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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의 갈대숲 - 손정란

Joyfule 2012. 8. 10. 14:04

 

 

순천만의 갈대숲

손정란



  김승옥의 소설「무진기행」에서처럼 버스를 타고 산모퉁이를 돌아 지금은 아스팔트로 덮어 단단하게 다져 꾸민 와온해변 주차장에서 내렸다. 소설 속 안개의 도시 ‘무진’은 주제를 뒷받침하는 상상의 장소이지만 지도 위에는 없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순천만의 갈대숲이 틀림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바다에서 육지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갈대가 촉촉했다. 그것들은 늘 노래를 부른다. 어떤 경우에도 거친 된비알에서 자라는 억새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전라남도 남해안의 여수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있는 순천만. 세계 5대 연안습지로 국제습지조약인 람사르협약(2008년 6월 16일, 명승 제41호)의 문서에 적힌 곳이다. 그래서 아득한 시간을 견디며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순천만은 생물이 살아가는 상태가 잘 간직되어 있다. 개펄에서 무리 지어 자라는 칠면초는 봄과 여름에는 파란색과 노란색의 중간색을 나타낸다. 가을이 되면 몸 속에 잠겨있던 모든 빛깔을 밖으로 밀어내어 붉은빛이 도는 자주색으로 변한다.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는 이곳에서 겨울을 지낸다. 노랑부리백로, 황새, 재두루미, 검은머리물떼새, 노랑부리저어새도 둥지를 튼다. 개펄 속을 느짓하게 나온 짱뚱어와 이리저리 가볍게 기울어지며 자꾸 흔들리는 농게가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에 멈칫하며 뚜렷거렸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의 물가 풀들은 바다 쪽으로 갈수록 키가 작아 보인다. 사람 쪽으로 가장 가까운 갈대숲 너머는 갯잔디, 그 너머는 칠면초, 그 너머는 퉁퉁마디이다. 밀물 때면 먼 풀들은 물에 잠기고 새들은 갈대숲으로 날아든다. 그래서 갈대숲 사이로 긴 나무 길을 세워 사람들이 천천히 걸을 수 있도록 베풀었다. 갈대숲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곳이 자연이기 때문이다.

 
  순천만의 갈대숲은 봄이면 뾰조롬 뾰조롬 새잎으로 돋아나는 낯선 시간들의 순결로 경건하고 신성했다. 갈대숲의 힘은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살려내는 것이어서 그 속에서 시간은 낡지 않았다. 갈대숲의 시간은 흘러가고 흘러오는, 사라져 없어짐과 새로 생김의 순환으로 싱싱했다. 푸른 심지를 밀어 올렸던 갈대들은 저마다 하나씩 따로 나뉘어져 존재의 존엄으로 촘촘했다. 이 존엄하고 촘촘한 개별성을 다 합쳐가면서 갈대숲은 저절로 이루어져 바다와 들을 모두 품는다. 바다와 들의 경계에서 온갖 생명을 키운다. 


  갈대는 바람에 반응이 빠르고 날카로웠다.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바람이 얼풋만 해도 갈댓잎이 서걱서걱 오슬오슬 소리를 냈다. 바람에 불린 이웃 갈대들도 어디, 어디, 가가(呵呵)하면서 소리를 내었다. 바람에 불린 갈대숲의 소리는 그 박자가 길거나 짧아 규칙이 없었다. 


  사람들의 발길에 반들반들해진 나무 길을 가벼운 마음으로 걷다가 무겁게 돌아가야 할 의무는 없다. 1.2킬로미터 길은 대대포구의 무진교를 지나 갈대숲을 향하여 내처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지난 오월 어느 날, 나는 땡볕에 뜨거워진 나무 길을 양산을 쓰고 끄트머리까지 걸었다. 내가 입고 있는 옷과 피부가 전부 초록빛으로 물드는 것 같았다. 초록의 세상. 거기서 사람은 손님이었다. 돌아보니 개펄은 석탄 반죽처럼 질펀하고 갈대숲을 헤집는 바람이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