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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신채호 <조선 상고사>에서

Joyfule 2013. 1. 24. 11:56

 

 

 신채호 <조선 상고사>에서

 

역사란 무엇인가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씀

김동곤(울산제일고 교사)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ㆍ공간적으로 발전ㆍ확대하는 정신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다.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다.

무엇을 아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깊이 팔 것 없이 얕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 밖에 선 자를 비아라 한다.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국ㆍ러시아ㆍ프랑스ㆍ미국 등을 비아라 한다. 영국ㆍ러시아ㆍ프랑스ㆍ미국 등은 각기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을 비아라 한다. 무산 계급은 무산 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를 비아라 한다. 마찬가지로 지주나 자본가는 각기 제 붙이를 아라 하고 무산 계급을 비아라 한다.

이뿐 아니라 학문ㆍ기술ㆍ직업ㆍ의견이나 그 밖의 무엇에든지 반드시 기준이 되는 아가 있으면 따라서 아와 맞서는 비아가 있다. 아 안에도 아와 비아가 있고, 비아 안에도 아와 비아가 있다.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복잡할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투쟁이 더욱 세차다. 그래서 인류 사회의 활동이 쉴 사이가 없어 역사의 미래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다.

아나 아와 상대되는 비아의 아도 역사적 아가 되려면 반드시 두 가지 속성이 필요하다. 첫째는 상속성相續性이다. 이는 시간에 있어서 생명이 끊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둘째는 보편성普遍性이다. 이는 공간에 있어서 영향이 차차 다른 데로 미침을 말한다.

인류 아닌 다른 생물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없지는 않지만, 다른 생물은 아의 의식이 너무 약하거나 혹은 전혀 없어 상속성ㆍ보편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류에게만 가능하다. 사회를 떠나서 개인적인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지만, 개인적 아의 범위가 너무 약하고 작아 마찬가지로 상속성ㆍ보편성을 가지지 못한다.

인류도 사회적 행동이라야 역사가 된다. 같은 사건이라도 상속성ㆍ보편성의 강약을 보아 역사의 재료가 될 분량이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자. 김석문(金錫文, 1658~1735)은 300년 전에 지원설地圓說을 앞장서서 주장한 조선의 학자이다. 그러나 그의 지원설은 브루노의 지원설과 같은 역사적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브루노의 학설은 유럽 각국의 탐험 열을 높이고 또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김석문의 지원설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은 400년 전에 군신 강상설을 타파하려 한 동양의 위인이지만, 그를 「민약론」을 쓴 루소와 같은 역사적 인물이라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정여립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검계나 양반 살육계 등은 한 부분에 국한된 짧은 한때의 활동에 불과했지만, 루소의 「민약론」은 이후 파도와 같이 널리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비아를 정복하여 아를 뚜렷이 밝히면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래 역사의 생명을 잇는다. 그러나 아가 사라져 비아에 이바지하면 투쟁의 패망자가 되어 과거 역사의 자취만 남기게 된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역사에서 바꾸지 못하는 원칙이다. 승리자가 되려 하고 실패자가 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인류에게 공통된 속성이다. 그럼에도 늘 기대와 달리 승리자가 되지 못하고 실패자가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무릇 선천적 실질부터 말하면, 아가 생긴 뒤에 비아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후천적 형식부터 말하면, 비아가 있은 뒤에 아가 있다. 말하자면 조선 민족(아)이 출현한 뒤에 조선 민족과 상대되는 묘족ㆍ한족 등(비아)이 있었으니, 이는 선천적 실질에 속한 것이다. 만일 묘족ㆍ한족 등 비아의 상대자가 없었다면 조선이란 나라를 세우거나 삼경을 만들거나 오군을 두는 등 아의 작용이 생기지 못했을 것이니, 이는 후천적 형식에 속한 것이다.

정신을 확립하여 선천적인 것을 지키며, 환경에 순응하여 후천적인 것을 유지하여야 한다. 만약 두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하면 패망하게 된다. 유태의 종교나 돌궐의 무력으로도 패망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후천적 형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 남미의 공화주의와 이집트 말기의 학문 발전으로도 쇠퇴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선천적인 실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제 조선 민족을 아의 단위로 잡고 조선사를 서술하려 한다.

(가) 아의 생장 발달의 상태를 제1의 요건으로 하여 다음을 서술한다.

1. 최초 문명의 기원은 어디인가?

2. 역대 강토의 늘고 줆이 어떠했는가?

3. 각 시대 사상의 변천이 어떠했는가?

4. 민족의식이 언제 가장 왕성했고 쇠퇴했는가?

5. 여진ㆍ선비ㆍ몽고ㆍ흉노 등이 본디 아의 동족으로 언제 나누어지고 또 나누어진 뒤에 영향이 어떠했는가?

(나) 아와 상대자인 사방 각 민족의 관계를 제2의 요건으로 하여 다음을 서술한다.

1. 아에서 나누어진 흉노ㆍ선비ㆍ몽고와, 아의 문화 포대기에서 자라 온 일본이 아의 커다란 적이 되어 있는 사실.

2. 인도는 간접적으로, 중국은 직접적으로 아가 그 문화를 수입하였는데, 어찌하여 그 수입의 양에 따라 민족의 활기가 여위어 강토의 범위가 줄었는가?

3. 오늘 이후는 서구의 문화와 북구의 사상이 세계사의 중심이 되었는데, 아 조선은 그 문화 사상의 노예가 되어 사라지고 말 것인가? 또는 그를 씹어 소화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것인가? 이러한 것을 나누어 서술해 (가)ㆍ(나) 두 가지로 이 책의 기초로 삼는다.

(다) 언어ㆍ문자 등 아의 사상을 표현하는 도구의 날카로움과 무딤은 어떠하며, 그 변화는 어떻게 되었는가?

(라) 종교가 오늘 이후에는 거의 가치가 없는 것이 되었지만, 고대에는 확실히 한 민족의 존속ㆍ멸망ㆍ융성ㆍ쇠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으나, 아의 신앙에 관한 추세가 어떠했는가?

(마) 학술ㆍ기예 등 아의 우수성을 발휘한 부분이 어떠했는가?

(바) 의식주의 정황, 농상공의 발달, 토지의 분배, 화폐 제도와 경제 조직 등이 어떠했는가?

(사) 인민의 이동과 불림, 강토의 줄고 늚을 따라 인구의 늘고 줆이 어떠했는가?

(아) 정치 제도의 변천.

(자) 북벌 사상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나타나고 사라졌는가?

(차) 빈부귀천과 각 계급의 압제와 대항 사실이 나타나고 사라진 대세.

(카) 지방 자치제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발생하였으나 근세에 와서 형식만 남고 정신이 사라진 원인과 그 결과.

(타) 외세의 침입으로 받은 커다란 손실과 얼마간의 이익.

(파) 흉노ㆍ여진 등이 아와 나누어진 뒤에 다시 합하지 못한 까닭.

(하) 예로부터 문화상 창작이 적지 않았으나, 늘 고립적이고 단편적이 되고 계속되지 못한 까닭을 힘써 살펴 서술하여 앞의 (다)ㆍ(라) 이하 각종 문제로 이 책의 중요한 항목으로 삼아 일반 독자로 하여금 조선 역사의 만분의 일이라도 알게 하고자 한다.

 

- 『조선 상고사』 <제1편 총론. 1 史의 定義와 朝鮮史의 範圍> (신채호, 종로서원, 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