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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협 <성악론변>

Joyfule 2013. 1. 29. 10:56

 

 

 김창협 <성악론변>

 

 

인간의 본성은 악한가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씀

김동곤(울산제일고 교사) 옮김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고 하였는데, 악한 것은 본성이 아니라 기질이다. 기氣는 바탕이 되고 이理는 본성이 된다. 이理는 선하기만 할 뿐 악하지 않다. 그러나 기氣는 선하기도 하고 선하지 않기도 하다. 사람이 선하지 않기도 한 것은 기氣의 작용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다른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이理이니 어찌 선하지 않은 속성을 가지겠는가? 공자가 “사람은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라고 하였을 때, 이 올바르다는 것은 곧 선한 것을 말한 것이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한 것은 사실 기질을 두고 말한 것이지 본성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다.

 

아득히 먼 옛날에 사람이 만물과 함께 생겨났을 때, 짐승을 사냥하여 털도 뽑지 않고 피도 씻지 않은 채 먹었으며, 나무 위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굴 같은 곳에 살았으니,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가까이하여 서로 간에 구별이 없었으며, 어버이와 자식은 버릇없이 친하여 자식이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이 없었다. 또 임금과 신하가 있었지만 서로 도덕을 어기고 잘못을 저지르며, 벗을 사귀면서도 서로 다투었다.

이에 성인이 나타나, 중매를 하여 시집ㆍ장가를 들게 하고 집 안팎의 예법을 만들자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었다. 자식이 아침저녁으로 어버이의 안부를 보살피고 받들어 모시며 청소하고 순종하는 예법을 만들자 자식이 어버이를 공경하게 되었다. 수레ㆍ옷ㆍ이름ㆍ등급ㆍ조현ㆍ지위 등의 예법을 만들자 임금과 신하가 도덕을 어기고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게 되었다. 서로 오가며 안부를 묻고 축하하고 위로하며 술 마시고 활 쏘는 예법을 만들자 벗 사이에 다투는 일이 없어졌다.

이렇게 했는데도 남녀 사이에 음란하고 행실이 좋지 못하고, 자식이 예의가 없고 어버이를 업신여기고, 신하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어그러지고, 벗 사이에 해를 입히면 법으로 다스려 바르게 하였다. 이렇게 하자 비로소 사람이 짐승에게서 멀어지고 세상이 바르게 되었다.

 

그런데 순자라는 사람은 지난날은 저러하고 지금은 이러하다 하여, 마침내 사람의 본성은 본디 악한데 그것이 선한 것은 의식적으로 꾸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사람의 본성이 악하므로 성인이 예의와 법도를 만들어 사람의 본성과 감정을 바로잡았다고 하였다.

순자의 주장은 너무나도 잘못되었는데, 이는 생각이 깊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가까이하면 음란하여 행실이 좋지 못하게 되고, 어버이와 자식이 버릇없이 친하면 자식은 예의가 없고 어버이를 업신여기게 되며, 임금과 신하가 서로 도덕을 어기고 잘못을 저지르면 신하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되고, 벗을 사귀면서도 서로 다툰다면 해가 된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본성이 본디 그러해서겠는가. 앞에서 숨기고 뒤에서 깨뜨리니, 기氣가 선하지 않아 나타나는 해로움이 이처럼 심하다.

 

오직 성인만이 태어나면서부터 기氣가 선하며 본성도 본바탕 그대로 선하다. 그러므로 성인은 남자와 여자 사이를 뚜렷하게 구별하여 가까이하지 않고,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서도 서로 존중하여 버릇없이 친하게 되지 않으며, 임금과 신하 그리고 벗의 사귐에 이르러서도 예의와 겸손을 갖추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거나 다투지 않는다. 성인은 그렇게 하는 것이 선해서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본디 그러하여 쫓아 따르는 것이다. 성인이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 자신을 따르게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그 본성을 따르게 하여 기질이 가진 해로움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진실로 사람의 본성이 악한데 성인이 바로잡아 선하게 한 것이라면, 아주 옛날 성인도 본성이 악했을 것이 아닌가? 도대체 누가 그를 가르치고 억지로 시켜 악한 본성을 따르지 않게 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르게 하였단 말인가.

사람의 본성이 본디부터 선하다는 것은, 빗대어 말하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 중국 요임금 때, 물이 거슬러 흘러 온 세상이 어지러웠다. 온 세상이 나서 힘을 쏟았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 본디 그러해서였겠는가. 다만 물의 본성을 해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임금이 그 이치를 알아 땅을 파서 물을 아래로 흐르게 하여 바다로 흘려보냈던 것이다. 그런 뒤에 중국의 강물이 옛길을 따라 흘러 해로움이 사라졌다. 이것이 우임금이 물을 잘 다스리게 된 까닭이다. 성인이 사람을 다스리는 일도 이와 같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본성을 해치는 것을 없앨 뿐이다. 사람의 본성이 선하지 않은데 어떻게 억지로 선하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순자는 이렇게 말했다.

“굽은 나무는 도지개를 써야만 곧게 되고, 무딘 쇠는 숫돌에 갈아야만 날카롭게 된다. 사람의 악한 본성은 스승에게 배워야만 바르게 되고 예의를 배워 알아야만 다스려진다.”

