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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포로의 편지

Joyfule 2013. 6. 11. 09:54

 

 

국군포로의 편지

 

양순용. 군번 9288605. 육군 8사단 21연대 일병. 그는 그 관등성명으로 국립현충원 위패로만 존재했다. 1995년 40년 넘게 제사 모시던 가족에게 사자(死者)의 편지가 날아들기 전까지는.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중국을 거쳐 온 편지 겉봉엔 반세기 전 고향 주소가 적혀 있었다. 행여 편지 받을 사람이 없을까, 세 동생이 모두 수취인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으면 읽어달라는 피 맺힌 소원이 배 있었다.

▶양순용은 1953년 강원도 금성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혀 40년을 아오지탄광에서 일했다. 고향 주소를 잊어버릴까봐 하루 몇 번씩 되뇌었다. 진폐증으로 사위어 가던 어느 날 동생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아내가 기다리고 있으리라곤 꿈도 못 꿨다. 아내와 동생들이 사진 곁들여 답장을 보내오자 들킬까 겁나 찢어 파묻었다. 그와 가족이 3년 애쓴 끝에 양순용은 귀향했다. 북에 남은 국군 포로의 한(恨)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2001년 세상을 떴다.

 


	[만물상] 국군 포로의 편지
▶양순용은 전쟁 후 둘째로 귀환한 국군 포로다. 1994년 돌아온 국군 포로 1호 조창호도 "43년 동안 내가 살고 발붙일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다"고 했다. 그도 두고 온 자식에 대한 죄책은 씻지 못한 채 2006년 떠났다. 두 아들은 아버지 출신성분 탓에 군대도 못 가고 갖은 차별을 받았다. 아버지에게 "선택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김정일 아들이 되려 하지 조창호 아들이 되려 하겠느냐"고 했다.

▶6·25 정전 때까지 실종된 국군이 8만2000명. 정전되면서 8000여명이 송환됐고 조창호 이래 여든 명이 탈북해 돌아왔다. 이제 북에는 거친 세월 못 견뎌 500명 남짓만 살아 있을 거라고 한다. "큰형님들은 아흔 가까이 되겠는데 고향의 소식, 고향 혈육들의 생사 여부가 정말 그립습니다. 고향의 소식을 알고 죽으면 한이 없습니다." 생의 끝을 바라보는 국군 포로들이 고향에 보낸 편지가 어제 조선일보에 실렸다.

▶"귀밑머리에 흰서리가 짙어지니 더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고향이구려. 여보, 당신한테 소식 전할 면목이 없소." 정전 후 포로 교환 때 "남조선 갈 사람 나오라"고 해서 나섰다가 200여명이 학살당했다는 증언도 있다. 국군 포로의 아들은 "아버지가 인간 이하 멸시와 학대를 받으면서도 부모 형제와 고향 돌아갈 날을 피눈물로 그리며 살아오셨다"고 썼다. 어느 작가는 포로의 삶을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이라고 했다. 국가란 무엇인가. 몇 안 남은 그들마저 무의미한 무덤에 묻히게 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