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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소묘 / 이정순

Joyfule 2015. 11. 12. 08:39

 

[제4회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

 

인생 소묘 / 이정순

 

부산취미미술 홍원화실 배내골야외스케치 율리아님 그림 그리는 풍경

 

손끝에 느껴져 오는 매끈한 촉감이 살갑다. 아득한 욕망의 해바라기로 칙칙해진 영혼을 벗겨내듯 안간힘을 주며 나무 표면을 문지른다. 여러 차례의 사포질에 떨어져 내리는 지저깨비들이 고운 채에 받힌 밀가루마냥 흩날린다.

한나절에 걸쳐 두껍게 덧칠된 껍질을 걷어내는 작업을 하고 나니 정맥 같은 나뭇결을 내보인 투명한 속살이 정오의 햇살에 눈부시다. 나에게도 봄날 아지랑이처럼 아스라한 실핏줄이 드러나 보이던, 때 묻지 않은 영혼을 지닌 시절이 있었다.

 

 오래 부려먹어 낡은 식탁을 버릴까 고민하다가 리폼해서 쓰기로 마음을 굳혔다. 재료가 괜찮은 원목에다가 내 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벗이기도 하다. 어쭙잖은 글을 긁적거릴 땐 책상도 되어주고, 이것저것 다양한 공예 작업을 할 때는 작업대로도 쓰였다가, 때를 놓친 식사 시간에도 기꺼이 동행해 준 묵은 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말라붙은 물감으로 더께가 진 작업복 차림에 장갑과 연장으로 무장한다. 그 모습이 흡사 전의로 가득 찬 여 전사 같다. 우선 식탁을 몸체와 다리로 분리한 후 군데군데 긁히고 흠집 난 표면을 사포질로 깔끔하게 정리한다. 나무와 사포가 강렬하게 스칠 때는 두꺼운 장갑 속으로도 마찰의 열기가 스며들어 화끈거렸다. 몸부림 같은 사포질 속에는 매번 엇박자로 휘두르고 지나가던 세월의 횡포에 어긋난 삶의 궤적을 감쪽같이 지우고 싶은 바람도 있었으리라.

 

 낡아 일그러진 문양과 표면을 말끔히 벗겨내고 보니 나무 자체의 담백함이 그대로도 번듯하다. 단순한 것에서 가장 비범한 가치를 얻을 수 있다고 했던가. 삶의 현란한 무늬와 미끈한 교어에 포장되지 않은 맑은 영혼이 우러나 투명한 얼굴에 빛이 나던 푸른 시절처럼.

 묵은 회한을 쓸어내듯 찌꺼기들을 털고 초벌작업으로 결이 고와진 가구에 착색을 도와주는 보조제를 덧바른다. 어린 시절, 영혼의 곳간에 내재된 반듯한 기억들이 한 생을 그려 가는 데 있어서 튼실한 밑거름이 되듯이 보조제를 충실히 머금은 재료는 오랫동안 고운 색감을 선사할 것이다.

 

 밑칠이 끝난 재료에 포크아트(Folk art) 기법으로 문양과 색감을 입히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포크아트는 16~17세기 경 유럽 등지의 일반계층에서 여가 시간을 이용해 옛 가구나 낡은 집기에 고풍스런 그림을 그려서 장식하던 것이다. 잔손질을 많이 요하는 작업이지만 오래된 생활 용품에 생명을 불어넣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탄생시키는 실용적인 예술이다.

 이제 새 옷을 입은 바탕에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손끝에 기댄 연필이 한껏 긴장하는 순간이다. 도안을 잘못 옮기면 지금까지 공들인 애벌작업은 물거품이 된다. 스케치를 하면서 이따금 실눈을 뜨고, 가까이서 때론 멀리서 전체적인 어울림을 눈 저울질해야 한다.

 

 대게의 사람들은 객기 어린 푸른 시절에 인생이란 하얀 종이 위에 무작위로 점도 찍고 선도 긋고 색도 입힌다. 그땐 도화지의 여백이 무한 할 것이라 믿는다. 교복을 벗어던지고 미지의 세상을 향해 서툰 날갯짓을 시작할 때 어설프게 스케치한 삶의 밑그림으로 때론 많을 길을 우회한다. 거기다 더 큰 잘못은 언제나 그 오류를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이 아니었을까.

