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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전래와 여성 - 2. 한국에 온 여선교사들

Joyfule 2007. 1. 20. 00:47

2. 한국에 온 여선교사들

 

스크랜톤여사는 한국에 최초로 들어온 여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감리교 여성 해외선교회(Woma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Methodist Church)의 임명을 받고 아들과 함께 한국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일본에 잠시 체류하면서 한국어 공부를 하다가 먼저 입국한 아들의 연락을 받고 1885년 6월 20일 한국 땅을 밟았다.9)

 

스크랜톤 여사는 1832년 12월 9일 뉴잉글랜드 감리교 목사의 딸로 태어나서 돈독한 신앙의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으며 어려서부터 선교사업에 관심을 가졌었고, 여선교부의 총무를 지내기도 했다.

그녀는 뉴헤이븐(커네티커트주)의 제조업자인 윌리엄 T.스크랜톤 씨와 결혼하였고 바로 아들 W.B. 스크랜톤을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려 나가던 가정 주부였는데, 40세때 남편을 잃게 되었다.

그녀는 아들을 키우는 동안 평소에 뜻하던 선교사업에 힘을 기울이든 중 드디어 자신의 선교의 이념을 펴기 위해서 한국에 53세의 나이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시초로 하여 그후 많은 여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왔다. 그런데 여성을 대상으로 사업을 한 여선교사들이 중에는 정식으로 임명받아 나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선교사의 부인으로 와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부인들은 대개 오직 남편이 오기 때문에 따라 나온 여성들,오기 전에 진정으로 선교에 관심이 있어 온 여성들, 독신으로 나와서 현장에서 결혼한 여성들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중 첫째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둘째는 경우에 따라서 가끔 역할을 하며, 세째는 책임을 지고 일한다.11) 따라서 선교사 부인들은 대체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한국 여성들과 관련을 맺고 일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파커(Wm.P.Parker)여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의 책임은 우선 우리의 아이들을 잘 키우면서,우리들의 정신적 자녀들인 우리의 하인들을 잘 키우는 일이다. 훌륭하게 된 하인들 중에는 조사들, 설교가들, 선교사들이 있다.

가장 유명한 예가 이기풍 목사인데, 마페트에게 돌을 던진 이기풍 목사는 후에 스윌른(Swallen)박사의 요리사가 되었다가 후에는 신학교를 마치고 제주의 목사가 되었다.

 

그 다음 나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첫째,주일학교 일,둘째,젊은 기혼여성을 위한 학교의 책임, 세째, 교회 유치원의 관리, 네째, 여학교에서 매주 두 반을 가리키는 것들이다."12) 즉 선교사의 부인들도 여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여성들은 여성의 세기라고 알려진 19세기 여성들이 남성에게만 독점되어 있던 영역들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고 종래의 여성관이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을 때 등장한 존재들이다.

 

즉 19세기에 들어와서 여성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 여성 스스로 출산 시기와 출산 유무를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여성상들이다.

 

이런 운동들은 미국에서는 시민전쟁과 함께 일단 수그러들었는데,이 시민전쟁 동안에 생겨난 운동이 해외선교에서의 여성들의 조직운동이다.

 

여성들은 조직을 운영해나갈 여력이 없었지만, 적은 돈을 푼푼이 모아서 해외선교를 할 수 있는 액수를 만들었다. 이러한 조직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그녀들은 비기독교계에 사는 여성들에게 기독교적 지식을 전파하기 위하여 선교사들을 파송했다.13) 이렇게 파송된 여선교사들은 보다 넓어진 여성의 영역을 과감히 사용할 줄 아는 새로운 시대의 여성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