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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천국은 언제 오는가? 2.

Joyfule 2019. 11. 27. 09:13




        9.천국은 언제 오는가? 2.





또 다른 견해로는 역사를 커다란 나선형과 같이 일련의 순환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있다. 나선의 낮은 지점에서 높은 지점으로 진행하는 데는 상하의 움직임이 있다. 그러나 각각의 상승은 약간의 상승에 불과하며 각각의 하락도 앞서의 하락보다 낮지는 않다. 상하의 동작이 반복될지라도 전체로 봐서는 상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주의의 수정론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극도의 염세주의가 있다. 이 견해는 역사의 의미를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술취한 한 마리의 파리가 다리에 잉크를 적시고 백지 위에서 비틀거리면서 그려지는 그림과 같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역사는 그 방향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신약 신학자 중의 하나인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는 역사의 종말과 목표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역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한 것이다."(역사와 종말론, p.120)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대부분의 지성들이 이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맑스주의 계통의 경제적 결정론은 유물론에 근거한 역사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 철학 자체로 어떤 운명을 고집스럽게 약속할 뿐이다. 스펭글러(Spengler)는 진보는 불가능한 것이며 역사는 불가피하게 기울어지고 퇴보하게 되어있다고 믿었다. 토인비는 문명사에서 역사 의미의 패턴과 주기를 찾고자 하는 방대한 저술을 펴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니버, 러스트, 그리고 파이퍼같은 학자들은 성서적 계시에서 역사 의미의 단서를 찾는 학문적인 연구서들을 저술했다. 이것은 참으로 심오한 문제이며, 우리는 문제의 복잡성을 한 손으로 털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는 영감받은 성서에서 기록되고 해석되어지는 하나님의 행위에서 찾아야 한다고 저자는 확신한다. 여기 기독교 신앙은 말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역사의 의미에 대한 어떤 단서를 찾지 못하고 당황케되는 경험의 미궁에 빠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행하심이 없다면, 시대의 밀물과 썰물 조류가 목적없이 영원의 모래틈을 앞뒤로 씻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기본적인 사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구속사적으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의 행위는 신이 정하신 목표로 역사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키를 장악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나는 염세주의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믿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역사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 분의 말씀 안에서 자신의 목적을 계시하신다고 믿는다. 그 목적은 무엇인가? 역사 목적의 개요를 어디서 추적할 수 있는가?


근동 지역을 두루 여행하다보면 한 때 창궐했던 문명을 묵묵히 말하고 있는 폐허더미들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거대한 기둥들이 여전히 하늘로 치솟아 있고, 그 밖의 어느 곳에서든지 거대한 흙무덤만이, 메마른 황야에 죽은 문명의 축적된 잔해들만이 흔적을 남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스핑크스와 가자의 피라밋, 페르세폴리스(페르시아 수도의 유적)의 석주들, 데베의 탑들, 이와같은 것들이 여전히 과거 이집트와 페르시아의 영광을 풍부히 입증하고 있다. 그리스 아덴의 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가보거나 로마의 재판소(Forum) 자리를 밟아보면 어느 점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1세기 문명의 그 웅장하고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 그것들은 폐허, 쓰러진 석주들, 엎드러진 상(像)들, 죽은 문명들에 불과하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나라는 흥망성쇠하는가? 거기에 어떤 목적이 있는가? 혹은 이 지구가 언젠가는 죽은 별, 달과 같이 생명이 없는 별이 되고 말것인가?


성경에 그 해답이 있다. 성경 전체의 중심 주제는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속적 역사(役事)이다. 오래전에 하나님께서는 한 작고 형편없는 민족,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한 보잘것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것은 이들을 통해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이집트, 아시리아, 칼데아 그리고 다른 고대 근동의 국가들의 의미는 이 작은 민족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해 여타 국가들의 통치자들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 민족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보호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계획을 가지시고 역사 가운데 이를 수행해나가셨다. 우리는 이를 구속사라고 말한다. 모든 고대 문학들 가운데 오직 성경만이 역사 철학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의 구속 철학이다. "때가 차매"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유대인인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행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 목적 가운데 초기 목적은 달성되었다. 그 때에 이르러서야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의 의미를 아는 단서로서 이스라엘을 한 국가로 동일시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로 구속사역을 완수했을 때,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은 복음을 거절한 이스라엘로부터 교회---복음을 받아들인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친교--로 옮겨졌다. 이것은 이스라엘 나라에 설교된 마태 복음 21:43의 주의 말씀에 의해 입증되었다.


"(마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교회가 "(벧전2:9)...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이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구속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 교회의 당면한 사명이다.


