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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각종 기록과 에피소드

Joyfule 2006. 12. 12. 01:06
(::‘최고 영예의 상’ 각종 기록과 에피소드::)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이 잇따라 발표되면서, 지난 한 주 세계의 눈길은 스웨덴으로 쏠렸다. 1901년 첫 시상 이래 어느새 105년, ‘세계 최고 영예’를 자랑하는 상답게 그 뒤에는 각종 기록과 숨겨진 이야기도 많다.

평생 한번만 받아도 국가 전체의 영예가 되는 이 상을 두번씩 받은 사람은 영국의 프레데릭 생어(1958·80년 화학상) 등 4명이 있다. 세번 수상한 것은 국제적십자위원회(1917·44·63년 평화 상)가 유일하다. 스웨덴의 다그 함마르셸드(1961년 평화상) 전 유엔 사무총장과 작가 에리크 카를펠트(1931년 문학상)는 수상자로 뽑힌 뒤 세상을 떠 ‘사후 수상’ 기록을 세웠다.

‘퀴리 집안’ 5회 받아 최다 영예

#1. 부부, 부자, 형제, 모녀… ‘노벨상 가족’

부자 수상은 1915년 물리학상을 함께 탄 영국의 윌리엄 브래그로렌스 브래그 등 4쌍이 있었다. 당시 25세였던 아들 로렌스는 역대 최연소 수상 기록도 갖고 있다. 네덜란드의 얀 틴베르헨과 니콜라스 틴베르헨 형제는 1969·73년 각각 경제학상과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부부 수상자는 피에르 퀴리(사진 왼쪽)와 마리 퀴리(1903년 물리학상·프랑스·오른쪽) 등 세 커플이 있다. 퀴리 집안은 노벨 메달 5개를 받아낸 ‘노벨상 가족’. 마리 퀴리는 남편과 함께 물 리학상을 받고 1911년 단독으로 화학상을 탔다. 첫 여성 수상자 이자 두번 상을 받은 유일한 여성이기도 하다. 두번째 여성 수상자는 1935년 남편 프레데릭 졸리오와 함께 화학상을 받은 마리의 딸 이레네였다.

모녀가 받은 것은 이들뿐이다. 과학 분야 노벨상의 산실로는 미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이 꼽힌다. 연구소로는 올해 물리학상 수상자 테오도어 헨슈 등 16명을 배출한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를 들 수 있다. 연구소의 이름이 된 막스 플랑크 자신도 1918년 물리학상을 받았다.

‘DNA 연구자’ 화학·평화 2관왕

#2. DNA 2중나선 놓치고도 2번 수상 라이너스 폴링

‘비운의 과학자’로 불리는 미국의 폴링(사진)은 1951년 단백질의 알파 나선구조를 처음으로 밝혀내는 획기적 성과를 올렸지만 이듬해 잘못된 ‘3중 나선’ 모형을 발표, DNA 분자구조 규명의 영예를 놓쳤다. 그의 발표 직후 영국의 프랜시스 크릭과 미국의 제임스 왓슨(1962년 생리의학상)이 2중나선을 공동 발견해 20세

기 생물학계 최고 스타가 됐다. 하지만 폴링은 다른 연구를 통해 1954년 결국 화학상을 탔다.

폴링의 DNA 연구가 막판에 부진했던 것은 반전반핵운동에 참여하느라 연구에 전념하지 못했기 때문. 반전 시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No More War(전쟁은 이제 그만)’라는 구호는 폴링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그는 매카시즘의 거센 공격을 받아 외국 학술 대회 참석이 금지됐었으며, 노벨상 시상식에조차 가지 못할 뻔했다. 반핵운동으로 1962년 다시 평화상을 받았으나 재직중이던 칼 텍에서는 축하행사 한번 열리지 않았다.

