밑으로 굴러 다리를 다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점촌댁은 그로 인해 거의 이 년 동안을 운신을 못 하셨고,
그 사이 점촌 아저씨가 다른 여자를 봤다는 것입니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해 방안에만 있느라고 뚱뚱해진 점촌 아주머니는
그 이후로 그 아픈 다리로 서서 울면서 줄넘기를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끼줄 두 줄을 뚤뚤 엮어 만든 그 줄.
지금 당신이 있는 그 도시. 제가 강사로 나가던
그 스포츠 센터의 에어로빅 저녁반 시간에 어느 날 한 중년 부인이 새로 들어왔었죠.
아! 당신께 말씀드렸지요.
첫시간 수업 도중에 폭삭 무너지며 통곡을 했다는 그 중년 부인요.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했다고 악을 썼다는 얘긴
제가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었어요.
그 이후로도 그 여인은 에어로빅 도중에 자주 주저앉아 울었지요.
"어제는 그 젊은 애가 전화를 걸어왔지 뭐예요!
남편이 나와 이혼하고 저랑 살기로 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더라니까요, 선생님."
점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길 들었을 때,
그 여인의 에어로빅이...... 할머니의 새끼줄 줄넘기와 함께,
제 가슴을 훑고 지나간 건 또...... 웬......
점촌댁, 이젠 돌아가신 점촌 할머니가 언제부터 줄넘기를 그만 두셨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후로 점촌 댁은 지금껏 홀로 살다가 이제 할머니 되셔서 가신 거예요.
사랑하는 당신.
어제대로 라면 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시겠지요?
그 여자들이 도대체 너와 무슨 관련이 있니? 하시면서.
아무리 신비스런 과거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그 과거는 그 사람들 것이다.
하물며 그 닥 엿볼 과거도 아닌 것을 왜 들여다보느냐구요.
자기 자신이 캐 낸 인생만이 값어치가 있는 거야.
무리 지어 살면서 생긴 것들을 남들은 헤치고 나오려고 하는데 넌 이상하구나,
젊은 애가 왜 꾸역꾸역 그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고 있냐......고.
어제 차마 당신께 할 수 없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그건 당신과 저를 한꺼번에 어디선가 끌어내려 구덩이에 처넣는 일만 같아,
어떻게 해서든 이 말만은 당신께 하지 않으려고
그 술집에서 당신께 발광을 부렸던 겁니다.
당신을 발로 차고, 당신의 가슴에 주먹질을 하고,
당신을 짓이기면서 대들었던 건
막 새나 오려고 하는 이 말에게 지지 않으려고 그랬던 겁니다.
창백하게 앉아만 있던 당신.
제가 이 말을 하고 나면 당신이 저를 질책하셨던 대로
당신과의 연을 남녀간의 어지러운 정쯤으로 수긍하는 셈이 되겠지요.
그래서 하지 못한 말이 있어요.
지금도......이 말을......당신께......꼭, 해야 하는가......?
몇 번이고 제 자신에게 되묻게 됩니다.
내뱉고 말면 어쩌면 당신은 저를 증오할지도 모르겠어요.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건 순식간의 일이지요.
당신이나 나나 그 두 감정이 서로 동시에 마음을 언덕 삼아 맞대고 있지 않았나요?
다만 그 동안 우리는 아주 위태롭게 사랑 쪽을 지켜 왔던 것 아닌 가요?
어쩌면 제 이 말이 증오 쪽으로 당신 마음을 돌려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 저를 용서하세요.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제 말이 모두 당신에게 오리무중일 것만 같으니,
점촌 아주머니를 혼자 살게 한 점촌 아저씨의 그 여자,
그 중년 여인으로 하여금 울면서 에어로빅을 하게 만든 그 여자......
언젠가, 우리 집...... 그래요, 우리 집이죠......
거기로 들어와 한때를 살다 간 아버지의 그 여자......
용서하십시오...... 제가...... 바로, 그 여자들 아닌 가요?
사랑하는 당신.
노여워만 마세요.
저는 그 여자를 좋아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낀 타인에 대한 사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여자가 남겨 놓은 이미지는 제게 꿈을 주었습니다.
제가 더 자라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새 학기가 시작되고 나면 담임 선생님은
개인 신상 카드를 나눠주며 기록을 해 오라 했습니다.
그 개인 신상 카드 어느 면에 장래 희망을 적어 넣는 칸이 있었지요.
장래 희망. 저는 그 칸 앞에서 오빠 볼펜을 손에 쥐고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어요.
......그 여자처럼 되고 싶다......
이것이 제 희망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 집에 와서 심어 놓고 간 일들을 구체적으로 간추려서 뭐라고 써야 하나?
이것이 고민스러워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던 것입니다.
끝끝내 그걸 간추릴 단어를 저는 그 때 알고 있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른 아이들처럼 어느 때는 은행원,
어느 때는 학교 선생님,
어느 때는 발레리나라고 써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렇게 표현되는 그때 그때의 희망들은 모두 그 여자를 지칭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우리 집에 살기 시작한 지 열흘만에 큰오빠만 빼고 모두를 끌어안아 버렸어요.
백일이 갓 지난 울 줄밖에 모르던 그네 속의 막냇동생까지요.
그 여자의 손이 닿아 제일 먼저 화사해진 게 아기 그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