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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의 백부장(눅7:1-10)

Joyfule 2021. 8. 16. 05:50



신앙위인 - 가버나움의 백부장(눅7:1-10)            


● 신약성경을 읽는 가운데 우리는 다섯명의 백부장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하는 가버나움의 백부장,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할 때 책임자였던 백부장, 가이샤랴 이달리야대의 백부장 고넬료,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고문을 당할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백부장, 또 바울을 로마까지 호송할 때 책임을 맡았던 아구사도대의 백부장 등이 있다.

 

당시 로마의 군대는 한 개의 군단이 6천명으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한 군단을 600명씩 10대로 나누고, 이를 다시 100명 단위로 나누어, 그 100명을 지휘하는 지휘관을 백부장이라고 하였다. 한편 당시 백부장은 오늘날의 군대조직에 비교하면, 구성인원은 중대장 정도의 보직에 해당하나, 당시의 인원동원능력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의 중대장(대위)보다 월등한 지위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식민지역에서의 권한은 매우 막강한 것이었다. 그리고 백부장은 실전 경험이 가장 많은 장교였다.

 

한편 이스라엘에 주둔했던 로마군대는 대개 당시 치안 유지와 식민지 주민의 반발 진압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의 적대감은 매우 골이 깊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일은, 성경에 소개된 로마군인 백부장들은 모두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가버나움의 백부장과 고넬료 같이, 신앙을 갖게 된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신앙을 갖지 않은 백부장들도, 예를 들면,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지휘했던 백부장은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증언하는 등, 절도 있는 군인으로서, 객관적인 사실의 증언자로 등장하여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데 이바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같은 결과는, 저들이 군인으로서 철저히 규율 아래서 생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복음이 이방세계로 전파될 당시, 로마인을 비롯, 이방인들에게 대한 우호적인 태도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여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이방인 군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을 사랑하고 많은 선한 일을 베풀었으며 경건하여, 예수님의 칭찬을 크게 받은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백부장이 주둔했던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특히 많은 시간을 사역하셨던 곳으로서 신약시대 중요한 도성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지방에 속했던 가버나움은 갈릴리 해변 북서쪽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가버나움은 북부 요단강을 횡단하는 동서 무역로 상에 위치한 갈릴리 지방의 주요 성읍으로서, 일찍부터 번성한 곳이다. 그래서 예수 당시 가버나움은 갈릴리 지방의 행정 및 군사 중심지로서 세관과 로마 군대의 병영이 있었다. 헤롯 안티파스는 여기에 비유대인 군인들로 구성된 수비대를 주둔시켜 두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은 바로 그 부대의 장교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은 예수의 갈릴리 전도사역의 중심지로서 등장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초기에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해변의 이곳,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사역을 펼쳐 나가셨다.(마4:13~) 특히 가버나움은 예수가 많은 기적을 베푸신 곳으로 유명하다. 중풍병에 걸린 백부장의 종,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그 외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곳이 바로 가버나움이다. 또한 이곳에는 베드로의 집이 있었고(마8:14), 가버나움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를 부르셨으며, 예수께서 여러 가르침을 선포한 회당도 있었다.

 

이처럼, 가버나움은 예수의 갈릴리 전도사역의 중심지였고 회당이나 여러 곳에서 많은 교훈이 베풀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기적과 가르침이 베풀어졌음에도 가버나움 성읍 주민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예수께서 이 성읍의 철저한 멸망을 예언하셨으며 (마11:23,24), 오늘날 이 성읍은 그 예언대로 폐허가 되어 버려져 있다. 이렇듯 가버나움은 말씀이 이루어진 역사의 현장으로서,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일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의 말로와, 또한 예수의 말씀의 권능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 가버나움 백부장에 관한 기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곳에 소개되어 있는데, 두 복음서의 내용은 약간의 차이를 나타낸다. 즉 마태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직접 찾아와 중풍병 든 하인을 고쳐달라고 간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누가는 백부장이 백성의 장로들을 통해 예수님에게 간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마태가 사건의 세부적인 내용보다 그 중심적인 내용, 즉 백부장이 예수께 간청한 과정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간청 내용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누가는 섬세한 그의 필치의 특징에 따라 간청 과정까지도 세세히 설명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성경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기본 흐름에는 전혀 문제가 없으며, 두 복음서는 상호 보완적으로 내용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고 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을 중심으로 가버나움의 백부장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겠다.

