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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상처와 치유.

Joyfule 2021. 4. 15. 01:37

 

 

  

  내면의 상처와 치유.

 

 

자존심이 세다는 말은 자존감이 낮다는 말이다.

자존감이 높으면서도 자존심이 센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런 자존심은 자존감이라는 융통성을 전제하기에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자존심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자존심이 아니라, 타인이 봐도 그럭저럭 그럴 수 있는 자존심으로 보여지게 된다.

자존심은 자존감이 상처를 받은 결과로 주어지는 자의식이다.

상처야 살다보면 얼마든 받을 수 있지만 상처가 치유되는 것보다 더 많은 상처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런 일종의 피해의식(victim mentality)이 형성이 되면서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상처가 되거나 작은

scratch가 생기면 절대 못 참고 폭발시킨다.

여기서 말하는 폭발은 anger가 아니라 살인으로 이어질수도 있는 이성을 잃은 rage이다.

물론 격노를 표출한 이후에는 무한한 후회만 남는다..

그래서 자존심은 자기를 지켜주는 방어기제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가두는 성(城)과 같은 것이 된다.

자존심이 치유받기 어려운 이유는 자존심을 치유하려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문제다.

그래서 병리적 자존심을 유지한 채 살아간다.

그래서 자존심은 성격의 한 측면이 아니라 성격의 중심(center)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생을 다 살고나면 늙어 후회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존심 내세우며 살아온 사람 주위에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자존심 강한 내담자들은 자기가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간 상담자에게도 자존심을 내세운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존심에 마음의 상처까지 깊다면 상담은 꼬여만 간다.

나는 지난 15년 간 상담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내담자를 비웃거나 내담자에게 의도적 상처를 주려는 마음은 품어 본 적이 없다.

적어도..내 마음의 지향성은 그랬다.

한 두 번 상담으로 끝날 관계가 아니면 늘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도 잊지 않았다.

특히 마음의 상처가 깊은 사람에게 나는 위로와 공감 그리고 격려와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사람들이 보면 그건 립서비스 같았을 것이다.

사람은..그런 성향이 있다.

상대방을 자기화 시키려는 성향 말이다.


그건 상담도 동일하다.

상담자를 자기 아바타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어두우면 상담자의 밝고 건강함이 싫다.

얄밉다. 자신처럼 비참해야만 되는데 밝다니!

그래서 어떻게든 상담을 망쳐 놓는다.

그래서 상담자가 비참한 마음, 비참한 표정을 지으면 그제서야 자신의 기분을 확인받는 것 같아 편안해 한다..

이게 투사적 동일시다.

자존감은 붕괴되었다.

자존심만 살아남은 것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보면 세계적인 스타(?)가 된 인물이 나온다.

골룸이다.

골룸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골룸은 수시로 분열된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 프로도를 죽이고 프로도 목에 걸린 절대반지를 빼앗으려고 탐욕스러운 얼굴을 하며 살기어린 눈으로 프로도를 노려보는 사이코 같은 모습의 골룸과..

갑자기 "아니야 이건 아니야..내가 프로도에게 그런 마음을 갖다니.."라며 뭔가 양심(?)적인 모습을 보이는 골룸의 모습이 그것이다.

앞 모습은 자존심 강한 골룸의 모습, 후자의 모습은 양심이 남아 있는 골룸의 모습이다.

그러나, 결국 골룸이 택한 인격은 전자였다.

그래서 결국 프로도의 손가락을 이빨로 자르고 대신 그 절대 반지를 손에 쥔 채 지옥불 같은 유황불로 떨어져 죽고 만다.

자존심의 최후는 '비참'이다.

물론 위안부 할머님들 같은 경우는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셔야 하고 국가가 이 분들의 자존심을 지켜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이야기하는 자존심은 그런 공적인 차원이 아니라 지극히 사적인 차원, 내밀한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자존감이 낮다.

지나친 자존심은 어린 시절 상처나 왜곡된 돌봄을 통해 만들어진 결과물이지만, 자존감은 정상적으로 사람이 추구하는 자아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존심 강한 사람들은 자존감을 돌보라고 권하고 싶다.

자존감이란 자기를 존중하는 감(感)이다.

어쩌면 자존심은 아무도 나를 돌봐주지 않기에 자기 스스로 이 악물고 만들어낸 자기의 결과물이지만,

자존감은 부모의 칭찬이나 격려, 사랑과 인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형성된 자기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자 그렇다면..부모가 그런 자존감을 심어주지 못했다면 어쩌란 말인가..