주의 승천과 영광스러운 주의 재림 사이의 역사의 궁극적 의미는 세상에서 복음의 확장과 사역에서 발견된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주께서 이 땅에 계셨던 이래 1900년 동안 하나님의 목적은 천국 복음의 역사에서 발견된다. 역사 의미의 실타래는 교회의 선교 프로그램으로 엮어졌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인류 역사의 의미를 해석하는 한 책을 찾기 위해 하늘 문서 기록을 보게 된다면, "서양사"라든가 "문명사"라든가 "대영제국의 영광"이라든가 "미국의 성장과 확장" 등을 서술한 책은 볼 수 없을 것이다. 하늘 문서 기록에는 <민족 가운데 복음의 준비와 확장>이라는 제목이 주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구속 목적만이 진척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구속받은 죄인들에게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사명을 위임하셨다. 하나님은 왜 이런 방법으로 그 목적을 수행하시는가? 그 분의 목적 수행이 실패할 커다란 위험이 있지 않은가? 1900년이 지나 지금 그 목표는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왜 하나님은 스스로 그 일을 행하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단번에 그 일을 완수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천사의 무리들을 보내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그 일을 우리에게 위임하셨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는 것을 제외하고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지 않는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사명을 맡기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하지 않는다면 이루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두려운 사실이다. 기독교회가 오늘날 가끔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 2,3세기 전에 교회 목사는 사회에서 상당한 교육을 받고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이같은 문화적인 상황 때문에 교회가 서구 사회생활 구조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때가 있었다. 그같은 시대는 꽤 오래 지속되었다. 우리는 세상이 교회를 한 구석으로 밀어제치며 우리를 못본체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종종 가진다. 교회는 세상에서 크게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유엔이 세계 문제 해결을 위해 교회를 불러들이지 않는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지도를 위해 교회의 지도자들을 거의 의존하지 않는다. 과학, 산업, 노동, 교육 등 이것들은 지혜와 지도력이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집단들이다. 교회는 무시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실제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는 영향력의 가장자리에 있다. 우리는 중앙에 당당히 서있는 대신에 주변으로 밀려난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연민에 빠져 세상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방어적 태도에 떨어져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시키려고 시도한다. 참으로 우리의 주된 관심은 자위적 본능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의 역할과 우리의 중요성을 해석하는데 있어 패배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본문 구절을 우리 마음에서 불태워보자. 하나님은 이것을 어떤 다른 사람들의 집단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은 당신이 기뻐한다면 모든 족속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교회를 통하여 전파되어져야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이것이 현대 문명과 인류 역사의 운명의 궁극적인 의미를 위해서 당신과 내가 유엔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크레믈린이나 워싱톤의 결정보다 궁극적으로 훨씬 더 중요성을 지녔다.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교회의 선교는 군대의 행진이나 세계 수도의 행위들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어지는 것은 이 선교의 성취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러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교인 것이다.


이제 이 열등의식을 다루어보자. 우리의 하찮음에 대한 자기 연민과 탄식하는 태도를 영원히 던져 버리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어떤 존재인가를 인식하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된 계획가운데 있도록 하자. 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은 모든 족속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한다. 그제서야 끝이 오게 될 것이다. 나는 기쁘다, 참으로 자랑스럽다. 교회의 한 일원이 된 것이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의 제도의 일보다 더 가장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 우리에게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삶에 영원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의미와 운명은 내 손안에 달려 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강력한 동기를 포함하고 있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본 장의 주제는 '천국은 언제 오는가?' 이다. 나는 어떤 날자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종말이 언제 오는 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이것뿐이다. 즉 교회가 세계 복음화의 과업을 완수할 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는 이렇다. 왜 그리스도께서 서기 500년에 오시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교회가 세계를 복음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리스도께서 서기 1000년에 오시지 않았는가? 교회가 세계 복음화 과업을 완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곧 오십니까? 만약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복종한다면 그분은 곧 오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진지한 현실적인 말인가! 몇몇 사람들은 주저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믿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책임을 인간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믿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과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 완수할 것을 위임하였다. 우리는 지난 어느 세대보다도 이 선교의 완성에 보다 더 가까이에 있다. 우리는 과거 사도 시대이래 모든 세대에 비해 세계 복음화의 절반을 이 마지막 세대에 행했다. 현대 과학은 인쇄, 자동차, 항공기, 라디오, 그리고 수많은 세계 복음화의 과업을 촉진시키는 도구들을 제공하고 있다. 이전에 알려지지않은 언어까지도 문자화되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적어도 1,100개이상의 언어나 방언으로 번역되어졌고 그 숫자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 도전적인 사실이 있다. 만약 영어권의 성도들이 이 본문을 가지고 정말 진지하게 도전한다면, 우리 시대에 세계 복음화의 과업을 완수하여 주의 재림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지역이 복음에 대해 개방적이 아니다. 우리는 중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인도에 들어가는 문이 닫혀지고 있다. 만약 주의 재림이 교회에 의한 세계 복음화를 기다려야 한다면, 우리 시대에 주의 재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많은 지역들이 오늘날 복음에 대해 문을 닫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그 과업을 완수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간과(看過)한 것으로 잘못된 것이다. 많은 문들이 한 순간에 닫힌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룻밤 사이에 그 닫힌 문들을 열 수도 있고 그 닫힌 문들 배후에서 역사하실 수도 있다. 에티오피아를 기억하라! 나의 관심은 닫힌 문들이 아니다. 나의 관심은 들어가지 아니한 열린 문들이다.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선교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하여 정말 신실하게 행한다면 하나님은 그 문들이 반드시 열려지도록 조치하실 것이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가 아직 들어가고 있지 아니한 넓게 열리진 많은 문들이다. 우리는 불순종의 사람이다. 우리는 세계 복음화의 정의에 대해 논쟁하며 종말론에 대하여 세세히 토론하는 반면에 세계를 복음화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은 소흘히 하고 있다.


