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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선의워싱턴 라이프] 비판의 기술

Joyfule 2006. 12. 24. 00:54

[강인선의워싱턴 라이프] 비판의 기술 | 삶을 말하는 낙서

 

[강인선의워싱턴 라이프] 비판의 기술

미국 대선이 결전의 날을 향해 달리는 요즘,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민주당 존 케리 후보의 TV토론을 보는 재미로 산다. 90분 동안 치열하게 맞붙는 토론은 총만 안들었다 뿐이지 ‘말로 하는 결투’라 해도 될 정도로 격렬하다.
 
부시 대통령은 원래 문법도 잘 틀리고 가끔씩 이상한 발음을 하기도 해서 놀림거리가 되곤 하는데 말 실수를 모은 책도 나왔고 웹사이트도 있다. 그래도 부시 지지자들은 이 단순무식한 어법이 박력있고 설득력있다고 주장한다. 국민들은 좀 어리숙한 지도자에게서 오히려 친근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반면 케리 후보는 길게 돌려서 말하는 버릇이 있다. 어떤 웹사이트는 케리가 들고 있던 연설문 원고와 실제로 연설한 내용이 얼마나 다른가를 비교해주곤 했는데, 케리가 워낙 조심스럽게 말하고 부연설명을 많이 해서 실제 원고보다 문장을 두 배로 늘려 말하는 것은 예사였다. 내 친구는 케리의 어법이 19세기 정치인 같아 답답하다고 해서 웃은 일이 있는데, 케리의 말은 좀 고풍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도 박식하고 경험 많은 느낌을 주는 것은 케리의 강점이다.
 
90분간 TV토론을 시청하고 나면 ‘정말 두 사람 다 말은 잘한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연설과 토론 실력이 워낙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워싱턴에 진출하면 연설전문가들에게 발성과 연설 ‘과외’를 받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미국 사람들이 말을 잘한다는 것은 한국식 ‘청산유수’가 아니라 조목조목 논리를 세워가며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전달한다는 뜻이다. 어릴 때부터 의견을 확실하게 말하도록 교육받고 자라서 그런지 웬만큼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 말을 시켜도 다들 굉장히 논리적으로 자기주장을 편다.
 
미국에서는 논쟁과 싸움의 경계가 명확하다. 비판을 인신공격으로 받아들여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것은 불문율이다. 그런 전제가 있기 때문에 더 살벌하게 비판하고 무자비하게 공격할 수 있다. 예전에 어느 한국 유학생이 몇 날 며칠을 고생해 준비한 과제물을 수업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발표했다. 교수는 신랄하게 이 학생의 주장과 연구를 비판했는데 이 학생은 교수가 자신을 친구들 앞에서 망신주었으며 가망없는 학생으로 낙인찍었다고 괴로워하며 밤새도록 술을 퍼마셨다.
 
그런데 며칠 후 학교에서 마주친 그 교수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는 내심 ‘다시는 얼굴도 안 볼 기세로 야단치더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하고 의아해했다. 수수께끼는 차차 풀렸다. 과제물에 대한 비판은 그 한 건에 대한 비판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박사논문을 쓰던 한 한국인 친구도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논문쓰기 수업에서 동료들이 서로의 글을 읽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었는데 처음에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죽고만 싶더라고 했다. 그런데 다른 미국 친구들은 동료들의 비판을 듣고 고치고 또 고쳐서 학기가 끝날 쯤에는 너무나 발전된 글을 내놓더라는 것이다. 이 친구는 그 과정을 통해 ‘비판을 발전적으로 수용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미국 연수 중에 토론수업을 들은 일이 있는데 그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비판하는 기술을 배웠다. 비판할 때는 가차없이 하더라도 상대의 좋은 점 한 가지는 반드시 지적해주라는 것이었다. 시작할 때 일단 칭찬하고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든지, 아니면 비판을 끝내면서 ‘그런데 이 점은 참 좋았다’고 말해 균형을 맞춰주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논쟁과 인신공격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토론하면서 지나치게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다가는 감정이 상해서 싸움이 되기 싶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섣불리 비판의 날을 세웠다가는 ‘불경죄’로 미운털이 박히기 십상이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할말을 다 하면 안되는 문화권’인지도 모른다. “너 말 다했어?”라고 하면 그 다음에는 진짜 싸움이 나지 않던가.
 
조선일보 특파원(insu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