 

 처음부터 부실하게 그려진 내 삶의 밑그림은 생의 리듬을 매 단락마다 한 박자씩 뒤처지게 만든다. 늦은 학업과 지각 결혼으로, 친구들이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홀가분한 몸으로 한껏 성장(盛裝)을 하고 모임에 나올 때 나는 아기를 등에 없고 핸드백 대신 기저귀 가방을 들어야 했다. 이따금 학부모 모임에 들면 늘 제일 연장자여서 또래로 어울리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우리네 인생길에는 무엇이든 가장 적절한 시기가 있다는 사실이 삶의 길목마다에서 잘못 그려진 밑그림을 비웃고 있었다.

 

 밑그림이 끝나면 채색 작업에 들어간다. 겨울 들판의 마른 풀잎 같은 가난한 선에 옷을 입힌다. 허기를 달래듯 성급한 붓질은 작가의 생각을 비틀고 나가 생뚱맞은 그림이 되어버린다. 채워 넣기에만 급급하다 보면 화면이 답답해하는 것도 알아차릴 수 없다. 느긋한 마음으로 몇 발자국 물러서서 여백의 미도 가늠하며 그리기를 즐겨야 한다.

 

 화면의 어울림을 때때로 조율해야 하듯 종종걸음 치던 인생길에서도 호흡을 가다듬고 오던 길을 가끔씩 되돌아보아야 했었다. 항상 마음속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한 박자 느린 인생이란 생각이 조바심을 부추겼다. 늘 허기지고 목마른 영혼은 더 많이 채우기 위해, 벌어진 간격을 좁히고 싶어 얼마나 자신을 담금질했던가.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려고 남모르게 물밑에서 쉼 없이 갈퀴질을 하는 백조의 발처럼.

 

 삶의 능선에 일몰이 멀미처럼 출렁일 때 커다란 깨달음 하나 건진다.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것만이 가치 있다고 안달했던 날들이, 한낱 허망한 욕심과 일그러진 자존심이 잘못 그려낸 인생 소묘의 하나일 뿐이라는 걸. 욕망으로 빼곡히 채워진 삶의 화폭은 이미 명품이 될 수 없으리라. 적당한 여백은 꼼꼼히 묘사된 어떤 것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무한한 사색의 바다를 덤으로 준다는 것을 그때는 진정 몰랐었다. 학창시절, 소묘 실기 수업에서 제자들의 작품을 수정해 주시던 선생님의 마지막 손길은 채우기가 아니라 지워내기였다. 하나 둘 지움으로써 신기하게도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 너무 많은 붓질로 포장 되어 있다. 특별한 상표 하나에 자존감을 저울질하는 위선과 허위, 집의 평수와 차의 크기로 사회적 위치를 잣대질하는 체면과 가식 등, 현란한 욕망의 터치로 한껏 덧씌워진 삶이다. 덕지덕지 덧칠된 모습으로 세월의 꽁무니만 ?는 동안 머리 위에는 어느새 은빛 서리가 내려앉았다. 이제는 지우고 비워내야 할 때라고 늦가을 바람이 넌지시 귀띔한다.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채워야 할지 삶의 화폭을 한 번 되돌아 볼 일이다.

 

 시간은 신에게 허락받은 유일한 예지의 도구던가. 그제야 욕망의 붓질이 무디어지며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적절한 빈 공간을 품은 미완성이 보다 완성에 가깝다는 것을.

 

 겨울나무같이 앙상한 뼈대만 덩그마니 있던 가구가 고운 입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창작의 고단한 작업으로 쟁여진 피로가 여기저기서 꿈틀댄다. 세월에 휘둘리어 헐거워진 육신을 다듬고, 잘못 드리워진 삶의 그림자를 벗겨낼 인생의 포크아트 기법을 먼 길 에돌아와 깨우친다.

 

 마지막 단계로 마감재를 입히고 부드럽게 광을 낸다. 은근한 반짝임이 격조 있다. 새로이 찾은 삶의 포크아트 기법으로 인생길의 매무새를 고친다. 더하여 진정 아름다운 모습으로 거듭나기 위해 광택도 내야겠다.

 저만치서 내 인생 소묘의 마무리에 채색 할 겸손한 빛깔이 손짓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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