그밖에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선교가 완수되어지는 때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과업의 성취에 우리가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는가? 어느 나라들이 복음화되었으며, 어느 나라가 아직 복음화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종말에 얼마나 가까이서 살고 있는가? 이것이 날자 설정으로 가는 것은 아닌가? 한마디로 나는 모른다. 하나님만이 그 용어들(세계 복음화, 종말 등)에 대한 정의를 아신다. 나는 "모든 족속들에게" 라는 말에 대해 정확하게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단지 하나님만이 "증거되기 위하여"(세계 복음화)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아신다.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만이 그 목적이 성취되어질 때를 아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알 필요가 없다. 나는 단지 한가지 사실만을 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다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과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과업이 성취되어질 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의 사명은 그 과업을 성취하는 것이다. 우리의 사명이 성취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지 않는다. 바삐 가서 우리의 선교를 완수하자.


우리의 책임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변화시키도록 요구받지 않았다. 이 구절의 기사가 말하는 바결론은 종말의 때 까지 많은 전쟁과 분쟁, 그리고 박해와 순교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것이 기쁘다. 이 말씀들이야말로 안정감과 건전함을 주어 나로 하여금 비실재적인 낙천주의에 빠지지 않게 한다. 우리는 악한 시대가 임할 때 실망해서는 않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가져가야 할 권능있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천국 복음이다. 이 시대를 시종일관하여 두 세력이 역사하고 있다. 즉 악의 세력과 천국 복음의 권능이다. 세계는 두 세력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 악한 자의 세력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천국 복음은 사탄의 왕국을 공격하고 있다. 이 투쟁이 시대말까지 지속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는 단지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서만이 성취될 것이다. 무조건적인 낙천주의를 취할 여지는 없다. 주님의 감람산 산상수훈은 종말의 때까지 악이 이 시대를 특징지울 것을 가르치고 있다. 거짓 선지자와 거짓 메시야들이 일어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할 것이다. 불법과 악이 성행하여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시련에 대한 인내이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행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마찬가지로 환난에 인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실상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환난과 박해에 대해 끝까지 목숨을 걸고 견디는 자만이 멸망치않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눅21: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눅21:17)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눅21: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교회는 그의 본질적 특성상 항상 순교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우리가 모든 세상에 복음을 전하게 될 때 무조건적인 성공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반대와 저항, 심지어는 박해와 순교까지라도 대비해야만 한다. 이 시대는 여전히 악하고 천국 복음에 대해 적대적이다. 그러나 단조로운 염세주주의를 취할 필요는 없다. 몇몇 예언서 연구에서 우리는 시대말, 마지막 시대는 전체적인 악(total evil)으로 특징지워질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때때로 마지막 시대의 위험한 특성을 심하게 강조하기도 한다.


"(딤후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우리가 말하는 가시적인 교회는 악의 교리에 의해 완전히 변질되어질 것이다. 배교가 교회를 휩쓸게 되어 오직 극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될 것이다. 이 시대가 마감하는 때가 이르면 전체 고백 교회는 영원에 관한 문제들에 대해 메시꺼울 정도로 무관심한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될 것이다. 그러한 마지막 시대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은 패배와 좌절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악이 여전히 지배할 것이다. 종종 이 마지막 시대의 악의 특성들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분명히, 고의적이 아니지만) 세상이 빨리 부패하면 할수록 더 빨리 주께서 재림하여 좋아질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성서가 마지막 때의 악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이미 이것을 강조해왔다. 이 시대를 특징지우는 악은 천국에 대해 반대하며 증오하는 가운데 두려울정도로 증대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염세주의에 빠져 이 시대와 세상을 악과 사탄에게 포기해야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천국 복음은 전 세계에 걸쳐 선포되어질 것이다. 천국이 이 악한 시대에 침투해왔다. 오는 시대의 권능이 이 시대를 공격하고 있다. 마지막 시대는 참으로 악한 시대일 것이다. 그러나 "(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에 구원의 복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된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다. "(행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시기 위해 말세에 성령을 부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보았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명령은 가서 전하라(선교)는 것이다.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그 때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행했던 다락방에서 모여 전전긍긍하며 두려워 떨고 있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여 목적을 달성한 유대인들이 이제 자기들을 잡아 죽이려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의 한 가운데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요20:21)....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고 하셨다.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그 사명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사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죽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것이다.


