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행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상의 성구들을 살펴보면 미래 천국의 축복과 생명을 '지금 여기서' 누리게 된다는 것이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부활과 그의 신성(神性)을 믿고 입술로 시인하며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과연 그 모든 천국의 축복들을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을 "천국의 요구"에서 찾아보자.
천국은 단 한 가지의 근본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즉, 결단에 대한 요구이다. 천국이 이미 가까이 왔고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역사 속에 오셨으며 심판의 영이 지금 역사(役事)하고 있는 이 때에 우리에게 단 한 가지 요구되는 것은 바로 결단이다. 불트만은 "예수께서 요구자(The Demander)로서 하나님의 가까움을 선포하셨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예수께서는 바로 회개를 요구하신 것이다. 회개의 근본 뜻은 '돌아오는 것',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 '삶의 방식을 아주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결단을 내려 천국을 영접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결단으로 이루어진다. 인생의 진로는 자신의 결단에 의해 결정된다.
도둑이 무디 선생의 전도강연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를 찾아와 자기 죄를 고백하였다.
"저는 이제부터 도둑질 해온 물건을 팔아 그것으로 장사하여 돈을 벌어 훔쳐온 주인들에게 모두 갚아 주겠습니다."
그러나 무디 선생은 이렇게 훈계하였다.
"다음에 벌어서 갚을 생각 말고 지금 있는 것으로 갚고 모자라는 것은 다음에 갚도록 하시오. 다음에 갚겠다고 했다가 만일 갚지 못하고 죽는 날에는 회개할 수 없게 될터이니 이제 곧 참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도둑은 모든 재산을 팔아서 주인들에게 돌려 주고 모자라는 것은 자기가 종이 되어 섬기겠다고 눈물로써 고백하였다. 이 때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어 장사를 하게하여 마침내 큰 사업가로 만들었다.
<고민과 황홀>이라는 소설을 쓴 어빙스턴은 "미켈란젤로가 다윗을 조각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거인 골리앗에게 도전한 씩씩하고 용감한 목자상을 성서의 기록에서 모형을 땄다."라고 했다. 미켈란젤로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언제 다윗이 거인이 되었는가? 골리앗을 죽인 다음엔가? 혹은 자기가 반드시 해보겠다고 결심한 순간인가?" 그가 결론을 내린 것은 다윗이 거인이 된 것은 살육이 아니라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의연한 결단은 가장 약한 인간을 거인으로 만든다. 사울이 바울된 것은 안디옥이나 로마에서가 아니라 다메섹에 가까운 사막의 모래 위에서 결단내렸던 순간이었다.
회개는 현세의 삶의 내용과 미래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결단인 것이다.
영국의 시인인 토마스 무어(Thomas Moore)의 작품에 <낙원>이 있는데 그 내용을 각색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앞에 책벌을 받고 세상으로 쫓겨난 한 천사가 다시 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가 풀어야 할 한 가지 과제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것을 찾는 것이었다. 세상의 시장 바닥과 골목들을 누비며 이것을 찾아 헤매다가 어느 따스한 봄날의 아침, 한 마을에 들어서게 되었다. 동네 입구에 세워진 지계표 위에서 한 아낙네가 칭얼대는 아이를 가슴에 품고 젖을 먹이고 있었다. 천사는 생각했다. "아가페 사랑의 그림자로 일컬어지는 모성애가 듬뿍 깃든 저 젖 한 방울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 젖 한 방울을 얻어 낙원 문에 다달았으나 문지기에게 거절을 당했다.
낙심 속에 또 다시 방랑 길에 오른 그가 어느 무더운 여름 한낮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한 전쟁터를 지나게 되었다. 천사는 생각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초개같이 사르는 애국지사, 그가 흘린 마지막 피 한 방울이야말로 가장 존귀할게야!" 식어가는 피 한 방울을 조심스럽게 찍어 낙원 문에 도달했으나 대답은 "아니오!" 였다.
