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네 자신을 알라

Joyfule 2024. 2. 27. 01:10


   네 자신을 알라(롬7:18-25)



철학이 아무리 스스로를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으니 자신을 알기를

포기하고 그만 실용주의로 변질이 되어 꿩 잡는 게 매다 하는 식의 논리로

전 세계가 소유와 기능과 역할에 값을 매기는 사고에 매몰되었습니다.

교회가 지금 침체 상태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리는 것은 말세의 징조이기도 하지만

복음의 나팔이 분명하지 않아서 세상인지 교회인지 분간이 힘들기 때문인 이유가 큽니다.

역사적으로 원칙과 정의를 지키는 영웅은 많지만 바울과 같이 인간이 왜 가능성이

제로인 완전히 타락한 진흙덩이인가를 알려주는 교회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Q. 왜 인간의 의를 넝마와 같은 가요?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7:18)

 

A. 타락한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의 의는 선악의 독성에 중독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왜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흠이 없는 바리새파이지만 율법으로는

의를 얻을 수 없는 이유를 이제 알았습니다(I know)고 실토를 합니다.

그 내용은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없구나 하는 사실입니다. 오직 원함은

항상 내게 있지만 선을 행함을 내게 없는 걸 내가 이제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

 

천성적으로 인간이 악하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입은 부지런 한데 몸은 한 마디로 악하고 게으르다는 뜻입니다.

머리 따로 몸 따로 움직이니 이를 두고 성경은 중풍병자라고 말씀합니다.

 

Q. 머리 따로 몸 따로의 원인이 뭔가요?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7:20)

 

A. 로마서 7장이 아담 안에 있는 죄인의 인간심리학이라는 근거입니다.

머리 따로 몸 따로의 원인이 내가 아니더라는 겁니다.

여기서 드디어 구원의 희망이 보입니다. 내가 전부 그렇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내가 아니고 내 속의 죄이기 때문에 이 죄만 처단하면

나는 해방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자기가 다 행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다 갚아야 되고,

자기가 잘못 되면 자기가 고쳐야 되니 도무지 희망이 없습니다.

그중에서 엑셀레이터와 브레이크를 잘 사용하는 사람이 돋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선함은 항상 내 옆에 있지만

그렇게 안 되는 요소가 있는데 그건 죄에 붙들려서 따라 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나의 문제라면 내가 죽어야 끝이 납니다.

그러나 내가 아니고 죄가 문제라면 그 죄만 쫓아내면 해결이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이해하고 아담에게 속해 있다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믿고 그와 합하여 세례(침례)를 받아 죄와 상관이

없는 그리스도 안으로 건너와서 하나님의 의를 얻은 사람은 담대하게

‘나는 너의 종이 아니야.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야’하고 인격적으로 쫓아내야 합니다.

이제 주인이 바뀌었고 소속이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입에 냄새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원인인즉 충치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이빨만 빼면 냄새가 안납니다.

온몸이 다 냄새가 나면 희망이 없어요, 죽어야 끝이 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내 자신이 몹쓸 놈이 되면 내가 죽어야 끝이 나지만

내 속에 있는 죄가 문제면 죄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면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가 떨어져 나갑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면

예수 죽음에 나를 동참 시킨 것이고 예수그리스도의 그 부활에

나를 함께 참예(메토코이) 시킨 것입니다.

주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믿음에 의해 내 속에 있는 내용이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과 세례와 성찬입니다. 그걸 모르고 아무리 열심을 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느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이 말은 타고난  양심의 가능성입니다. 

모든 종교가 이 가능성을 개발하고 있잖아요.

딱 하나 문제는 악한 것이 그와 함께 있는 점입니다.

이것만 내게서 축출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과 바꾸면 되는 겁니다.

 

사과나무가 자기 맘대로 열매를 바꿀 수 없습니다.

사과나무 본성으로 사과가 열릴 수밖에 없습니다.

탱자가 자기 기분에 따라 귤을 맺을 수 없지요.

이걸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니 죽을 때가지 안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본성의 죄를 생명의 성령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Q.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희망이 없는 이유가 뭡니까?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2-23)

 

A. 언제나 인간의 내적인 존재는 하나님의 법을 좋아합니다.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다 좋아합니다.

다만 실제로 그렇게 할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왜? 그 속에 있는 죄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내가 봐야 합니다. 분명히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아침에 QT를 하지만 오후만 되면 아이스크림 녹듯 사라지는 거잖아요?

그래서 진정한 묵상은 그리스도의 동선을 믿음으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시1편)

한 다른 법을 내가 본다는 그 내 마음의 법이라는 말은 나의 가치관,

사고방식, 고정관념, 잠재의식 그리고 지식 등등을 총망라 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법이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 잡아온다는 것은

선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또 내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음에도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내가 본다는 말입니다.

이게 뭐냐 바로 나의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입니다. 

우리 속에서 안팎이 싸우면 항상 육신이 이기고 맙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싸우면 항상 이스마엘이 이깁니다.

그건 이스마엘이 힘이 더 세기 때문입니다. 13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어요.

이삭은 육신으로는 싸우기만 언제나 지게 됩니다.

이게 바로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이삭이 젖 뗄 때에

이스마엘을 쫓아 내버립니다(갈4:30) 사라가 인간성이 못된 것일까요?

믿음으로 한 것입니다. 믿음입니다. 사라는 믿음으로 이스마엘을 쫓아냈습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 내 버립니다.

내적원수인 육신으로 난 자를 축출합니다. 그 다음에 외부의 적인 그랄 왕 아비멜렉과는

평화 조약을 맺습니다. 그 다음에 아브라함이 창22장에서 이삭을 드리는 사건이 나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내적으로 평화를 얻고 또 외적인 평화도 얻고.

그리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한 지체의 법, 이 죄의 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 쫓겨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참 평안이 옵니다.

 

Q. 죄를 지닌 인간의 유일한 구원의 길은 뭡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4-25)

 

A. 자신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져야 합니다.

아이쿠 하는 소리가 나와야 합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탄식이 나와야 합니다.

다만 희망이 있다는 점은 드디어 나의 진면목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된 것처럼 하나님의 약을 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잘 하려고 해도 마음뿐인 자신이 스스로 구원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이런 인간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의 성령이 계심을 알고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분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육체로 계시지 않습니다. 

바울은 내가 스스로 혼자 행할 때는 내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육체로는 죄의 법을 섬길 수밖에 없더라 하고 중풍병자인 자신을 고백합니다.

자신도 모르는 순간에 죄의 종노릇하고 있더라 이제 내가 이걸 발견 했다는 외침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자기 스스로 하도록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죄를 지을 때도 내가 아니고, 의롭게 된 것도 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의롭게 된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여김을 받았을 뿐, 

내가 잘 나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닌 겁니다.

 

만약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았으면

그 의가 나를 주관하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가 나를 주장하도록 하십시오.

그것만 계속 바꾸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로 말입니다.

왜 내가 잘하려고 해야 합니까? 이전에는 내가 잘 하려고 해서 망했으면

이제는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일하시도록 하세요. 나를 십자가로 처리하십시오.

내속에 안 되는 나를 숨겨 놓고 변명하며 잘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까치발로 버티어 보려고 노력해 봐도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몽땅 어두움의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에 빨리 항복하는 것이 빨리 행복해 지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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