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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우리의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나?

Joyfule 2020. 5. 23. 00:08

프란체스카 도너 리  /  6,25글

[6월 25일] 경무대 안 분위기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자식들 장난치다 그만두겠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 국방까지도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경찰정보는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 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고재봉 비서관을 불러 정보보고를 확인했다. 고 비서관의 보고 역시 “예상 밖으로 적군의 힘이 강해 위험하다.”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잠을 잊은 채 자정을 넘겼다. 침통한 모습에 나는 그때까지 한마디도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p.23

[26일 새벽 3시] 대통령이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속부관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걸겠다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고함쳤다. 나는 너무나 놀라 수화기를 가로막았다. 대통령은 “마미, 우리 국민이 맨손으로 죽어 가는데 사령관을 안 깨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라며 몸을 떨었다. 상대편도 미국 국민이 한 사람씩 죽을 것이라는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각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하더니 맥아더 사령관을 깨우겠다고 했다.…p.23

[26일 새벽 3시 30분] “각하, 서울을 떠나셔야겠습니다.” 신 장관이 간곡히 남하를 권유했다. “안 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 대통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문을 쾅 닫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신 장관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대통령을 뒤따라 들어가 침착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지금 같은 형편에서는 국가원수의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거라고 염려들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게 된답니다. 일단 수원까지만 내려갔다가 곧 올라오는 게 좋겠습니다.” 내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대통령은 “뭐야! 누가 마미한테 그런 소릴 하던가? 캡팅 신이냐, 아니면 치프 조야, 장이야. 아니면 만송이야. 나는 안 떠나.”하고 고함을 질렸다.…p.25

그들은 “각하, 여기서 내리십시오. 서울은 이미 빨갱이들 수중에 들어갔습니다.”라며 더 이상의 북상을 만류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계속 서울행을 고집했다. 옆에 있던 이영진 충남지사가 대통령을 부추기는 말을 했다. “한 발짝이라도 서울 가까이 계셔야 민심동요가 적어집니다. 제가 모시고 올라가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대통령도 따라서 “자네 말이 옳아. 나 서울 가겠네.”라며 응수했다. 나는 기차에서 내리려 했다. 대통령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영어로 “목숨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거야”라고 엄숙하게 말했다.…p.27

[7월 2일 오전 11시 30분] 공산군의 탱크는 미군의 공격을 받고도 끄떡 않고 밀려오는 것이었다. 때문에 미군들의 공산군 탱크에 대한 공포심만 자꾸 눈처럼 불어났다. “정신 상태야, 정신 상태! 멍청한 것들! 우리 아이들이나 경찰에게 그들이 가진 무기와 장비를 주어봐. 이처럼 후퇴하기에 바쁘진 않을 거야.” 대통령은 ‘멍청한 양코장이들’이란 말을 몇 번이고 되뇌며 책상을 주먹으로 쳤다.…p.34

[7월 14일] 14일에는 ‘현 전선 고수’라든가 ‘아군 선전’ 등의 판에 박은 듯한 전황보고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미 대사관에서 어서 빨리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다는 연락만 왔다. 그때마다 대통령은 “내가 이 이상 더 내려가지 않아야 국민의 동요가 적다”며 대구에 머물 것을 고집했다. 대사관에 대한 공식답변은 이러했지만, 실은 미군의 전의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마미, 내가 부산으로 가지 않는 것은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미군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 지금 내가 여기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까 그나마 싸우지 부산으로 갔다하면 언제 대구를 내놓을지 모를 사람들이거든.” 대통령은 낙동강이 우리 최후의 방어선이자 생명선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지사관저 식당에 앉아 모기에 시살리며 이날 밤을 꼬박 새웠다.…p.40

