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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 속의 남자 / 김귀선

Joyfule 2015. 11. 18. 18:59

 데코 엠보싱화장지 60m*30롤

 비닐 속의 남자 / 김귀선

 

 

야야 신랑 출근하고 없는 거 맞제. 오늘은 일찍 볼 일 없으머 설거지 있다 하고 내캉 수다나 좀 떨자. 요런 얘기 아무한테나 할 수도 없고 그냥 있을라카이 자꾸 입이 간지러버서 호호 너거 신랑 대문 나서는 시간만 기다렸다 아이가. 애달구로 전화는 와 그리 빨리 안 받노. 벌시러 니도 집 나가 뿐 줄 알았다. 급하기는 결론부터 말해뿔면 재미없제. 잘 들어보라카이. 

 어제 내가 아는 집에 집들이 간다고 안카더나. 그래가 우리 집 앞에 높은 건물 일층에 있는 마트 알제. 그기서 휴지를 샀거덩. 같이 갈 언니야들이 제일 존 거 사라고 해서 30롤짜리 중에도 최고급으로 샀다 아이가.

 

 약속 시간을 기다리는데 화장실이 가고 싶대. 우야겠노. 할 수 없이 휴지 박스를 들고 건물 공동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 일을 봤거덩. 근데 참말로 황당해가. 와 그 고급 화장실에 휴지가 없겠노. 아무리 둘러봐도 휴지가 안 보이는 기라. 내 가방속을 훌러덩 뒤집어 봐도 휴지 빈껍데기만 있고 하이구 사람 난감하게 하대.

 

 그땐 화장실에 오는 사람도 그케 없노. 혹 부탁할 사람이라도 오나 카미 문 쪽으로 걸어가서는 밖을 내다보느라 구부렸다 섰다를 몇 번이나 했제. 쩔쩔매고 있는 아줌마를 한번 상상해봐라. 그것도 궁디에 바지 반쯤 걸친 채 어거정거리며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을. 하이구 그케 우습나. 숨 넘어 가겠다. 야야 혼자 있으믄 무슨 짓을 못하겠노 안그렇나. 니가 지금 넘어가싸미 웃는 기 무신 뜻이겠노 참말로. 우스븐게 문제가 아이고 바로 내 코 앞에

‘3겹 에어 엠보싱. 도톰하고 부드러워요.’

라고 쓰인 30롤 짜리 최고급 휴지가 한 박스나 있다는 거 아이가. 참내 그럴 땐 우째야 되겠노. 뻐이 보고서도 쓸 수 없는 그 심정이 어떻겠노.

 

 급했으면 찜찜해도 그냥 바지 후다닥 올리고 나갈 낀데 시간까지 넉넉하니 미련이 자꾸 생기는 거 있제. 변기에 천연덕스럽게 걸터 앉아가 저 비닐속의 휴지를 감쪽같이 조금만 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하고 고거마 생각해지더라카이. 맨 손으로 표시 안 나게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무리 봐도 없는 기라. 고마 고때는 면도칼이 있었으믄 딱 좋겠더라 아이가. 표시 없이 싸악 그어서는 몰래 좀 빼 쓰고는 바로 옆 마트에 가서 유리 테이프 있잖아. 고거로 싹 붙이 뿔면 표시 항개도 안 나는데. 근데 면도칼이 있을 리 만무하제.

 

 우예 뜯어볼까 하고 비닐 박스를 뒤집어도 봤데이. 그기도 안되겠더라. 밑바닥을 넓게 겹치게 봉해 놔서 뜯다가는 비닐이 늘어나 우글렁해져서 금방 표시가 또 나겠더라카이. 뾰족한 방법이 없으면서도 이래저래 잘하면 뭔가 우찌 될 것도 같으까내 점점 애만 다는 거 있제. 희얀하대 그만한 일로 가슴까지 답답해질라 카더라카이.

