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에세이

징검다리 - 오 승 희

Joyfule 2012. 8. 14. 10:34

 

 징검다리 - 오 승 희

 

 

  나는 내가 왜 이곳에 놓이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누구의 손에 의해 이곳에 옮겨져 여기 있을 뿐이다. 나는 이곳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낯설어 그렇기도 하겠지만 밤 낮 없이 졸졸 거리고 흐르는 물소리가 도무지 정신 산란하고 성가시다. 해가 떨어지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무섭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새소리와 풀벌레소리는 청승맞기만 하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스르르 몰려와 한차례씩 나뭇잎들을 흔들고 가버리는 바람은 나를 참으로 황폐하게 만든다.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다.  

내 앞뒤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른 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산수 좋은 이곳이 안성맞춤이라고 여길까, 가보지 못한 세상을 넘겨다보며 안달복달 속을 태울까. 새처럼 창공을 훨훨 날아 봤으면, 들짐승처럼 시원스레 들판을 달려 보았으면. 늘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나에게 옆에 돌이 한마디 한다.  

 

"여보게, 진정하게. 하늘을 나는 새가, 들판을 달리는 짐승이 딱히 날고 싶어 날며, 달리고 싶어서 달리겠는가. 새들은 깃들 곳을 찾아 수만리를 날아야 하고, 짐승은 먹이를 찾아 들판을 헤집고 다닌다네. 자네의 꿈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리저리 부딪쳐 멍이 들고 천길 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깨어져도 굳이 꿈을 좇아 나서겠다면 딱히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네만,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이 꼭 자네 마음에 흡족한 것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네.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네들 것 인줄 아는 인간들도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는 살지 못한다네. 자네는 파랑새를 찾아 세상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녔다는 찌르찌르와 미찌르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그들이 파랑새를 찾았다는 말을 나는 못 들었네."

  며칠 동안 앞을 분간 할 수없이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때리고, 세상이 뒤집힐 듯 요동을 쳤다. 그래, 차라리 부셔버려, 몽땅 쓸어버려, 나도 세차진 물살을 따라 어디로든 떠내려가고 싶었지만, 오히려 밀려온 모래흙에 파묻혀 더욱 깊이 박혀 버리고 말았다. 이제 내 힘으로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희망이 깨어져 어깨를 늘어뜨리고 심란해 하는 나에게 친구는 다시 말을 한다.  
"모든 것이 생각하기 나름이라더군. 곱게 보고 좋게 생각하게. 졸졸거리는 물소리는 정겨운 자장가로 듣고, 청승맞은 풀벌레와 함께 청승을 떨든지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와 같이 수다라도 떨어 보게나. 찬찬히 살펴보면 어두운 밤을 은근히 밝혀주는 달이 다정하지 않은가? 이곳저곳에서 반짝이는 별들과 숨바꼭질이라도 해보게. 한 여름 몰려와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소리도 귀담아 들어보게나. 그들도 대개는 짜증스럽고 고단하다고 할 걸세. 자네는 우리가 하는 일이 그리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되나? 우리들이  밤을 가 되어 계곡의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일은 아주 중요하고 귀한 일이네. 듬성듬성 놓인 우리들의 등을 밟고 사람들은 급한 소식도 전하고, 아이들이 옷을 적시지 않고 학교도 가고, 이쪽에서 먹이를 구하지 못한 짐승들이 저쪽으로 건너갈 수도 있지 않은가. 공도 모른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말게.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제 몫이 있는 법이지. 둥글면 둥근 대로 모나면 모난 대로,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물결치면 치는 대로 그렇게 한 세상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지 않겠나. 세상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네."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사납던 날씨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조용해졌다. 빠르게 흐르던 물살도 다시 순해졌다. 죽은 듯이 엎드려있던 나도 차츰 정신을 차려 주변을 살펴본다. 겹쳐진 나뭇잎을 비집고 땅으로 내려온 햇살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따라 춤을 춘다. 맑고 깔끔해진 세상은 참 신선해 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친구도 더러 있긴 하지만 덩치가 큰 친구들은 거의 그냥 다 있었다. 떠내려 온 모래흙에 묻혀 우리들은 더욱 튼튼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그랬었구나, 그런 거였구나.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기 위해서 우리는 이곳에 놓여 진 것이었구나.

 여태껏 조용하던 한 친구가 웃으며 말을 한다.  
"실은 말이네, 나도 내가 앉은 자리가 마땅치 않아 엎어지고 자빠지는 한이 있어도 이곳을 벗어났으면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네. 그런데 그때마다 나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질 것 같아서 떠나지 못했지. 아쉬워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크게 후회 하지 않는다네. 어느 동네나 맑은 날 있으면 궂은날도 있을 터이고 해는 늘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이니까.    

오월 중순인데도 날씨가 여름 못지않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가게 앞 평상에 모여 앉아 한담을 나눈다.  도시의 한 귀퉁이에 붙박혀 세상의 온갖 풍파에도 끄떡 없이 한세대를 이어온 징검다리들이 오늘은 한가로이 모여 앉아 고단했던 지난세월을 그리워한다.  

                                                                2009.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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