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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2 - 김 순 재

Joyfule 2012. 8. 11. 12:53

 

꽃, 2 - 김 순 재

둘째 손주는 큰 녀석과 달리 다정다감하다.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세 살 터울인데도 성정이 서로 다르니 사람은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결정되나 보다.

 

나는 요즈음 작은 놈 재롱 보는 재미에 가슴속 주름살이 활짝 펴진다. 녀석은 눈처럼 희고 오통통 한데다가 옴팍눈이다. 윗도리만 걸치고 알궁둥이를 아기작거리며 눈웃음을 치고 다닐 땐, 내 안의 엔도르핀이 있는 대로 우루루 쏟아져 나온다. 그뿐이랴. 제 에미를 제쳐두고 내 무릎을 베고 우유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는 재롱이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리고 기분이 좋으면 느닷없이 내 귀를 붙잡고 몇 번이고 뽀뽀를 한다. 내 입술이 달콤한 커피에 젖어있거나 초콜릿이 묻어있으면 여섯 번도 더 뽀뽀를 해댄다. “예쁜 꽃” 하면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양 쪽 볼을 고이며 그 특유의 옴팍 눈웃음을 친다. 그런 재롱으로 나를 매료시킨다.

 

녀석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의 꽃이다. 빨강꽃도 되고 노랑꽃도 되어서 벙긋벙긋 가족의 꽃병에 꽂힌다. 그러나 내게는 녀석의 존재가 꽃보다 더 진진한 태양과도 같다. 무거운 몸을 거실 의자에 기대고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아침이면, 녀석은 방실거리며 제 에미에게 안기어서 방을 나온다. 그 녀석을 얼려고 안아 올리기를 몇 차례 하고 나면, 그제서야 몸이 깬다. 아침만이 아니다. 업어달라, 안아달라, 밖으로 나가자, 이런저런 성화가 하루 종일 내 몸이 깨어있게 만든다.
큰 녀석 또한 제법 의젓한 재롱으로 나를 흐뭇하게 해준다. 조가비 같은 손으로 어깨를 두들기고, 다리를 주물러준다. 살그머니 내 귀에다 대고 “쏙싹쏙싹” 무슨 말인지도 알 수 없는 말을 비밀스럽게 속삭여 놓고는 “알았지. 응?”하며 약속을 받아내려 한다. 이렇게 손주들이 놓아대는 마취 주사에 흥건히 즐거워지면, “자식이란 무엇일까” 생각 하는 때가 있다. 내 자식을 기를 적에는 가져보지 못했던 여유로움이다. 이제 와서 무슨 또렷한 답을 내 놓을 수 있으랴 만, 아들이 제 자식들과 지내는 광경을 보며 나를 돌아 본다.

 

아들이 쉬는 날이면 제 자식들과 시시덕거리며 절대 강자로 군림하여 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아이들보다 더 소견머리 없는 짓을 하며 논다. 그러는 동안의 애비는 너무도 재미 있어하고, 행복해하는, 백치 같은 모습이다. 회사 일에 시달린 피로를 오전 내내 잠으로 푸는 버릇 때문에 아내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식구들을 밖으로 데려나갈 생각은 않고 순진한 제 자식들을 끼고 시간을 보낸다.  

 

어린 자식은 마음 놓고 사랑하고 호통 칠 수 있으며, 내 취미대로 옷도 입히고 어디든 데리고 다닐 수 있다. 아이들에게도 인격이 있고 자기 주장이 있지만 대부분 부모의 꼬임에 넘어 간다. 그리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더라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좋아라 몸을 지신다. 아들은 이런 점에 안심하고 제 자식들과 감미로운 한 판 놀이를 벌이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너는 다음에 골퍼가 되라” “ 배우가 되라” 요즈음 잘 나가는 직종을 들먹이며 자식에 대한 희망을 툭툭 던진다. 그러면 손주들은 좋아라 그 청을 받아들인다. 그리고선 막대기로 공을 치는가 하면, 갖가지 흉내를 내보이기도 한다. 그러고 노는 것을 보며 “자식이란 저런 것이지” 속으로 끄덕인다. 아들은 제 자식에게 아무 의도 없이 그냥 어울려 시시덕거리는 것이다. 그러나 손주는 자연스럽게 애비의 위로와 힘과 꿈이 되어 있다.

 

돌이켜 보면 나도 자식들이 주는 꿈과 위로와 힘으로 여기까지 달려 왔다. 엎어지고 넘어져도 그들이 있기에 새 힘을 얻어 달렸으며, 일등 주자가 되지 못하였을지라도 끝까지 달렸다. 비록 꿈으로 끝날지라도 원대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자식을 기르는 재미로 긴 여정을 권태 없이 걸어 왔다. 이 세상에 자식보다 더 몰입 할 수 있는 재미는 없다. 강보에 싸여 꼬물거리던 손과 발, 흔들거리며 떼놓던 첫 걸음마, 내가 더 흥분했던 초등학교 입학식, 삐뚤삐뚤 써 온 어버이날 편지, 함께 치른 입시 지옥, 허풍 떨며 타고 간 입영 열차, 연애 사건, 그 모호한 재미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묘사할까. 어떤 천재도 문장으로 엮지 못 하리라.

 

손주가 지금 내게 주는 기쁨과 위로와 솟구쳐 오르는 생명력을 자식들은 이미 내게 주었다. 손주가 주는 것은 노후의 무료를 달래는 위로에 불과 할지 모르나, 자식은 삶의 의미와 희망과 의욕과 보람을 주었다. 그것은 내 인생의 재미였고, 행복이었으며, 나를 살게 하는 힘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해서 받은 것도 아니고, 자식이 부모에게 주려고 애써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자연의 섭리대로 수수(授受)된 불가사의다. 그러니 자식의 의미를 무엇이라 캐랴. 자식은 자식 그대로가 의미인 것이다. 내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사람도 아니고, 못다 이룬 꿈을 이루어 줄 희망도 아니며, 늙어서 의지할 의지처도 아니지만, 그런데도 기쁨이며 희망이다.

 

손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일이 바빠서 할머니를 찾지 않을 것이다. 유치원 가랴, 친구 만나랴, 영어 학원, 웅변 학원도 다녀야 한다. 할머니의 무료를 달래주는 귀염둥이로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또 그럴 수도 없다. 사람은 때를 따라서 할 수 있는 일과 역할이 달라진다. 자식은 달라진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데, 부모는 여전히 지난 시절의 역할을 원하거나 노후를 책임 지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의 역할은 품 안에 있을 때 끝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후에 손주를 안겨 주고, 건강을 걱정해 주며, 안부를 궁금해 하는 자식들의 관심은 덤으로 얻는 은총이다. 쓸쓸하지만 그렇게 생각 해야 할 것 같다. 어느 자식이 늙은 부모의 위로가 아니며, 붙잡을 버팀목이 아니겠냐 마는. 어느 부모가 그러한 미련을 버릴 수 있겠냐 마는. 그래도 그렇게 생각 해야 할 것 같다.

 

지난 해 이른 봄, 수선화 한 촉을 사다가 즐기고는 구근을 흙 속에 묻어놓고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런데 금년 봄에 노란 꽃을 피워 즐거움을 배로 더하여 주었다. 이제 자식들을 묻어둔 구근이라 여기며 욕심 없이 노후를 맞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