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농민신문 수필부문 신춘당선작]
귀소 / 고경숙
기왓장 사이로 솟을대문이 보인다. 처마도 마른 속을 드러내며 삭아내리는 중이다.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던 높은 담벼락 위로 시든 풀만 흐느적거린다. 지키고 감출 것이 그렇게 많았을까. 돌담을 겹쳐 두른 중문을 지나면 귀면와가 두 눈을 부라리며 허공을 노려보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과 행랑채가 일가를 이루고 일찌감치 풍화에 들었다. 창살문 하나에도 꼼꼼하게 치장을 하고, 대청난간을 기어오르는 당초덩굴을 안으로 깊게 파 궁굴린 솜씨가 섬세하고 미려하다. 세월을 탁마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지난날 융성하던 가문의 권세를 다시 보는 듯하다.
지리산 가는 길에 팻말을 보고 찾아 든 집이다. 주인 떠난 집을 말없이 지키던 담장을 돌아 유유히 고샅길을 빠져나가는 바람까지도 고색이 짙다. 놋대야 속살같이 어른대는 햇살 고인 대청마루에 걸터앉으니 소슬한 기운이 와락 달려든다. 살고 있는 터를 벗어나 오랜 집에 안기니 옛 사람이 된 듯하다.
겹겹이 쌓인 적요를 씻어내리는 듯 댓잎 서걱이는 소리가 웃음소리, 한숨소리 되어 굳게 걸어 잠근 방문마다 문고리를 잡아끈다. 마당가에는 운동화 한 짝이 뒹굴고, 녹물을 뒤집어쓴 농기구들도 어지러이 널려 있다. 주인 떠난 뒤 누군가 지키다 뒤따라 간 모양이다.
빈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다. 푸름을 떨군 구근(球根)류나 물고기가 놀 수 없는 강도 빈집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언젠가는 생명을 품어 키울 수 있기에 폐가와는 다르다. 폐가는 사람의 체취가 가신, 붕괴 직전의 어둠만이 진을 치는 집이다. 시류에 휩싸여 유폐되었다가 느닷없이 몰락하여 다시 올 수 없는 이미 자연으로 돌아간 집이다. 문짝이 부서지고 거미줄이 웅성거리는 집은 을씨년스럽고 황량하다.
빈집은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지만 비어 있는 이유가 있는 집이다. 숨길 것도 새삼스레 감출 것도 없다는 듯 묵묵히 세월을 견뎌낸 집이다. 도시로 자식들을 떠나 보내고 홀로 집을 지키던 노인들마저 세상을 등졌거나 가솔을 이끌고 도회로 나갔지만 '언젠가는 돌아와야지` 하며 비워둔 경우들이다. 잠시 삶의 무늬가 흐려지고 호기심에서 비꼈을 뿐, 그 집에는 사람의 체온이 머물고 다시 만날 기다림이 있다. 집을 손질하던 이들을 떠나 보내면서 안타까움으로 아예 말문을 닫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따끈한 구들목의 온기가 그리워 견고한 적막만이 설렁설렁 담장을 넘는 그런 집이다.
집도 사람처럼 나이를 먹으면서 늙어간다. 당차게 뻗은 용마루 너머로 빈 밭이 보인다. 너저분한 밭머리에서 자연으로 회귀하는 작물들의 질서를 지켜본다. 마당이 텃밭으로 변했을 숱한 시간을 점치며 내 삶의 자국도 헤아린다. 거두어진 자연은 뒷모습조차 편안하다. 이제는 설렁줄을 흔들며 호통을 칠 주인은 없다. 모서리가 닳은 섬돌 아래서 머리를 연신 조아리는 행랑아범의 몸짓만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집안 구석구석 사람의 흔적이 묻어나지만 그것은 정지된 시간 속으로 함몰하는 쇠잔한 기운일 따름이다. 수많은 통과의례를 거친 집은 오랜 체념의 시간들이 서럽고 공허하다.