표절로 수상하고…뒤늦게 인정받고…

#3. 퇴짜맞은 학위논문으로 노벨상을 탄 루이 드브로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스위스)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업적이 ‘상 대성 이론’이 아니라는 사실은 유명하다. 아인슈타인은 1921년 양자이론으로 물리학상을 받았다.

프랑스의 드브로이(사진)는 1925년 ‘만물의 이중성 이론’을 소르본대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냈다가 “너무 철학적”이라는 이유로 퇴짜맞았다. 그러나 이 논문은 4년 뒤 그에게 노벨 물리학상 을 안겨줬다.

하지만 노벨상을 둘러싼 시비도 많다. 덴마크의 요하네스 피버거는 “기생충이 암을 일으킨다”는 논문으로 1926년 생리의학상을 받았지만 뒤에 오류임이 드러났다.

1933년 생리의학상을 받은 미국의 토머스 모건은 제자 허먼 멀러의 논문을 표절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초파리를 이용해 ‘유전자 지도’를 처음 만든 사람은 멀러라는 것이 정설이다. 멀러는 사회주의 우생학에 매료돼 옛 소련으로 갔다가 크렘린 독재에 실망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냉전시대가 낳은 또하나의 불행한

과학자. 1946년 마침내 업적을 인정받아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사르트르·레득토 등 수상 거부

#4. 간디는 왜 평화상을 받지 못했나

인도의 마하트마 모한다스 간디는 1937년부터 1948년 암살되기 전까지 5차례 평화상 후보에 올랐었다. 평화의 상징인 간디가 수상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비유럽인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는 설, 평화상을 심사하는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영국 눈치를 봤다는 설 등이 있다.

노벨위원회 기록을 보면 당시 심사위원 1명이 인도에서 간디가 우상화되는 것에 불만을 나타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까 지만 해도 평화상이 구미인들에게만 주어졌다는 점은 위원회측도 인정한다. 1989년 노벨위원회 위원장은 달라이 라마에게 평화상을 주면서 “이 상에는 간디에 대한 경의도 들어 있다”고 뒤늦 게 언급했다.

수상자로 선정됐는데 거부한 이들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958년 문학상·소련)와 장 폴 사르트르(1964년 문학상·프랑스)를 비 롯해 6명이나 된다. 베트남(당시 월맹)의 레득토(1973년 평화상 ·사진)는 전쟁을 일으킨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과 공동 수상자로 결정되자 수상을 거절했다. 1938~39년에는 독일 과학자3명이 히틀러의 지시로 수상을 거부했다.

상을 받지 않아도 이들의 이름은 노벨상 선정자 명단에 실리며, ‘수상 거부’가 함께 표기되고 상금은 노벨 기금으로 환수된다.

18K에 도금 메달…상금 13억원

#5. 노벨상 메달은 18K

노벨상 메달은 순금이 아닌 18K이고 표면에 24K로 도금돼 있다. 상금액은 기금 운용 실적에 따라 매년 조금씩 달라지는데, 1901 년 첫해 상금은 1만5000크로나(약 2500만원)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상 1개 당 13억원 수준으로 높아졌다.

수상자 선정위원회는 부문별로 1000명씩 총 6000명에게 후보를 추천받는데, 스스로를 추천한 사람은 추천위원 자격을 박탈한다. 평화상 이외 분야는 개인에게만 시상하며 상별로 2개 분야 3인 이하에게만 상을 준다. 선정 시점에 생존하고 있어야 대상이 된 다. 일단 수상자가 결정되면 번복은 불가능하다.

‘노벨 수학상’은 왜 없을까. 이론과학에 관심이 없었던 알프레드 노벨은 “발명이나 발견에 상을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노벨이 자기와 연적 관계였던 당대의 수학자 고스타 미타그 레플러를 꺼려 수학상을 만들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스웨덴인 노벨이 어째서 평화상을 선정하는 노벨위원회만 노르웨이에 설

치했는지에 대해서도 추측이 분분하지만, 노벨은 생전에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구정은기자 koj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