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여선교사들의 한국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
언더우드 여사는 조선여자들에 대한 인상을 다음과 같이 적어놓고 있다. "조선 여자들은 대체로 아름답지가 않다. 나는 그들을 누구못지 않게 사랑하고 내 형제처럼 여기는 사람이지만 그 일은 털어 놓아야겠다. 슬픔과 절망, 힘든 노동,질병,애정의 결핍, 무지 그리고 흔히 수줍음 때문에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그래서 스물다섯이 넘은 여자에게서 아름다움 비슷한 걸 찾는 건 헛일이다."25)
즉 언더우드 여사의 눈에 비친 한국의 여성들은 가난과 질병, 고된 삶에 시달린 모습이었다. 물론 조선의 여성들이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었다. 캠벨(Josephine P.Campbell)여사는 한국 여성을 네 계급으로,즉 양반, 중인층의 여성, 무당과 나인들, 노예들과 점쟁디들로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26)
이들 네 계급의 경제상태는 다르다. 즉 이들 중 낮은 계급에 있는 여성들은 일본이나 중국에서의 동일한 계층의 여성들과 비교도 안되게 가난하고 거칠다. 그들의 옷은 더럽기 짝이 없다. 이 여성들은 아무런 기쁨이 없으며 며느리가 들어올 때가지 힘든 일을 해야 한다. 그녀들은 30대에 이미 50대처럼 보이며 40대에 이미 거의 이가 빠져 있다.27)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하더라도 상층 계층의 여성들이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캠벨 여사가 언급한, 저 네 계층은 위로올라갈수록 은둔의 정도가 심해진다. 헐버트(H.Hulbert)는 이 은둔의 정도를 자세히 기술하는데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은둔의 정도는 심하다고 한다. "명문가의 규수들은 집안 이외의 어떠한 남자도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중류계급의 아낙네들은 양반네의 아낙네들보다는 덜 은둔되어 있지만 그래도 장옷을 걸치지 않고 거리를 다니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중류게급의 아낙네들은 '사랑'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친척들이 내실로 초대되는 경우 남자 친척들을 볼 수가 있다."28) 마지막으로 기생, 하녀,촌다니 및 요술장이들은 장옷을 걸치지 않아도 욕을 먹지는 않는다고 쓰고 있다.29)
이렇게 조선의 여성들은 계층에 관계없이 여러 이유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남성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제외되어 있는 여성들을 선교사들은 보았다. 게일(James S.Gale)은,한국 여성들은 내외 때문에 점차 인정받는 세계로부터 노예와 감옥의 세계로 사라져 갔다고 말한다.30) 그러나 비숍 여사는 한국 여성들 자신은 그러한 상태를 오히려 보호받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은둔은 몇 세기를 걸쳐 내려온 관습이며, 그들의 자유에 대한 이념은 위험하다. 따라서 나는 그녀들이 귀중한 물건들이기 때문에 잘 간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믿는다. 내가 한 지적인 여자에게 우리의 관습에 대해 말하자. 그녀는 '당신 남편들은 당신을 잘 돌보지 않는군요'라고 말하였다"31)는 것이다.
그러나 내외법이라는 것이 유교의 영향에 의해서 강화된 법이며,고려시대까지는 상당히 남녀관계가 자유로왔고 특히 고구려 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남녀관계가 문란하다는 비난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이 내외법은 조선조에 와서 고착된 관습임이 분명하며 여성의 지위에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여성을 은둔시키는 일과 더불어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이 없음도 지적하고 있다. 상층계급의 여성들은 집에서 한문 교육을 받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글을 읽을 줄 아는 한국 여성의 수는 1000명에 2명꼴밖에 안된다고 한다. 외국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은 종종 "여자들이나 배우는 글"이라고 낮추어 보며 남자들이 무시하지만,모든 여성들은 이 한글을 익히고 또 철저하게 사용한다고 했다.32)
또한 여성을 위한 교육이라는 것도 선교사들이 보기에는 결혼하여 꾸미게 될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실제에 필요한 것만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지식은 필연적으로 '우물 안의 개구리'식이며 그들로 하여금 오직 가정적인 의미에서의 남편의 반려가 되도록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33) 이 모든 것은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호받아야 될 약한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여성을 남성 아래 예속시키는 결과를 빚어대는 것이라고 한다.34)
그런데 선교사들에 의하면 이러한 상태는 기독교의 복음을 몰랐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예수는 오셔서 세상의 여자들을 자유하게 하셨다. 그분만이 그녀의 감옥 - 집을 여는 법을 알고 계신 유일한 분이다.... 이제 20세기에 들어서서 예수라는 이름이 높이 올리워졌고 모든 여성들의 자유함이 선포되었다."35) 헐버트 역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여성은 은둔은 야만민족의 난혼과 선진국가의 여성의 해방된 상태의 중간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그러한 풍속을 전자보다는 낫지만, 후자보다는 나쁘다. 서양에서 바람직한 여성의 지위를 형성시켜 준 것이 기독교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으며, 동양에서도 기독교적 가치기준을 바탕으로 하는 이념이 풍미하기 전에는 서양과 같은 풍조가 형성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극동에서 오늘날과 같은 도덕적 상황이 존속되는 한,여성의 은둔은 욕된 것이 아니라 미덕이며 몇몇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러한 풍습을 갑작스럽게 근절시킨다면 사회가 진보하기보다는 오히려 도덕적 혼미 상태에 빠지게 될른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바이다."36)