창호지가 찢겨져 나간 구멍으로 안방을 기웃거린다. 괘종시계조차도 숨소리를 죽이며 옛집으로 돌아와 머리를 맞대고 있는 방안에는 어둠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불끈 어둠을 움켜쥐자 봉인된 어둠들이 흩어진다. 곳간에는 큰 무쇠 자물통이 채워져 있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욕망의 흔적으로 다가서는 곳이다. 한때의 부귀와 재물을 엄중히 단속했을 공간이다.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쿵쾅거리는 소리에 놀란 어둠이 목덜미를 일으켜 세운다.
먼지를 그득 담은 덩치 큰 배불뚝이 독이며 쌀 뒤주도 인기척에 움츠렸을 것이다. 손때 묻은 세간을 곳간에 집어넣고 아쉬운 듯 몇 번을 뒤돌아보는 사람들의 가는 길이 눈에 잡히는 듯하다. 지금은 굳게 닫혀 있지만 언젠가는 또다시 부지런한 손길로 바쁘게 여닫을 곳간이라고 자물통은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허물어진 장독대 옆에 앵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키가 작지만 밑 둥치가 혹처럼 불거진 것이 나무의 세월을 말해 준다. 집의 역사를 나무가 대신한다. 장독대 옆에는 해마다 봉숭아꽃도 피웠을 것 같다.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상히 기억하는 나무, 교감(交感)이란 그래서 따스한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때깔을 벗고 나목으로 섰을 앵두나무가 텅 빈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묵은 집과는 막역한 사이로 보인다. 열매 맺는 나무의 생애가 인생과 참으로 닮아 있는 것이 아닌가. 메마른 가지에 와 닿는 칼바람에도 끄떡하지 않는 나목이나 사람의 체온이 가신 집에 깃드는 한량없는 쓸쓸함. 나무는 동면에 들고, 집은 참선에 들어 새로이 꽃을 피울 것이리라. 봄을 기다리는 마당가 앵두나무처럼 먼지는 웃으며 들어설 주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먼지가 대신 집을 지키고 있다. 집안 곳곳에 수북이 쌓여 주인인 양 길손을 맞는다. 빨랫줄에 빨래가 널리지 않을 때부터 축적된 시간이다. 바람이 이따금 기척을 내지만 꿈쩍을 않다가도 사람이 들어서면 얼른 일어선다. 그래서인지 텅 비어 있지만 꽉 찬 느낌이다. 새들도 날아와 지저귀고, 꽃씨를 뿌리지 않아도 꽃은 핀다. 해와 달도 쉬었다 가고, 밤하늘의 별을 어루만지며 제 허전함을 채울 줄도 안다. 도마소리, 솥뚜껑 여닫는 소리, 설거지 소리 끊긴 이후로 빈 굴뚝의 연기마저 자취를 감췄다. 나뭇가지를 훑는 소슬바람까지도 그것은 고스란히 껴안는다.
먼지는 그 집을 스쳐간 사람들의 말이며 생각이며 흔적이다. 새털보다 가벼운 먼지의 입자 속에는 추억으로 일궈 낸 삶의 궤적이 지층을 이룬다. 안주인의 손길이라도 기다리는 듯 미동을 않다가도 살창으로 스며든 햇살에 반가운 듯 나서지만 여간해서 흔들리지 않는 먼지야말로 빈집을 지키는 주인이다. 먼지가 사라지는 날, 이 집의 적막도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으리라.
온전하게 비울 때 마음은 자유로워진다. 빈집, 빈독, 빈손, 빈말, 빈 마음 이런 언어들 속에는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로 존재하는 허허로움이 내포되어 있다. 일몰 무렵 소멸을 꿈꾸는 노을에 나를 내맡기고, 깊은 심연으로부터 차오르는 어둠을 응시하면서 나를 비우는 연습을 한다. 비움은 또 다른 채움 아닌가. 여백이 가득 찬 빈집에 서면 어지럽고 뒤숭숭하던 마음이 비로소 여유를 찾는다. 옛정을 그리는 기다림과 무소유를 지향하는 여백이 향기되어 비어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위안을 얻는다.
지나는 바람도 마당에 이르면 일부러 덜컹거리며 큰 소리로 제 있는 곳을 알리는가. 풀벌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집의 마음을 먼지는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엷은 기척으로도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다. 뿌연 먼지로 창궐하는 빈집을 휩싸고 도는 정겨운 바람소리를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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