"(요20:22)....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 모습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인간을 창조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태초에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한 것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어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그들을 새롭게 사명으로 창조하시는 것은 아주 유사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음받은 최초의 사람들이 피조된 만물에 대한 책임(cultural mandate)을 가졌다면,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제자들은 영적 세계에 대한 책임(선교)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복음 증거의 사명에 필요한 능력과 권능이다.


"(창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들(제자들)은 인간적인 지혜나 말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고전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증거되는 복음이 생명의 역사(役事)를 일으키는 것이다.


"(겔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겔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37: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겔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겔37: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겔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겔37: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겔37: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겔37: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겔37: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여기 6,9절의 "생기"와 14절의 "내 신(神)"은 바로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골짜기의 가득한 "마른 뼈들"(dry bones)에게 "생기", 즉 성령이 들어감으로 "이 뼈 저 뼈가 맞아서 서로 연락하고, 힘줄이 생기며, 살이 입혀지고 가죽이 덮혀 살아났다." 이 "마른 뼈들"(dry bones)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10,11절) 나라 민족을 살리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인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성령은 죽은 것을 살리시는 생명의 영이시다.


"(고전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예수)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복음 증거의 사명을 지닌 교회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위에 임하실 때 그 사명을 위해 능력으로 덧입히울 것이며 재창조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선교이다.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의 각각 끝나는 부분을 살펴보면 모두가 다 한결같이 선교 명령을 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눅24: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눅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눅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눅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요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어주신 성령은 선교의 거룩한 주체(主體)인 것이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선교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은 오직 성령인 것이다. 선교의 역사(役事)는 인간의 역사(役事)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진리의 성령의 역사인 것이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장 강한 선교의 힘은 항상 "(고전2:4)....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교회의 모습은 선교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부활을 체험한 교회는, 부활 신앙을 가진 교회는 선교를 사명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임하여서 증거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


마지막 시대는 악할 것이나 구제불능은 아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를 위한 복음을 주셨다. 그리고 그는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다.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것이 이 악한 시대에 우리 선교의 영(靈)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복음이 세상을 정복하고 천국을 건설하는 것을 기대하는 장미빛 낙천주의자들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과업이 이 악한 시대에 직면해서 가망이 없다고 느끼는 절망적인 염세주의자들도 아니다. 우리는 현실주의자들, 성서적 현실주의자들이다. 우리는 악의 가공할 세력을 인정하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위대한 승리를 성취하는 영광가운데 재림하실 때까지 천국의 승리 쟁취를 위하여 세계 복음화의 선교를 펴나가고 있는 현실주의자들이다.


여기에 우리 선교의 동기가 있다. 최후의 승리가 우리의 과업완수를 기다리고 있다.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다른 구절이 없다. 언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가? 언제 교회는 그의 과업을 완수하는가? 이 시대는 언제 끝이 되는가? 세상은 언제 복음화되는가? "(마24:3)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 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 때는 언제인가? 그 때는 교회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선교 임무를 완수할 때이다.


당신은 정말 주의 나타나심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세계 복음화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바는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않될 선교의 대위임(大委任)(마 28:18-20)에 대한 우리의 사명이다.


"(마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천국의 복음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으로부터 권세를 빼앗았다. 천국이 사탄의 나라를 공격했다. 이 악한 시대가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오는 시대에 의해 공격당했다. 모든 권세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권세를 다시 오실 때까지 최후의 영광스런 승리가운데 나타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그 권세는 지금 그리스도의 것이다. 사탄은 지금 패배하고 있다. 사망은 정복되어지고 있다. 죄는 파괴되고 있다. 모든 권세는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 무슨 이유로? 모든 권세, 모든 권능이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우리의 과업을 완수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천국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을 통치하시며, 교회를 통해, 교회 안에서 땅을 통치하시고 있다. 우리가 선교의 과업을 완수했을 때, 그리스도는 다시 오셔서 영광가운데 천국을 건설하실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벧후3: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할 뿐만 아니라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 복음 선교이며 우리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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