[7월 17일] 전투는 계속되어도 어두운 소식뿐인 것 같다. 고열에 들떠 멍멍한 속에서도 대통령의 기도는 매일 밤 내 귓전에 울렸다. “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을 적의 무자비한 포탄 속에서 보호해 주시고 죽음의 고통을 덜어 주시옵소서. 총이 없는 아이들은 오직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만으로 싸우고 있나이다. 당신의 아들들은 장하지만 희생이 너무 크옵니다. 하나님! 나는 지금 당신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기도는 절규였다.…p.43

조재천 지사부인이 콩나물에다 파를 넣고 끓여 소금으로 간을 맞춘 맑은 국물을 가져왔다. 몇 모금 마시니 속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이 국물을 아꼈다가 대통령에게 권했다. 대통령은 “마미, 당신이나 두고 마실 일이지...”하시더니 단숨에 한 대접을 몽땅 비우는 것이었다.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꾹 참았다. 내가 앓는 동안 못 적은 일들을 보충해야겠다.…p.44
 
대통령은 적이 포진하고 있는 지역에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누지 말고 국군에 투항하라”는 내용의 전단을 비행기로 살포할 것을 명령했다. 우리 측의 심리전에 당황한 적은 어린아이들이 전단을 줍는 것까지도 총으로 쏘아 감히 어느 누구도 선뜻 전단을 주우려 들지 않았다…p.45

[7월 18일] 대통령은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이곳저곳 지사관저로 옮겨 다닐 때마다 예닐곱씩이나 되는 그 댁 아이들을 일일이 껴안고 귀여워했다. 그러면서 “지사는 복도 많은 사람이야”를 연발했다. 그때마다 나는 죄스런 느낌을 가졌다. 대통령은 이내 내 안색을 살피고는 “대한민국의 청년이 모두 우리 아들이야. 마미는 수없이 많은 아들을 두었으니 할 일이 많아.”하며 위로했다.…p.47

[7월 29일] 이날 밤 대통령이 나를 불러 도쿄의 맥아더사령부로 떠나라고 했다. 거의 명령조였다. “마미, 적이 대구방어선을 뚫고 가까이 오게 되면 제일 먼저 당신을 쏘고 내가 싸움터로 나가야 돼요. 그쪽에 부탁해놓았으니 당신만은 여기를 떠나주시오.” 나는 절대로 대통령의 짐이 되지 않을 것이며, 최후까지 대통령과 함께 있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내손을 꼭 잡은 대통령이 “다시는 망명저우를 만들지 않을 거야. 우리 아이들과 같이 여기서 최후를 마칩시다.”하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창밖 멀리 떼 지어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울부짖음이 가슴 저리게 들려왔다.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애타가 찾는 소리, 끌고 온 송아지의 배고픈 울음소리며 달구지의 삐격대는 소리가 화살처럼 귀에 박힌다. 창틀을 움켜쥔 대통령의 기도도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하나님, 어찌하여 착하고 순한 우리 백성이 이런 고토을 받아야합니까? 이제 결전의 순간은 다가옵니다. 우리 한 명이 적 10명을 대적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소서….”…p.69

[8월 3일] "이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꼭 찾아뵈올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주세요."라며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결국 한국동란 중에 돌아가셨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라지 않았다.(훗날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대통령은 장례에 다녀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라 사정이 빈까지의 여비도 문제였지만, 한시라도 대통령 곁을 떠날 수 없는 상황이라 엄두를 못 냈다)…p.83


 프란체스카  도너 리

1900년 오스트리아 비엔나 교외에서 태어나 비엔나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 영어 통역사와 타자 및 속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1933년 어머니와 유럽을 여행하던 중 제네바에서 이승만 박사를 만나 이듬해 뉴욕에서 결혼했다. 1946년 이 박사와 함께 귀국하여 돈암장에서 거주하다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1948년부터 경무대로 옮겼다. 1960년부터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남편의 병간호를 하며 망명의 나날을 지냈으며, 이 박사 서거 후 비엔나로 돌아갔다. 1970년 한국으로 영구 귀국, 이화장에서 여생을 보냈다. 1992년 타계하여 동작동 국립묘지 이승만 전 대통령 곁으로 모셔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