즉 한국여성의 지위는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될 때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여성해방의 흐름을 살펴볼 때, 서구의 여성들에게도 18,19세기에 들어와서야 겨우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으며, 어렵고 힘든 투쟁을 거쳐서야 비로소 참정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독교가 얼마나 작용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기독교는 서구의 가부장제 문화와 그 맥을 같이하는 반여성해방적인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했다고 여성해방론자들에게 지탄을 받아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성은 남성의 갈빗대로 만들어졌고 그래서 남성에게 순종해야 하고, 교회에서는 잠잠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여자를 의존적이고 종속적인 존재로 인식시켜 오는데 기독교는 큰 역할을 했다. 따라서 기독교의 복음으로 인해 서구의 여성관이 진보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은 선교사들이 그 당시의 정치,사회,경제, 문화 제반 사항에 대해서 그렇게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더구나 선교사들,특히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보수적인 경건주의 신앙유형을 가지고 있었고 정교분리라는 입장에 서서 교육을 했으며 세속의 차원에서는 단결된 신령상의 영혼의 안주, 네세에의 열락 등을 복음의 핵심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미국장로교의 해외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J.Brown) 은 이들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개괄하고 있었다. "한국 문호개방 이후 찾아온 전형적인 선교사는 청교도형의 사람이었다. 그는 성수주일 하기를 우리 조상들이 뉴잉글랜드에서 1세기 전에 하듯 하다. 그는 댄스나 흡연이나 카드놀이를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없는 죄로 경원한다. 신학과 성서비판에서는 사뭇 보수적이며 그리스도의 前천년왕국 재림설을 핵심적인 진리로 믿는다. 고등비판이나 자유신학은 위험한 이단이라 단죄된다."37) 이렇게 사회의 흐름에 대해서 거의 모든 방면에서 보수적이었던 그들이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진보적이었다라고는 볼 수 없다.
오늘날 여성신학자들은 성서에 나타난 복음의 내용이 2000년 동안의 가부장제 문화속에서 왜곡되어 이용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선교사들이 지니고 있던 여성관도 역시 그러한 선에서 많이 벗어났을 수는 없었을것이다. 물론기독교 역사 속에서 여성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청교도 혁명은 가장의 권위를 주장하긴 했지만 여성의 영혼도, 비록 이 세상에서의 지위는 열등해도, 신이 보기에는 남성의 영혼과 동등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청교도주의가 '인간의 개성'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제시하긴 했지만 이는 아직도 온정주의적인 선에 머물고 있었다. 여성의 지위와 "자유"의 성격을 규정하는 자는 남성 가장이었다. 초기 선교사들이 청교도주의적인 인물들이라고 볼때 그들은 대충 그런 정도의 여성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38)
물론 그들 중에는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직접 체험하여 여성의 지위에 대한 문제를 안고 있는 선교사도 있었다. 예를 들어 1921년 9월 28세로 한국에 온 의료선교사 모레리 박사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그들의 소금과 빛의 직분을 다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을 공부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카나다 장로교회에서는 여자목사가 없었고 신학교 입학도 여간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때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여러 교회지도자들을 찾아다니며 의논하였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신학교에서 여자를 받아들일지도 의문이지만 설령 받아들여 공부를 마치게 된다 하더라도 목사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모레리의 실망은 큰 것이었고 다시 기도하고 생각한 끝에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39) 그녀는 1919년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1955년에는 명예 법학박사 학위와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 정부에서 두번이나 훈장을 받았는데, 이거들을 사양하지 않은 이유는 "한국의 여성들에게 여성들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함이라고 필자에게 밝힌 일이 있다.
이러한 그들 선교사들의 의식 수준이 온건하였다. 하더라도 그 당시 한국의 상황 속에서 여성의 교육에의 기회, 일부일처제의 가족관 등은 상당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여성관에 입각해서 보다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조선여성의 상태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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