실망을 안고 또 한 번 여행길에 오른 그가 어느 겨울날 저녁 산등성이에 서 있는 조그만 시골 교회를 들르게 되었다. 주일도 수요일도 아닌 평일 저녁, 약한 불빛 사이로 새어 나오는 사람의 말소리가 있었다. 한 노인이 제단 앞에 엎드려 통한과 함께 회개의 눈물을 쏟고 있었다. 천사는 깨달았다. "아, 바로 이것이었구나. 어머니의 젖과 애국지사가 흘린 피는 이 세상에서 더 없이 귀한 것이지만 노인의 참회하는 눈물 한 방울이야말로 낙원에서 가장 귀한 것이지!" 참회하는 노인의 눈물 한 방울을 들고가 비로소 낙원으로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다.
스펄젼도 "메마른 눈으로 천국에 올 자는 아무도 없다"(No coming to Heaven with dry eyes)라고 갈파했듯이 한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는 데는 그리스도의 보혈(寶血)과 인간의 회개하는 눈물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찾으시는 것은 죄인의 상태를 용납해서가 아니라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며 회개 후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 보시기에 부지런히 찾고 또 찾으시는 것이다. 회개하는 영혼이 이 지상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회개하는 역사야말로 천국에서는 가장 귀한 것이다.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여기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회개하는 자들을 말한다. 오직 어린양의 피로 회개하는 자들만이 그 "성", 천국에 들어갈 권세를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70명의 제자들을 각처로 보내시면서 다음과 같이 분부하셨다.
"(눅10:9)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천국이 예수님의 전권대사인 제자들을 통해 그들 각 마을에 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제자들은 그저 평범한 갈릴리 어부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을 가져다 주는 사람들이었다. 그 동네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들을 영접하므로서 천국 자체를 받을 수도 있었고 아예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절하는 것은 두려운 것이었다.
"(눅10:10)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눅10:11)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눅10: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천국이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바는 인간 의지의 응답이다. 인간은 천국을 받아 들이고 그리고 그에 복종해야만 한다. 인간은 스스로 천국의 의를 이룰 수가 없다. 천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므로서 천국의 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 단 한 가지 요구는 바로 "회개하라, 돌아서라, 그리고 결단하라, 천국을 영접하라."는 것이다. 천국을 영접하므로 생명을 얻고 축복을 받고 영생을 누리게 된다.
먼저 예수께서는 단호한 결단(Resolute decision)을 요구하셨다.
"(눅9:57)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눅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집도 권세도 특권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꺼이 따를 수 있겠는가?
"(눅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눅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여기서 보면, 천국은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이며 긴급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생명", "천국의 생명"을 확보하는 것이다.
"(눅9: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보면, 천국의 요구는 주저하거나 뒤돌아보는 것을 결코 용납치 않는다. 천국은 단호하고, 돌이킬 수 없는, 그리고 명확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혹한을 피해 남쪽으로 떠나려고 준비하는 오리떼들은 늦은 가을 밤에 모든 준비를 갖추고 파티를 마련했다. 큰 농장에 모여 곡식을 잔뜩 주워 배불리 먹으며 내일부터 펼쳐질 고통의 장도를 위해 힘을 축적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출발의 순간이 왔다. 그러나 이 때 큰 오리 한 마리가 주저하며 말했다.
"이 곡식 알들은 참 먹기가 좋으니 나는 좀 더 남아 이것을 충분히 먹고 떠나기로 했어."
다른 동료들이 떠나고 난 뒤 맛있는 곡식을 마음껏 먹은 그 오리는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다가 며칠이 지났다. 오리는 매일 습관처럼 "내일 나는 남쪽을 향해 날아야지."라고 하였다. 그러나 결행은 계속 미루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세찬 겨울 바람이 천지를 뒤덮고 더 이상 거기에 머무를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오리는 그제서야 비로소 날개를 펴고 농장 마당을 가로질러 날으려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리는 날 수가 없었다. 살이 너무 쪄서 하늘로 날아 오를 수가 없었다.
결단의 순간을 상실한 오리는 남쪽으로 향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것이다. 후회하는 오리에게 매서운 북풍만이 불어닥칠 뿐이었다.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다음으로, 천국은 극단적인 요구를 하고 있다.