순자의 주장을 보면, 굽은 나무는 곧게 될 수가 없는데 도지개로 곧게 만들 수 있고, 무딘 쇠는 날카로울 수 없는데 숫돌에 갈아 날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사물은 반드시 먼저 그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굽은 나무가 곧게 될 수 있는 것은 본디 나무의 본성이 부드럽기 때문이고, 무딘 쇠가 날카롭게 될 수 있는 것은 본디 쇠의 본성이 단단하기 때문이다. 만일 나무가 쇠와 같이 단단하다면 도지개로 곧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쇠가 나무와 같이 부드럽다면 숫돌에 갈아 날카롭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볼 때, 나무가 본디 곧게 될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지개로 곧게 만들 수 있는 것이며, 쇠가 본디 날카롭게 될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숫돌로 갈아 날카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본성도 본디 선하기 때문에 성인이 사람을 선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이 본디 선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모두 같이 받은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다면 그것은 병이지 눈과 귀의 본성이 그러해서가 아니다. 뛰어난 의사가 탕약ㆍ알약ㆍ침ㆍ뜸으로 치료하면, 눈이 밝아져 볼 수 있고 귀가 뚫려 들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의사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눈과 귀가 보거나 들을 수 있는 본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어찌 보거나 듣게 할 수 있게 한단 말인가? 그러니 의사도 병든 것을 없앤 것뿐이다.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은 눈과 귀로 보거나 들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악하다고 하는 것은 눈과 귀로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인은 뛰어난 의사에 빗댈 수 있다. 성인이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과 법을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본받도록 하는 것은 의사가 치료하는 탕약ㆍ알약ㆍ침ㆍ뜸과 같다.

이제 누군가가 눈멀고 귀먹은 사람을 보고 눈과 귀의 본성이 본디 그러했는데 의사가 보고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하면, 누구나 그를 어리석다 할 것이다. 순자의 주장은 바로 이와 같다. 순자가 이렇게 하면서 맹자를 넘어서려 하고, 사람의 본성은 본디 선하다고 한 맹자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내가 볼 때, 순자의 주장은 너무나도 잘못되었다.

 

순자는 느껴서 저절로 그러한 것이 감정ㆍ본성이며, 느껴서 그러하지 못하고 반드시 어떤 원인으로 그렇게 된 것이 거짓 꾸밈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맹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누구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고, 어버이의 시체가 골짜기에 내버려진 것을 보면 자식은 이마에 땀을 흘린다고. 이것이 어찌 느껴서 저절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혹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데 어린아이를 구해 주지 않고,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어버이의 시체를 거두어 주지 않는 것은 사사로운 마음이 생겨 본성을 해친 것이다. 이것은 거짓 꾸밈이라고 해야 한다. 순자가 말한 거짓 꾸밈과 내가 말하는 거짓 꾸밈은 다르다.

 

순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길을 가는 사람은 누구나 우임금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

“길을 가는 사람은 누구나 어짊과 의로움, 법도의 올바른 바탕을 알고 있다. 또한 누구나 어짊과 의로움, 법도의 올바른 기량을 가지고 있다.”

순자가 말한 ‘어짊과 의로움, 법도의 올바른 바탕과 기량’은 사람이 본디부터 가진 것인가, 아니면 바깥 사물로부터 받은 것인가? 만약 ‘어짊과 의로움, 법도의 올바른 바탕과 기량’을 바깥 사물로부터 받은 것이라면,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어짊과 의로움, 법도의 올바른 바탕과 기량’을 바깥 사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볼 수가 없다. 바깥 사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면, 진실로 본성이 본디 그러하여 거짓 꾸밈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는 것으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요임금ㆍ순임금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순자가 맹자의 논리를 부수려고 했지만 끝내 맹자의 논리를 넘어뜨릴 수 없었다. 이는 이치로 볼 때 당연한 것으로, 순자가 자기 논리로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순자의 학문이 넓고 깊었으나 오직 본성과 기질을 나누는 데는 밝지 못해 선악의 뿌리를 파고들지 못했다. 그래서 본성을 악하다고 하고 또 선한 것을 거짓 꾸민 것이라고 생각하며 맹자가 틀렸다고 하여 이와 같은 주장을 하였다. 순자는 거침없이 주장하였으나 그 논리가 어그러지고 한결같지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 논리가 모순된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순자가 일찍 태어나지 않아 맹자와 만나 이야기하지 못해 맹자의 논리에 미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또 순자가 늦게 태어나지 않아 정호ㆍ정이ㆍ장재를 만나 본성에 대하여 후천적으로 생기는 기질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해 자신의 잘못을 거두지 못한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그대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옛날 본성을 말하면서 양웅이나 한비 같은 사람도 맹자와 다른 논리를 폈습니다. 그런데도 그대는 어찌하여 순자의 논리만 비판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양웅이나 한비의 논리도 이理와 기氣를 구별하지 못한 점에서는 순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순자를 비판하면, 양웅과 한비의 논리는 다시 비판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 사람이 말했다.

“본성과 기질에 대한 설명은 분명 그대의 말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기질에 속하는 것을 본성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내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그것을 어찌 본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선현들이 그것을 본성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호ㆍ정이ㆍ장재가 이미 다 설명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