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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전래와 여성 - 3. 선교방식 및 자세

Joyfule 2007. 1. 21. 01:14

3. 선교방식 및 자세

 

여선교사들과 선교사들의 부인들이 얼마만큼 조선을 파악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들의 선교방식과 태도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개인적인 열정은 대단했으나 그 열정을 제대로 실현시키기 위한 보다 효과적인 노력을 기울였다고는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알렌의 경우 조선에 대한 별다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채 선교지로 조선을 선택했다.14)

 

더구나 근본주의적인 신앙 유형,聖,俗을 분리시키는 신앙 유형을 갖고 있던 선교사들은 피선교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전반에 대해 겸허하게 배우려는 자세보다는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푸는 입장에서 조선인을 대한 것 같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즉 그들 자신들을 단지 복음을 전달하는 전달자의 입장에 놓고 겸허하게 조선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는지는 문제로 남아 있다.

 

이를테면 조선은 그 당시 사회적으로 격동기를 겪고 있었다. 개신교가 들어오기 전, 근대화에로의 몸부림을 치는 조선인의 의지적 투쟁이었으며 여성의 지위 향상에도 계기가 되어준 동학을 언더우드 여사는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다.

 

"동학당은 여러 점에서 중국의 의화단과 비슷하다. 자기들은 죽지 않으며 총을 맞아도 다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이 조직은 빠른 속도로 온 나라에 퍼졌고 관리들은 공격했다....다른 많은 운동처럼 이것도 처음에는 여러 가지 악습과 낡은 제도들을 없애겠다는 훌륭하고도 애국적인 결단에서 출발했으나 점점 온 나라에 엄청난 죄악과 공포를 심어 나갔다. 방방곡곡에 있는 많은 악인들과 파렴치한들, 정처없이 그저 세상이 뒤바뀔 일이라면 어디에나 몸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무리들이 어떤 변화가 와도 자기들에겐 더 나쁠게 없다는 걸 알고,수없이 여기에 가담했다. 동학 무리들의 많은 수효가 산적떼와 다른 점은 오직 그 이름뿐이었다."15)

 

즉 조선사회의 진통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이 단지 외적인 현상만으로 평가하였다.

이렇게 피선교지의 현실에 어둡고, 민중의 아픔과 몸부림을 모른 체 한갖 서양인의 눈으로만 피선교지를 보고 복음을 전파할 때 복음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복음이라는 보편적인 진리가 결코 역사적 현실과 떨어져서 존재해온 것은 아니지만, 그 복음이 다른 역사적 상황에 심어지게 될 때는 이전의 역사적, 문화적 외피를 가능한 한 벗고 새롭게 전개되어 나가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유대,기독교에 입각한 서구의 문명을 복음(케리그마)과 쉽게 동일시해서 서구적인 문명을 척도로 해서 한국의 상황을 판단한 것이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우월한 입장에서 미개한 토착민들을 상대로 은혜를 베푼다는 식의 자세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토착민들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예를 들어 그들은 신앙을 갖고 성숙해져가는 한국인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주체성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게끔 허용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그들이 벌여놓은 전도사업,교육,의료사업 전체를 타의에 의해서 할 수 없이 밀려날 때까지 자신들이 장악하였고,한국인들 중에서 지도자들을 길러내어 계승시키는 작업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장병욱 씨는 조선 여선교회가 자립하려는 열망을 가졌지만 오랫동안 미 여선교부의 요람 밑에서 성장하여 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듣고 있다.

"미여선교부는 선교과정에 있어서 여성선교의 자립을 도왔다기보다는 오히려 저해하는 실수를 많이 범했다... 초창기부터 선교부의 지도적 인물을 모두 자기들만으로 구성하고 한국여성의 기용을 꺼렸다... 그리하여 일체의 조직이나 계획에서는 언제든지 도외시되어 20년이란 긴 세월을 그대로 유지하여 왔다... 선교사들은 또한 모든 선교활동, 이를테면 각종 선교행사나 기타 활동에 있어서도 그들의 허락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게 하였다... 중요 경제권을 모두 그들만이 거머잡아 한국인은 푼돈이나 얻어다 쓰는 굴소한 정책을 써왔었다."