"(마11:12)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 말씀에 대한 누가 복음의 해석을 보자.
"(눅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여기서 보면, 천국은 폭력과 힘이라는 용어("침입")로 표현될 정도로 극단적인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마가 복음에서도 볼 수 있다.
"(막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4) (없음) (막9: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막9:46) (없 음) (막9: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눈을 빼고 손 발을 찍어버리는 것도 불사하라는 것이다. 육신의 일부를 잘라내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죄의 뿌리를 근본적으로 빼어버려야 한다는, 다시 말하면 철저한 영적 수술이 필요하다는 단호한 의지를 종말적 심판과 연관지어 설명한 것이다. 만약 범죄한 원인을 그대로 두고 있으면 지옥의 길로 간다는 자명한 확언을 통해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며 자신이 저지른 범죄적 행동에 대해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함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판단 기준이 인간의 윤리적 노력이나 윤리적 행동이 아니라 신앙에 의한 철저한 회개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음 성구를 보자.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여기 검은 분명 폭력의 도구이다. 때로는 천국에 대한 결단이 물질이나 인간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는 고통과 아픔을 주는 검이 되어질 수도 있다.
"(눅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자기 가족, 자기 목숨까지 미워해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폭력'인 것이다.
다음, 천국은 값비싼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마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는 천국(생명, 영생, 구원)에 대한 상당히 깊은 관심과 열망을 지니고 있는 어느 부자 청년의 질문이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마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그 부자 청년의 중심을 보시고 중대한 결단에 방해가 되는 모든 소유물을 처분하고 "나를 좇으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부자 청년이 가지고 있는 부(富)를 문제삼은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있어 '장벽'을 제거하라는 뜻이다. 그 장벽이 돈, 명예, 가족, 지식 등 무엇이든지간에 천국의 요구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과감히 벗어던지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람이 가난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거짓된 안전'에서 구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마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사람들은 부의 축적이 생명을 안전 보장하고 근심 걱정을 없애주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축적된 부를 잃을까 하는 염려만 더 할 뿐이다. 가난 그 자체가 덕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천국에 복종하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라면 가난도 불사하라는 것이다. 부가 그러한 결단을 내리는데 있어 장애물이 된다면 그 부는 악한 것이다. 그 부자 청년은 자기 소유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했다. 천국은 정말 값비싼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부귀, 영화, 명예, 지위 등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통치에 부속되는 것으로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참된 축복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는 성구를 보자.
"(골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천국을 위해 살았던 사도 바울은,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고 했다. 사도 바울은 천국을 경험하고 살았기 때문에 세상적인 지위나 소유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을 체득했다.
"(빌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4: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의 만족은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에 있지 않고 바로 주님께 있었다. 천국의 축복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같은 경험들을 반드시 해야 한다. 앞선 그 부자 청년의 삶은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되어있지 않았다. 그는 천국에 대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저 그의 삶은 소유한 돈으로 살 수 있었던 '먹고 마시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제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소유'였다. 그러나 만족이 없었고 또 만족을 몰랐다. 하나님께서 문제삼는 것은 부가 아니라 그 부에 대한 '사랑'이다.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사람의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맡기면,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천국(그의 나라)을 구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더하여지리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결단은 때때로 애정의 단절이라는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삶에 있어 가족간의 애정보다 우선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분명히 가족 관계를 혹독하게 단절시키기를 원하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한 거룩한 사랑으로 이룩한 부부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 관계가 천국의 요구에 장애가 될 경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인간 관계, 가족 관계가 깨어진다하더라도 천국의 요구가 가장 우선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 관계가, 가족 관계가 인간의 생명을 궁극적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또한 영원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녀 청년들은 결혼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는 것이 자신들과 후손들을 위해 축복된 일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후에 하나님이냐, 가족이냐를 선택해야하는 값비싼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경우가 있게 된다.