 

(2) 먼저 2절에 보면,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중풍병 든 하인으로 나온다. 당시의 종, 하인은 한마디로 사고파는 물건에 불과했다. 따라서 어떤 인격적인 접근 자체를 기대하기 어려웠던 그런 시대였다. 그런데 성경은 그 종을 ‘백부장이 사랑하는 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백부장은 종을 하나의 인격으로, 사람으로 대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당시 로마인의 노예관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더군다나 마태복음에 따르면 총애하는 그 종의 중풍병을 고치기 위해 백부장이 직접 예수님을 찾은 것으로 묘사한다. 다시말해,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그가 살고 있는 그 시대의 가치관이나 체제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가치관을 지니고 살았던 인물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3) 그런데, 백부장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간청한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이 자신의 병든 종을 치유할 수 있는 분으로 예수님을 지목하게 된 것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 때문이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종류의 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축출하는 기사와 이적을 베풀었을 뿐 아니라 특별히 중풍병이 든 환자를 낫게 하신 적이 있었는데, 백부장이 이런 소문을 이미 듣고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매일 같이 우리 귀에는 얼마나 많은 소문이 들려오는지 모른다. 소문은 달리 표현하자면 ‘정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귀에 들려오는 소문, 정보라고 해서 모두 다 기억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니, 대부분의 정보는 한쪽 귀로 들어서 한쪽 귀로 흘려버린다. 귀로 들어와 기억에 남는 정보는 1%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소문이나 정보가 기억에 남게 될까? 그것은 마음의 귀로 들을 때 마음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소문, 정보는 남김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마련이다.

 

백부장은, 자신의 종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대부분의 로마인들이 허황된 얘기로 흘려버렸을, 나사렛 출신의 한 젊은 선지자가 일으키는 치유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5절)에 보면, 평소 그는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민족을 사랑하고, 또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기도 했다. 즉, 백부장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데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다시말해, 단순히 자신의 총애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소문이 그의 귀에 들린 것이 아니라, 평소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소문이 크게 그 마음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4)백성들의 장로들이 백부장의 사정을 예수님께 가지고 갔다. 이것은 참으로 특이한 상황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상종하는 것을 극히 꺼리고 있었다. 더군다나 백성의 장로들이라면 앞장서서 이방인과의 교제를 막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백성의 장로들이 백부장의 사정을 예수께 아뢰며 간절히 구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혹시 백부장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꺼려 하실까봐,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하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밝힌 것처럼, 백부장이 피지배 민족이었던 유대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유대인들의 삶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여호와신앙을 지원하기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기 때문에, 이로인해 그 지역 사람들의 존경과 신망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회당은 당시 성전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중요한 종교 교육기관으로서, 매일의 생활 속에서 실질적인 종교 교육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이와 같은 유대 민족 종교 교육기관인 회당을 이방인 백부장이 건축해 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서, 적어도 백부장이 유대교로 개종했을 개연성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백부장이 회당을 지어준 것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매우 인상적인 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6)이에 예수께서 백부장의 집으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이번에는 백부장이 그의 벗들을 보내어, 예수께서 친히 자신의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으며, 또한 자신이 예수님 앞에 나서는 것도 감당치 못하겠으므로, 말씀만 하시어 하인을 낫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게 된다. 백부장이 2차로 벗들을 보내게 된 정확한 계기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장로들을 보내고 난 이후에 예수께 대한 인식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먼저 백성의 장로들을 파송했을 때는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올 예정이었지만, 지금 벗들을 보낸 것은 자기 집으로 오시는 예수를 만류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백부장의 행위는 모순이 있어 보이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에게 심경의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백부장은 예수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는가? 그는 적어도 예수를 자기 집에 모시기에는 감당치 못할 분으로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백부장이 예수를 단지 병을 고치는 의원을 넘어선 분이라는 인식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여기서 ‘감당치 못하다’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낄 때 사용하는 말로, 이는 백부장이 그리스도의 거룩하심과 초월성과 자신의 무가치성을 자각했음을 시사한다.