 

"이렇게 한국인은 어떤 권리행사나 발언권이나 정책반영에 전혀 참여할 아무 권리도 없이 다만 자기교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으로 그쳤을 뿐이다. 이렇게 하기를 북감리교회는 무려 1924년까지 내려왔으니 얼마나 그들이 한국여성을 무시했나를 알 수 있다."16)

 

또한 선교사들이 이룩한 대표적 여성교육 기관인 이화에서도 아펜셀러 박사와 김활란 씨의 교체는 1939년 4월 일제의 압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김활란씨의 자전적 회고에 의하면 아펜셀러 박사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1946년 가을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는데,그때 사이가 서먹서먹하였고 함께 돌아온 선교사 선생님들까지 간혹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이 어떤 사건에 기인한 것이라고 확실히 씌어 있지는 않지만, 단둘이 마주 앉을 기회를 만들었을 때 교장자리를 다시 선생님께 드릴 뜻으로 보인 것으로 미루어보아,한국인에게 통할권을 타의반 자의반으로 내어놓고 난 후의 섭섭한 심경에서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17)

 

우월한 입장에 서서 은혜를 베푸는 식의 그들의 태도는 그들의 생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가난한 조선인들과 함께 일하면서도,그들은 고난받는 민중이 그들과 같은 존엄한 인간이요, 이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밖에서 다른 수입을 올리고 있었던 언더우드는 '백만장자의 선교사'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었다. 빈튼은 미국공사관만큼 좋고 프랑스와 독일공사관보다도 더 좋은 집을 가지고도 만족해 하지를 않았다."18)

 

사실상 선교사들 중 일부는 부를 획득하기 위해서 장사에 나서기도 하였다. 실제로 동양무역은 전도사업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선교사들 자신이 양품시장을 갖고 있었으며 선전을 통해 또는 견본을 들여와서 이 나라 사람들의 물건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다. 이 정도로 그들은 상인들과 밀착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선교사들 중의 어떤 이들은 새로운 시장을 여는데 만족하지 않고 직접 시장에 물건을 공급하고 싶어하기 까지 했다. 원산의 한 선교사는 장사를 위한 과수원을 하나 경영하고 있었으며 서울의 어떤 이는 하숙을 침으로써 여관에 대해 "분명한 손실"을 가져오게 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미국 수출업자들의 대리점을 받아들여 미국인 무역상인 타운센트 회사의 이익을 도모해 주었다. 빈튼은 재봉틀 100대를 들여왔고 언더우드는 석유,석탄, 농기구 등을 수입했다. 다른 선교사들도 이와같은 일을 했다.19)

한선교사 부인이 쓴 편지에는 자신들의 생활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반더빌트(Vanderbilt)의 부자집들에 비하면 우리가 사는 것은 수수한 편이지요. 그러나 천하다고 할 수는 없지요. 본국의 국회의원들의 생활에 비한다면 우리는 낮게 쳐서 가장 편리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봉사하기 위해 온 여기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귀족이나 백만장자들에 흡사한 생활을 합니다."20)

 

그들은 잘 사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기도 한다.
"한국인은 외국사람 집을 방문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외국인의 가정생활의 안락한 면을 경탄해마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그들은 인간의 현존생활을 좌우하고 그것을 좀더 즐겁게 해주는 종교에 대하여 깊이 생각에 잠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행복한 얼굴과 우리들이 생활을 즐겁게 누리고 있음을 보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자 합니다...이 모든 것이 우리의 종교의 결실이요 또 그 발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독교의 실제적 가치는 그들에게 강한 매력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선교사들이... 때로는 안락한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수치가 될 수 없습니다."21)

그러나 그들은 복음의 전달자로서,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종이 되셨듯이 그들 스스로를 낮추는 일을 하지 않았다.

 

물론 선교사들이 거의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1912년 간호원으로 한국에 온 서서평 선교사는 처음 얼마 동안 군산과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광주 제중병원 간호원장으로 있으면서 의료선교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었다. 굶주린 이웃을 위해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과 정성을 다 바쳤다고 한다. 가진 것을 전부 나누어 주는 서 선교사에게는 늘 가난이 따랐고 언제나 한국 사람과 같이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 1934년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집에는 밀가루 두 홉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으며 끝내 병명을 밝히지 못하여 치료도 받지 못한채,남은 육체도 의학연구에 써달라고 유언을 하였다는 것이다.22)

 

선교사 박우만(Bergman)을 따라 다니면서 전도부인을 했던 박성희 권사(1899년생)는 박우만 선교사가 얼마나 주의 일에 엄격하게 충실햇으며 전도사업만을 위해서 검소하게 헌신적인 삶을 살았는가를 강조한다.23)

 

물론 낯선 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개인적인 희생과 헌신을 전제로 하는 삶이다. 그러나 그들의 수고가 더욱 값지고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 위해서 필요한 자신을 낮추는 일에 그들은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감이 있다.

 

좋은 집과, 별장,5-6명 정도 되는 하인들 24) 그들 자녀들만이 다니는 학교들을 가진 환경 속에서 사는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어렵게 살수밖에 없었던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상당한 거리감을 주었을 것이며 자기들도 예수를 믿고 그들처럼 부자로 안락하게 살아보겠다는 욕망을 일으키게 했을 것이다. 따라서 지극히 적고 가난한 자와 자기를 동일시하시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머리 둘 곳도(마8:21)없이 사신 예수의 복음과는 거리가 먼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즉 예수를 믿으면 이웃을 위해 가난해진다기 보다는 부자가 되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앙으로 유도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