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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교회 초기 인물 - 신학자로써(As Theologian)캠벨

Joyfule 2008. 9. 26. 01:56

 

신학자로써(As Theologian)

 

캠벨은 신학이 수세기에 걸쳐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발전된 체계로써 교회를 망쳤다고 믿었다. 그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신약성경의 실천에로 교회를 환원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성경말씀을 단순하게 읽고, 그 말씀들 속에서 배워지는 것을 교리와 실천으로 수용하는 것이 본질적이었다. 소위 신학은 성경말씀의 근거 위에서 캠벨의 연합의 계획 속에 어떠한 직접적인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캠벨은 자기 자신을 신학자로 생각하지 않았고, 성경말씀의 연구 위에 근거해서 교리 질문들에 관한 개인적인 판단을 강하게 믿었다. 캠벨은 신학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이나 사역의 성격으로 봐서 신학을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알렉산더 캠벨의 신학은 그것 자체로써 중요한 연구이기 때문에 이 짧은 글에서 그것을 충분하게 다루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로얄 험버트(Royal Humbert)는 수많은 기사들, 논평들, 토론들, 강연들, 그밖에 다른 저술들로부터 캠벨의 사상을 수집하였고, 캠벨의 신학내용을 두터운 책으로 제시하였다. {알렉산더 캠벨 신학의 요약}<
A Compend of Alexander Campbell's Theology(St. Louis: Bethany Press, 1961)>에서 우리는 캠벨의 믿음과 이성,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 성경, 계시, 교회, 종말론, 그밖에 많은 신학질문들에 관한 견해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오는 말(A Final Word)

행동의 사람으로써 알렉산더 캠벨의 인상은 다 같은 하루 24시간 속에서 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한다. 물론 대답은 철저한 시간관리와 남보다 많은 시간을 일했기 때문이다. 캠벨은 규칙적으로 아침 4시에 일어나서 자정까지 일했다. 그의 하루의 일과는 인쇄공들이 일할 자료를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손님을 접대하고, 책을 읽는 것까지 다양하였다. 언제나 아침과 저녁에 그는 자신과 가족과 자기 집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가정예배를 드렸다.

설교하고, 가르치고, 여행하고, 저술하고, 편집하는 것 이외에도, 캠벨은 여전히 농장과 많은 부동산을 관리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알렉산더 캠벨의 두 번째 부인 세리나 캠벨(Selina Campbell)은 그녀가 쓴 책, {부인이 쓴 알렉산더 캠벨의 가정생활과 회고록}<Home Life and Reminiscences of Alexander Campbell by His Wife(St. Louis: John Burns, 1882)>에서 자기 남편의 폭넓은 관심사들에 관해서 말하였다. 그녀는 캠벨이 공공복지, 도로개선, 농업경작에 관심을 보였다고 적었다. 그녀는 캠벨이 웰스버그(Wellsburg)에 이르는 도로건설과 지역에서 가장 우수했던 양떼의 품질개선에 보인 노력들을 예로 들었다.

알렉산더의 관심들은 실로 끝이 없었다. 캠벨은 다양한 계층의 방문객들을 유명하거나 무명하거나에 관계없이 언제나 친절하게 대접하였다. 캠벨의 집은, 나이에 관계없이, 멀고 가까운 곳에 관계없이,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휴양지가 되었다. 한번은 캠벨이 아이오와(Iowa) 부족의 인디언 소년을 8~9년 동안이나 집에서 데리고 있으면서 교육을 시킨 일도 있었다. 그 후 소년은 고향에 돌아가 그의 부족을 도왔다. 또 다른 경우에는 꽤 중요한 인물인 어느 멕시코 장군이 캠벨의 집에서 잠시 머물다 갔는데, 후에 그는 자기의 두 아들들을 베다니 대학에 입학시켰다.(역자 주: 미국의 제20대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알렉산더 캠벨의 저택에 잠시 머물렀다. 지금도 캠벨의 저택에는 가필드 대통령이 머물렀던 침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알렉산더 캠벨은 그의 생애를 자기 아버지 토마스의 생각들을 실행하고 확대시키는데 헌신하였다. 그 생각들은 어떤 면에서는 미국 종교독립선언문이었던 {선언과 제언}(
Declaration and Address) 속에 아주 잘 나타나 있었다. 마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몇 년 전에 새 공화국의 국민들에게 자치에 모험을 하도록 도전했던 것처럼, 캠벨 부자는 그들에게 기독교 발전에 모험을 하도록 도전하였다.

기독교인들은 과거 유럽의 해묵은 다툼의 장애물들을 던져버리고, 사도교회의 일치, 자유, 단순성 그리고 순수성에로 옮겨가야 했다. 알렉산더 캠벨은 강단과 편집책상에서 기독교 신앙과 관련된 인간의 모든 관심사를 심사숙고하였다.

비록 캠벨이 우리 사회의 끝없는 복잡성을 관망했더라도, 그는 실망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너무 쉬운 낙관주의를 포기하거나 사회가 교육, 기술, 경제경영과 정부의 힘에 의해서 그 자체를 완전히 재생시킬 수 있다는 우리의 믿음을 포기할 때에도, 알렉산더는 우리들을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것에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캠벨은 우리의 유일한 안전이 우리의 죄 많은 본성의 정복과 우리의 영적 삶의 발달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신약성경 약속들에 확고하게 기초한 그의 믿음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목적들 속에 안전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알렉산더 캠벨은 그 목적들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행동의 사람이었다.

알렉산더 캠벨의 생애와 실천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은 많다. 가장 도움이 될만한 책들 가운데는 로버트 리차드슨(Robert Richardson)의 {알렉산더 캠벨의 회고록}<
Memoirs of Alexander Campbell(Philadelphia: J. Lippincott, 1868, 1870)>, D. 레이 린드레이(D. Ray Lindley)의 {자유의 사도}<Apostle of Freedom(St. Louis: Bethany Press, 1958)>, 해롤드 L. 룽거(Harold L. Lunger)의 {알렉산더 캠벨의 정치윤리}<The Political Ethics of Alexander Campbell(St. Louis: Bethany Press, 1954)> 그리고 편집자 페리 E. 그레샴(Perry E. Gresham)의 {베다니의 현자: 광폭피륙 속의 개척자}<The Sage of Bethany: A Pioneer in Broadcloth(St. Louis: Bethany Press, 1960)>가 있다. 또 다른 자료는 {가스펠 애드보케이트}(Gospel Advocate), {크리스천 스탠다드}(The Christian Standard), {크리스천 에반젤리스트}(The Christian-Evangelists) 그리고 {제자들}(The Disciple)과 같은 잡지들에 종종 실리는 캠벨에 관해 쓴 중요한 기사들 속에서 발견된다.

참고서적: McAllister, Lester G. Ed. An Alexander Campbell Reader. St. Louis, Missouri: CBP Press,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