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세에, 日 여자농구 꼴찌팀 감독 맡은 '한국산 우승 제조기'
지난 시즌 22戰 22敗팀'퀸 비즈'의 임영보 감독
"팀 살릴수 있는 건 당신뿐, "구단 경영진이 찾아와 퀸 비즈 맡아달라며 간청…
'키보다 발' 임영보식 훈련, 하루 7시간씩 주6일 맹연습 1주일새 11명중 6명 병원행…
두달만에 바뀐 팀 분위기, 전국대회 우승 대학팀 등 6개팀과 연습경기서 전승 관중도…
"모시모시(もしもし)?"
수화기 너머 임영보(林永甫)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젊었다. 50대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는 농구밖에 모르는 바보예요. 농구 말고는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고 잡념도 없지요. 서른 네 살 이후로는 술·담배도 안 해서 그런가 봐요. 허허." 그는 1932년생, 올해 만 81세다. 그는 커튼을 열면 후지산(富士山)이 보이는 일본 야마나시현(縣) 고후시(市)의 숙소에서 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임영보는 지난 4월 일본 여자농구 '야마나시 퀸 비즈(Queen Bees)' 감독에 선임됐다. 5월 말 이 소식이 뒤늦게 한국 언론에 보도됐다. 20~30년 전 코트에서 불같이 화를 내며 선수들을 몰아치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중장년 농구팬들은 "언제의 임영보인데 아직도 감독을 한다는 거야?"라며 놀랐다.
◇ 후지산의 고장에서 일본 여자농구 리그 꼴찌팀 조련
퀸 비즈는 일본 여자 농구에서 자타 공인의 꼴찌팀이다. 지난 시즌 1부리그 12개 팀 중 12위, 그것도 22전 22패라는 참담한 성적이었다. 주전 다섯 명의 평균 신장은 172㎝. 팀의 마스코트는 여왕벌이지만, 현실은 리그 최단신의 땅벌 팀이다. 일본 언론은 "팔순의 노감독 임영보가 야마나시 퀸 비즈를 재생(再生)시키는 임무를 맡았다"고 전했다.
임영보는 단신(短身) 팀, 그리고 꼴찌팀을 강자로 조련하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장신 센터가 없던 국민은행을 이끌고 파죽의 28연승(1986년), 시즌 무패 우승의 신화를 일궜고, 만년 약체 현대산업개발 감독 부임 넉달만에 팀을 결승에 진출시켰다(1996년). 국가대표 감독으로 1983년 브라질 세계선수권에선 한국을 4강에 올렸고, 1997년 방콕 아시아선수권에서는 9년간 중국에 뺏겼던 아시아 정상을 되찾아왔다.
예순여섯이던 1998년 무대를 일본으로 옮겨 '한국산 우승청부사'로 명성을 날렸다. 일본 여자농구 3부 리그 JAL(일본항공) 래빗을 맡은 지 2년 만에 1부 리그에 올려놓더니 2005년엔 마침내 우승을 거머쥐었다. JAL 래빗의 이야기는 일본에서 소설('날아라 래빗')과 영화('플라잉 래빗')로도 만들어졌다. 아쉽게도 JAL 래빗은 그런 신화를 뒤로하고 2010년 경영난 때문에 해산했다. 팀 해체 후 임영보는 니가타현(縣)에서 초중고 지도자를 가르치는 순회코치 일을 했다.
야마나시 퀸 비즈 경영진이 야인(野人) 임영보를 찾아온 건 지난 3월 초였다. 그들은 "야마나시 주민들이 '차라리 팀을 해산하라'며 들끓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퀸 비즈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다. 당신이 안 맡겠다면 차라리 문을 닫겠다"고 말했다. 임영보는 그렇게 해서 후지산의 고장 야마나시에서 또 한 번의 꼴찌 팀 갱생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야마나시현에선 그에게 체육관 옆 방 3칸짜리 아파트를 마련해줬다. 창을 열면 후지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하지만 퀸 비즈의 경기력은 그가 눈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였다. 임 감독은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1980~90년대 한국의 여고 상위권 팀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훈련 첫날 임영보는 선수들에게 "우리는 가족이다. 너희는 내 자식"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주 6일, 하루 7시간 임영보식 스파르타 훈련이 시작됐다. 단 일주일 만에 11명의 선수 중 6명이 병원에 실려갔다. 발바닥에 대형 물집이 잡혀 메스로 잘라내야 했던 것.
감독 취임 한 달 만에 첫 연습경기가 열렸다. 상대는 전국 대회를 제패한 도쿄의 한 여자대학 팀. 임영보가 감독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찾아와 경기를 청한 것이다.
결과는 100대60, 야마나시 퀸 비즈의 압승. 경기를 구경한 1000여명의 주민도 놀라고 임영보도 놀랐다. 지금까지 지역팀과 연습경기 6전 전승. 오는 11월 개막하는 2013-2014 시즌 퀸 비즈의 목표는 4승, 그리고 탈꼴찌. 임영보는 "선수들에게 이기는 맛을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임영보 감독(가운데)이 야마나시 퀸 비즈 선수들과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누가봐도 80대 노인이라고 믿기 힘든 외모다. 그는“술·담배를 하지 않고
오로지 농구만 생각하는 단순한 생활 덕분”이라며 웃었다.