 

 아이구 니 말따나 까짓꺼 고마 확 뜯어 써 뿔 수도 있제. 말은 그캐도 니도 당해봐라 그래 되는 강. 휴지 몇 조각 쓰자고 그 큰 박스를 건드리기엔 갈등이 일어나더라 야야. 그케되믄 휴지를 다시 사야하고 헐은 박스는 종일 들고 다니든지, 아이면 집에까지 갖다 놓든지 해야 하는데 일이 복잡하게 된다 아이가. 그기 다가 아이고 우리 집 화장실에는 휴지 당기면 두루룩 소리나는 뚱그런 큰 롤 있제 그거 쓰이까내 그냥 휴지는 쓸 데가 없거덩. 집 복잡한데 글거치기만 하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미 멍하게 해가 비닐 박스만 쳐다보고 있었데이. 그카는데 참말로 비닐 안의 휴지가 와 남자 얼굴로 보이겠노. 내가 니한테 안달하며 전화하고 싶은 이유가 바로 요거라카이. 아이구 희얀하게 꼭 맞더라. 마음에 들어도 함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외간 남자 있잖아. 니도 보이 그렇제. 내숭떨지 말고 곰곰이 한번 생각해 바라. 상상하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아이가. 야야 우리 신랑들도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예 알끼고. 자기들은 카면서 마누라 이런 생각하는 거 알머 또 찜찜해 카겠제. 그러이까내 요런 말은 남편하고 아무리 편한 사이라 해도 함부로 말하믄 괜히 빌미 주는거 되겠더라 카이. 그래서 사람마다 할 얘기가 따로 있는기라. 안글나? 내 말 맞제.

 

 어제 화장실에 앉아 비닐 속에 든 휴지를 보는 기 그거 있잖아 한 번 정 주고 싶은 사람 있어도 뒷일 겁이나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꼴이더라 카이. 하기사 마음 가는 남자 있으면 무작정 연애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칼날에 묻은 꿀을 혀끝으로 핥아 먹는 일이다 아이가. 니도 알잖아. 연애하다가 고마 들키가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얼마 전에 이혼 당한 걔 알제. 한참 동안 신랑이랑 사니 못사니 시끄러웠잖아. 지는 죽어도 그런 일 안할 것처럼 중년 사랑 이야기 나오면 펄쩍 뛰더니 나중엔 머 진정한 사랑 운운하면서 애인 자랑까지 하고 안그래샀터나. 하기사 연애하는 기 죄가 아니고 들키는 기 죄라 카더라만도. 어쨌든 뒷일 복잡한 것 알면서 그 친구처럼 덤벙 달라 들어 연애할 수 없는 기 그 땜이제. 내가 어제 처한 상황이 꼭 그 축소판이더라카이. 머? 내가 실제 그런 상황에 처한 것은 아니냐고.

 

 니도 생각해 바라. 일태로 결혼 후에 연애하고 싶은 적 한 번도 없었다 카머 그 여자는 솔직하지 않는 거 맞제. 꼭 불륜 이야기만 말하는기 아이다 카이. 가능성을 떠나서 미남 배우 보면 저 남자랑 한 번 가까이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잖아. 어제 내 앞의 휴지에 비하자면 이 나이에 젊은 미남 배우 운운하는 건 방탄유리 속에 든 휴지를 탐내는 정도 아니겠나. 하하 문제는 비닐이라는 것이제. 비닐 속의 남자라는 말이 무신 뜻인지 대강 감이 잡히제. 갈등은 가능성이 있을 때 하는 거라 안카나.

 

 파란 꽃무늬 다문다문 찍힌 휴지가 어제 얼마나 나를 애달구는지. 언제든지 꺼내 주기만 하면 술술 풀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고급휴지는 또 마무리 부분도 와 그래 쉽게 풀리도록 해놔겠노. 우째 표시 없이 비닐을 자를 수만 있다면 양심에 쪼매 찔리기는 하지만, 간절히도 필요한 고 때 조금만 쓸 수 있을 건데. 생각해 바라. 답답하던 가슴도 확 안 풀리겠나. 순간이지만, 기분은 참말로 달콤하겠제.

 

 그라고 보면 우리 중년 주위는 비닐 속의 남자가 수두룩한기라. 하하 어제 그 상황에 니 같으믄 우째했겠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