 

(7)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7,8절은 백부장의 믿음과 겸손한 태도의 절정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백부장은 예수께서는 자신이 직접 대면할 수 없을 정도의 위엄이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은 절대적인 능력이 있어서 직접 하인을 접촉하지 않고서도 치유할 수 있는 분임을 깊이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이러한 깨달음을, 자신이 평생 몸담아 왔던 군대의 조직을 통해 예수께 설명하고 있다.

 

로마의 법으로는 로마 군인은 절대로 사유 재산이 허용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군인에게 친척이나 일가가 있다고 해도 그들이 아무도 그에게 요구를 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는 황제를 전혀 보지 못했을 것이며 그 후로도 전혀 그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황제가 삶의 중심이었으며 그가 하는 모든 행군이나 그가 행하는 모든 행동은 모두 황제의 권한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백부장은 로마 황제의 권한을 위임받은 자이므로 그 수하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복종해야만 했다. 만일 백부장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곧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백부장은 지금 이러한 인위적 명령 체계의 원리를 예수와 신앙세계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백부장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분으로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받았으며 따라서 예수의 말씀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온 우주의 참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께서 말씀만 하셔도 질병을 복종시킬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백부장의 고백은 하나님과 예수와의 관계를 완전하게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예수의 권세가 하나님의 권세와 같다는 것과 그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효력을 지녔다고 믿은 그의 믿음은 실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만이 아니라 그의 경건과 겸손, 그리고 배려성이다. 백부장은 당시 이방 세계의 대표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태도는 선민 유대인의 척도로 평가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에 충분히 합당한 사람이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도 역시 그러한 이방인을 대표한다. 그는 부활절 이후에 교회에 정식으로 받아들여진 최초의 이방인이다. 고넬료에게서 소위 가버나움의 백부장 이야기는 완성된다.

 

당시 유대인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감으로써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 자체가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백부장은 자신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오시게 한 것에 대해 너무나 송구스러웠다. 유대민족을 지배했던 지배자 로마군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족하고 누추한 존재인지를 백부장은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감히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재차 벗들을 예수께 보내어, 말씀만 해 주시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9)이에 예수께서는 저를 기이히 여기시고, 좇고 있던 무리들에게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여기서 ‘기이히 여기다’라는 말은 어떤 것을 보고 놀란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이는 예수님께 대한 백부장의 고백으로 인한 놀라움과 아울러 그의 신분이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즉 예수께서 당시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계시에 풍부했던 유대인들에게서 배척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조차 아직 이러한 믿음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당시로서 계시에서 소외되었던 이방인 백부장이 이같은 믿음을 소유한 것은 특이한 경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없었던 훌륭한 믿음이라고 칭찬하셨던 것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장면에서,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8:11,12).”고 하시며,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구원이 혈통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오로지 믿음에 근거함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구원의 보편성을 제시한 것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직접 찾아가셔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으나 이렇게 찾아오는 이방인 신자들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누가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예수님의 복음이 세상 만민을 위한 것임을 암시하고 후에 제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이방인의 구원은 절정에 달하게 된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을 자랑하면서도 복음을 거부한 교만했던 유대인들에게는 경고가 되는 말씀인 동시에 이방인들에게는 소망을 주는 말씀이라 아니할 수 없다.

 

(10) 마침내 백부장의 집에서 온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강건하여져 있었다.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의 종이 단순히 ‘나으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누가는 그가 나을 뿐만 아니라 강건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이적의 완전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이방인이었던 가버나움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생명의 복음은 유대인에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과 족속에게 열려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오히려,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의 순전한 믿음이, 종교적이지만 완악했던 유대인들의 심령과 잘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은 가버나움 백부장의 믿음에 가까운가, 유대인들의 믿음에 가까운가?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것은 이방인 백부장의 귀한 믿음이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육적으로는 이방인들이지만,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내 속에 자리잡고 있는 온갖 인간적인 생각들, 선입관념, 타성에 젖은 종교행위, 첫 사랑을 잃어버린 공허한 신앙생활, 삶과 무관한 신앙고백들...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답게, 가버나움의 백부장과 같은 순전한 믿음을 늘 새롭게 함으로써, 주님께 칭찬받을 수 있는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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