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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아프다 - 손정란

Joyfule 2012. 8. 13. 10:22

 

 

눈물이 아프다 - 손정란

 

  

 

그곳은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산 위에서 사부작사부작 내려온 햇살이 높은 연두색 철망울타리에 앉아 있었다. 문산읍 소문리 골목길을 요리조리 돌아 대낮인데도 조금 어두컴컴하고 바닥이 축축한 굴다리 아래를 지나, 오른쪽으로 몇 걸음 옮기면 바로 한울타리라고 부르기도 하는 ‘내일을 여는 집’이다. 내일을 여는 집은, 남편에게 함부로 치고 때리며 몹시 괴롭히거나 모질고 악한 대우를 받은 여성들이 위험한 시기를 빠져나와 임시로 안전하게 생활하는 곳이다.

 

  거기서 눈이 똘망똘망한 어린아이를 업거나 혹은 초등과 중학교에 다니는 딸 아들을 데리고 내일을 찾아온 그녀들의 퍼렇게 맺힌 아픔을 보았다. 그리고 눈물의 하소를 들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책 읽기를 가르치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체험을 직접 쓴 생활수기를 읽어주기도 한다. 그녀들의 마음 속에 쟁여진 응어리가 온전히 사그라지기를 바라면서.    
   그녀들처럼 내 마음 속에 쟁여진 응어리 때문에 나는 자주 앓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꽃가루가 날릴 때마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릴 때마다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아팠다. 가슴을 움켜쥐고 기침을 하기도 하고 하루 종일 눈물과 콧물을 흘리기도 하고, 참숯 베개가 뜨거워지도록 열병을 앓기도 했다.  

  

 산다는 게 많이 가진 것, 부족하지 않은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거나 겪을 일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야무지게 했건만 막막하고 아득함이 안개처럼 뿌옇게 눈앞을 가렸다. 모든 것이 하얗게 바래버렸다. 한 점 기운도 남김없이 사라져 그 자리에 쓰러져버릴 것 같았던 눈물의 흔적. 세상 무엇에도 비끄러매고 버팅기기 힘들 만큼 마음이 무너졌다. 그러는 동안 지구는 스물네 시간 만에 한 번씩 자전을 했고 그럭저럭 해가 떠서 머쓱하니 지면서 걸리거나 막힘없이 삼십오 년이 지나갔다.
  만일 뉘가 나에게 한 십년이나 이십년쯤 젊어지도록 해주겠다면 그것만큼 마음 쏠리는 말은 없겠으나 아마도 나는 줄걸음을 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젊은 나이에 또 아이들을 키우며 어렵고 고된 일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생의 젊은 시절 열 번 스물 번을 다시 돌려준다 해도 싫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한 순간에 스치는 것조차 거북해지는 것이 부부다. 마구 때려 근육이며 뼈들이 시큰대고 얼굴은 남의 살을 덧붙인 것처럼 얼얼한데도 정신은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고 또렷또렷했다. 그 뚜렷하고 분명함 속에서 나를 사람으로 존중해 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게 고비다. 자식들을 생각해서 참고 넘겨라. 사람이라는 게 다 살기 마련이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잘 이겨내는 듯 태연한 듯이. 오래 입어서 엉덩이 부분이 뭉개진 반들반들한 통바지를 입고 눌은밥을 먹어야 하고. 자식들 돌보고 덕이나 하나하나 쌓으면서 곱게 늙다가, 좋게 세상 버릴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친정어머니는 누누이 잘 깨닫도록 일의 이치를 밝혀가며 말했다. 왜 그리 서럽고 북받치듯 눈물이 솟구치든가 몰라. 
  수다한 날들의 아픈 기억 때문에 온몸이 퍼렇게 저리는 그녀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녀들의 시린 가슴에 어떤 말을 해야 괴로움을 덜어 주고 슬픔을 달래 줄 것인가. 오슬오슬 한기 드는 마음에 무엇으로 포근한 온기가 되어 줄 것인가. 두려움을 그들 스스로 참아내고 있는데, 앞일에 대하여 어떤 희망을 말해야 주눅 든 삶을 곁부축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