그런 사람은 그저..자존심만 갖고 인생살이를 해야만 할까?

늘 말하지만..아니다.

그렇지 않다.

자기 스스로 자기 자존감을 "만들고 형성"해 내야 한다.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게 가능해지면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존심 세우는 거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존감을 세우는 일은 매우 어렵고 힘들다.

큐빅 다이아가 자존심이라면 진짜 다이아는 자존감이다.

자존감이 높으면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다.

내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링컨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는데 사실 그의 삶을 살펴보면 자존감이라는 것이 형성될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한 마디로 자존심만 센 사람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존심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자존감 높은 사람으로 자신을 만들어 놓았다.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 남부군에 속한 의원들이 링컨을 폄하하면서 얼굴이 너무 길고 못생겼다고 하자 "제가 얼굴이 둘이 있었다면 이런 얼굴을 하고 나왔겠습니까?" 라고 셀프 디스를 했다.

한 번은 너무 낡은 구두를 신고 다니는 링컨을 조롱하자 "이게 낡아 보이지만 제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수제 구두라 아직은 튼튼하답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피해의식 가득한 의원들 속에서 정말 진흙 속의 연꽃처럼 고고하게 자신의 자존감을 지켜내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보호하였던 것이다.

내가 링컨이라면 아마도..ㅎㅎ..

사람들을 동원해 나를 망신 준 놈들의 얼굴을 뭉개놨을 것이다.

내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말이다..

(내 수준이 그렇다..)

그렇다..복수심은 자존감의 결과가 아니라 자존심의 결과이다.

그러나 자존심으로 승부해서 인생이 행복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음을 기억하자.

나와 약간 닮은 최민식이 열연한 올드보이..

이 영화를 보면 자존심 강한 유지태(이우진역)와 최민식(오대수역)의 비극적 결말을 본다.

자존심은 비장함이 가득하다.

그러나 뭔가 마음이 편하지 않다.

자존심은 불교로 말하면 업(karma-業)이다.

자기 업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자존감은 업이 아니다.

그건 덕(德)이다.

자존감이 강해도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만..

그러나, 건강한 자존감이 바탕이 된 자존심은 상처와 예의를 구별할 줄 안다.

자존심은 자기 의(義)가 강하지만, 자존감은 자기 의(意)만 드러낸다.

자존심 센 사람들에게 가장 큰 약점은 분노이다.

분노 표출이다. 분노를 터뜨린다.

분노는 터지게 되어 있지만 터지는 중에도 분노의 이유를 설명할 수도 있을텐데 자존심 강한 사람은 분노를 느끼는 순간 설명을 묵살한다.

그래서 일방적이 되고 그로 인해 관계는 영구히 깨어진다.

그래서 자존심 센 사람들 주위에는 사람이 없다.

자업자득 인생이다.

자존심 센게 무슨 죄가 되겠는가..

그건 아픔이요 상처일테니 말이다.

다만 거기서 머물면 안된다. 위험해진다.

삶이 자꾸 꼬여만 가게 된다.

자존심을 꺾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말도 있다.

잘못된 말이다.

그만큼 내세울 게 없는 인생이라는 반증 아니겠는가!

70억 인구 중 자존심 없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자존감 높은 사람들은 찾기가 어렵다.

그만큼 우리 가정과 학교, 사회가 상처로 가득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각자의 자존감을 키워주는 일이 참 중요하다.

자존심은 늘 억울하다.

그러나 자존감은 늘 평안하다.

마음에 3도 화상을 입은 상태가 예민한 자존심이고, 마음에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한 자의식 상태가 자존감이다.

나는 전 국민이..인생의 어느 시점에 자신의 자존심과 자존감 문제를 한 달 정도 심도깊게 숙고할 수 있는 국민적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국민들의 성숙도가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며 행복도도 높아져 있을 것이다.

자존심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체득되는 자의식이지만..

자존감은 아쉽게도 좋은 부모 만나서 그렇게 주어지든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 나가야 만들어지는" 자의식 이든지..그렇기 때문이다.

억울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자존감의 추구는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는 하드웨어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가치가 있다.

자존심만 강하게 만드는 지금의 사회구조 속에서..

자존감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그것은 정말 개개인에게 주어진 운명의..숙제와도 같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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