다시 천국은 사람의 목숨까지도 요구하신다.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여기에 결단의 궁극적인 댓가가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질병, 사업의 문제, 남편 아내의 문제, 자녀 문제 등 이런 것이 십자가인가? 이러한 것들은 십자가가 아니라 "짐"들이다. 때때로 짐은 벗어 던져 버릴 수 있으나 십자가는 짐이 아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장소이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다른 경우를 보자.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엇을 부인한다는 것인가? 그것은 자기의 것(my-self things)을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my-self)을 부인하라는 말이다. 자기의 것을 부인하는 것(self-denial)은 자기 중심적인 것이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denial of self)은 그리스도 중심인 것이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죽음 외에는 다른 뜻이 없다. 십자가는 사형의 도구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육체적인 죽음의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언제든지 주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천국의 요구에 순응하고자 하는 사람은 목숨을 바쳐 피흘릴 각오를 가지고 이 악한 시대에 살지 않으면 안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예수를 위해 죽을 준비됨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헌신, 일사각오의 헌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남김없는 철저한 복종을 뜻한다. 자신의 생명, 의지, 욕망, 꿈, 소망 등 모든 것을 주님께 두는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 내 안에 살아 통치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으로서 근본적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 관계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가 있다면 이제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나의 생명은 나의 모든 것과 더불어 모두 주님에게 속한 것이다. 내가 나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은 것으로 간주하기까지는 예수께서 나의 삶에 통치자가 될 수 없다. 나의 삶에는 오직 하나의 통치자 밖에 있을 수 없다. 즉, 자신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냐 이다.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죽을 때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수 있다.
버뱅크(Luther Burbank)란 식물학자는 가축용 선인장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16년간 그의 손가락에서 뽑아낸 선인장 가시는 무려 1,000,000개가 넘었다고 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울어야 하고, 하나의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해 산모는 열 달 전부터 준비해야 하듯"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태초부터 희생양을 잡아야 했다.
아프리카 초원에 사는 사자의 밀도는 20평방 킬로미터에 연간 평균 40마리의 초식동물을 잡아 먹는데, 이들은 보통 10마리 전후가 집단생활을 하므로 약 400마리의 먹이가 필요하다. 이들의 먹이인 얼룩말 10마리는 연평균 3.5마리의 새끼를 생산하므로 연간 400마리의 사자에 의한 소비를 보충키 위해서는 1,200마리의 얼룩말이 필요하며, 사고와 질병에 의한 죽음까지 포함한다면 1,500마리의 초식동물이 없으면 10마리의 사자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1마리의 얼룩말은 연간 10톤의 풀을 먹음으로 약 1헥타르 면적의 초원이 필요하다.
동식물을 막론하고 생존이나 보다 나은 삶의 유지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희생이 있기 마련이다. 값비싼 삶은 값비싼 희생을 요구한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값비싼 삶은 영원한 삶이다. 영원한 죽음에 처한 인간을 영원한 삶으로 이끌기 위해 그래서 하나님은 값비싼 희생을 치루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代贖的)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결코 값싼 죽음이 아니었다. 값비싼 희생의 죽음이었다. 그것은 실로 <값없이 받는 값비싼 은혜요, 대가(代價)없이 받은 고가(高價)의 선물이었다.>
마지막으로, 천국은 영원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눅12: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눅12: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막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위의 말씀들은 천국의 요구에 대해 '지금' 내린 결단이 인간의 미래 운명을 결정하는 영원한 결단이 된다는 것이다. 은총의 하나님께서는 권능과 영광의 천국이 이 땅에 이르기 전에, 심판과 분리가 임하기 전에, 천국의 축복과 천국의 요구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우리 가운데 오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영광과 심판으로 임하시기 전에 천국의 생명과 축복들을 가져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여기서' 영접하는 결단을 내려야만 한다. 이 결단은 영원한 생명과 축복들을 '지금 여기서' 결단하는 영원한 결단이다. 천국이 이 세상에 도래했다. 내일의 생명이 오늘 지금 여기 우리들에게 제공되고 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그리고 천국 복음을 영접하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 이것이 천국의 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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