/야마나시 퀸비즈 제공
◇ 한국 프로감독 시절 '욕쟁이' '독종'
젊은 시절 임영보는 '욕쟁이' '독종' '호랑이'로 불렸다. 느슨한 플레이를 펼치거나 실수를 하는 선수들을 가차없이 욕하고 때로 뺨을 올려붙이는 혹독함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논란거리였다. 국민은행 감독 시절 작전타임 때 선수들에게 '씹○' 같은 육두문자를 퍼붓는 장면이 그대로 생중계돼 구단에 항의전화가 빗발치기도 했다. 길을 갈 때면 그를 알아본 여성들이 "감독님 제발 욕 좀 그만하세요"라고 호소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임영보는 6.25 때 인민군으로 내려와 잡힌 반공포로 출신이다. 한국에선 학연, 지연, 혈연이 없었던 그는 "키 크고 실력 좋은 팀의 지도자 자리는 늘 명문 사립대 출신들의 몫이었다"며 "내게 손을 내미는 팀들은 장신이 없는 약체, 잘막잘막한 단신들로 이뤄진 팀이었다"고 말했다.
농구계의 비주류일 수밖에 없었던 임영보는 주류에 밟혀 사라지지 않으려 목숨 걸고 승부를 했다. 그가 의지한 것은 스타플레이어보다 팀워크, 키보다 발을 믿는 임영보 스타일이었다. 그건 일종의 생존 본능이었다. 그러면서 꼴찌 팀을 살리는 그만의 노하우가 생겨났다.
첫째, 몸싸움에 밀려 넘어지는 선수는 용납하지 않았다. 연습이든 실제 경기든 부딪쳐 넘어지는 선수는 무조건 경기에서 빼버렸다. 투지로 무장된 선수들은 오뚝이처럼 변했다. 임영보는 "우리하고 경기하는 날에는 상대 팀 선수들이 몇시간씩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나설 정도였다"고 말했다. 힘들 때 일부러 농구화 끈을 풀어 한 템포 쉬어가는 식의 플레이도 그는 '나약한 모습'이라며 싫어했다. 그래서 선수들의 농구화 끈을 테이프로 아예 발라버렸다.
둘째, 발바닥 굳은살이 생길 때까지 선수들을 몰아붙였다. 그는 리바운드 안 잡고, 수비 안 하고, 속공 찬스에서 안 뛰고, 자기 잘못을 남한테 떠넘기는 것을 저주했다. 임영보의 응징을 피하기 위해 선수들은 뛰고 또 뛰었다. 현대산업개발에서 뛰었던 전주원 춘천 우리은행 한새농구단 코치는 "여러 감독님을 겪었지만 발바닥에 굳은살이 박인 건 임 감독님 때뿐이었다"고 말했다. 임영보식 뛰는 농구는 1983년 진월방(陳月芳, 2m10㎝)의 중공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1997년 정하이샤(鄭海霞, 2m4㎝)의 중국을 잡는 데 성공했다.
셋째, 선수들이 이해 못 하는 플레이를 강요하지 않았다. 임영보는 "아무리 좋은 작전도 선수들이 납득하지 못하면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꼴찌 팀일수록 감독의 욕심만 앞선 죽은 작전들이 많다"고 말했다. 호랑이 같은 그도 작전을 설명할 때만큼은 최대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올해로 일본 생활 16년째인 임영보는 서울의 부인과 3남 1녀, 다섯 손주와 떨어져 홀로 생활하고 있다. 그는 "나도 할아버지 노릇을 하고 싶다. 하지만 농구만 생각하면 외로울 틈이 없다"고 말했다. 팔순이 되도록 굳이 이국 땅에서라도 현역으로 뛰는 이유는 뭘까? 그는 "돈이 필요한 건 아니다"고 했다. 임영보가 JAL 감독으로 옮길 때 계약 조건이 3년간 연봉 2000만엔(당시 환율로 약 2억6000만원)이었다. 일본 여자농구 사상 최고액이었고, 당시 한국 프로야구 최고연봉 1억2200만원(LG 투수 김용수)의 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그는 "농구는 내게 밥이자 꿈이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전부"라고 말한다.
◇반공포로 출신… 군에서 농구 배워
황해도 해주에서 나고 자란 임영보는 해주동중을 거쳐 1950년 4월 해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작가가 되길 소망했던 그는 6.25전쟁이 터지면서 인민군으로 징집됐다. 서해로 탈출해 국군에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그가 보내진 곳은 포로수용소가 아니라 서해안의 비정규 유격부대 '동키부대'였다. 임영보는 "이북에 잠입했다가 수류탄이 터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말했다. 부상당한 몸으로 북한을 탈출한 그는 다시 포로 신분으로 거제도에 보내졌다. 거기서 1년을 보낸 뒤, 반공포로로 석방됐다.
고향에 남았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후일 전해들었다. 4대 독자였던 그는 남북 어디에도 피붙이 하나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휴전 뒤 임영보는 오직 밥을 먹기 위해 하사관(현 부사관)에 자원, 26사단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항상 배가 고팠던 그 시절 어느날. 밥이 남아서 버리는 텐트를 봤다. '뭐하는 데냐'고 물었더니 사단 농구부라고 했다. 러닝슛을 잘하면 선수가 될 수 있다길래 돌멩이를 공 삼고 전봇대를 농구대 삼아 사흘 밤을 연습해 테스트를 통과했다."
재능이 있었던지 한국운수주식회사(현 대한통운)에 스카우트됐고, 국가대표에도 뽑혔다. 뜻하지 않은 무릎 부상 때문에 서른 살에 은퇴하고, 수도여고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올해로 감독 51년차인 그가 생각하는 리더십의 요체는 인격, 지식, 그리고 두려움이다. 그는 "선수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리더는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임영보는 "은퇴는 없다. 관에 들어가면 그게 은퇴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앉아서 작전 지시를 한 적이 없다. 만약 내가 앉아서 작전 지시를 하게 된다면 그때 '임영보는 끝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이길성 기자 2013.06.0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07/201306070199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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