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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운동과 기독교문화

Joyfule 2019. 5. 14. 21:51

 

    

     뉴에이지운동과 기독교문화

 

크리스챤 포스트 발췌 - 더글라스 그루튀스


뉴에이지는 이제 단순한 방관자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조차도 일시적인 유행그 이상의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즉,뉴에이지는 지위의 고하,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생활 전반에서 사람들을유혹하는 중요한 문화사조가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뉴에이지의 본질적인 주제인 자기 신격화(self-deifying)는 개인은 물론 조직,단체,사상에까지도 그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있다.

셜리 맥클레인(Shirley Maclaine)이나 존덴버(John Denver)와 같은 유명 연예인과,프리쵸프 카프라(Fritjof Capra)와 같은 물리학자, 사업가인 에르나 어하드(Werner Erhard)와 같은 이들은 뉴에이지와 관련된 서적,잡지,신비치료요법,정신요법 세미나들을 확산,장려하고 있다.

문화의 모든 영역이 뉴에이지에 의하여 잠식되어가고 있다. 급격히 확산되는뉴에이지의 문화적 영향력에 대해 기독교는 처음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이제는 그것을 숙고하고 분석하여 폭로함으로써 그 실체를 밝히는데 진력하고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일련의 대응책들은 극히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뉴에이지에 관한 연구는 수박겉핥기식에 그치고 있는 실정인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연구의 목적이 성도들로 하여금 뉴에이지에 관한 경각심을 갖도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추어진 사실들을 들추어 냄으로써 사람들의 이목을끄는데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뉴에이지운동에 대한 단호하고도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또한 효과적인 대응을 위해 우선 우리가 얼마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성경적인 이해를 분명히 해야 한다.

 

- 문화란 인간적인 것 -

 

`삶의 양식(Way of life)'을 단적으로 표현하면 문화가 된다.즉 문화란 인간이 어떻게 자기자신과 주변환경 그리고 하나님과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 가느냐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문화는 풍속,도덕윤리,관습 그리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모든 것들을 포괄한다.자연과는 달리 문화는 인간의 힘이 가해진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원을 이용하여 명백한 인간의 흔적을 남긴다.하나님께서는 금을 창조하셨고 인간은 그것을 이용하여 금반지를 만들고, 십자가를만들고, 부처상을 만들기까지 한다. 즉 문화란 하나님의 창조를 인간의 손길로재창조하는 것이다.

문화는 그 형성자들의 종교에 따른 세계관에 의하여 좌우되므로 헨리 반 틸(Henry Van Til)은 "문화란 형체화된 종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계관도주위 문화의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성경은 우리의 사고를 문화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하도록 명령하며,성경의 특별한 문화에 그것을 적용시킬 방법을 모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뉴에이지의 거센 물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성경은 대략 3가지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분리(Separation),변형(Transformation),보존(Conservation), 이것들은 뉴에이지에 대항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들이며 이들 3자간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결국 뉴에이지의 세력 앞에 굴복하고 말 것이다.

 

- 구별된 사람들 -

 

성경으로 양육된 크리스챤이라면 누구든지 뉴에이지나 모호한 밀교(비교) 등과의 접촉을 단호히 배격함으로써 그것들과 분리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들사이에 행해지는 접신술(강신술),이에 따르는 최면상태(trance)등에 대해 성경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신명기 18장은 여호와께서 이들을 가증히 여기시므로 이러한 것들을 너의 중에 용납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가증한것들'에 오염되어 심판을 자초하지 않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앞서 언급한 `분리'는 그들에게 물들지 않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이교도들로부터 분리하여 특별한민족으로 세우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게서 분리되지 못하고 그들에게 동화되어 `영적간음'을 범했을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심으로 그 백성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죄악된 문화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모든 죄로부터 분리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므로 우리도거룩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매우 강조했는데 그는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사랑치 말라"고 가르쳤다. 요한은 세상 자체를 기피하거나 인간의 모든 문화를배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그가 의도했던 바는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멀리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거듭하여 가르쳤던 `순종'의 의미는 악은 어떤 형태든지 버리는 것이었다. 즉 그것과 분리되는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 6장24절에서는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버림받은자,죄인들과 함께하셨지만 그는 어떤 종류의 문화적인 죄에도 굴복치 않으셨다.

 

`분리'는 뉴에이지에 대항하는데 있어 결정적인(매우 중대한)주제이다. 뉴에이지의 세계관은 기독교의 그것과 완전히 대조된다.양자는 융화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뉴에이지를 동시에 수용할 수는 없다.반드시 한가지를 선택해야한다.

복합적인 문화권내에서 생활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신앙이나 신념을 반박하는것이 무례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외쳐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악과 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이 죄에 거하도록 내어 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분리'되어야 한다.거듭 강조하지만 분리,변형,보존이 상호보완의 균형을 잃게되면 정상적인 문화의 발전에 참여하지 못하고 고립되고 소외되는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 탈환의 무대(장) -

 

예수는 구세주이다.그는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담당함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를 회복시키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수 있도록 해놓으셨다.

이것은 곧 우리가 `변형(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했다.그는 우리들 각자에게권고하고 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이것은 확연히 구별되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요구하는 것이다.

 

`분리'는 타락한 문화가 우리에게 주는 죄의 유혹을 피하라고 경고한다.

`변화'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에서 분리되어 기독교적 세계관을 문화에 적용시키토록 용기를 준다.태초에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아담과 하와에게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위임하셨다.

철학자 캘빈 시블드 (Calvin Seerveld)는 그의 저서 `타락한 세상에 세우신하나님의 언약'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 인간은 이 땅을 다스리고,복종시켜 쓸모있게 만들고,그곳에 거하는 모든 창조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초석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부름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여 `야훼'라는 자신의 이름을 우주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울려보내도록 하시기 위해 인간을 선택하신 것이다."

 

그 소명은 지금까지 철회되지 않았다.그러므로 우리는 강탈자 사탄에게 빼앗긴 영토를 탈환하기 위해 계속 전진해야 한다.

기독교는 이 세상 자체를 궁극적인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고 빼앗긴 것을수복하는 `탈환의 무대'(theater of redemption)로 보고 있다.

우리는 "주님의 나라가 임하시고,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 주님의 나라는 현재와 미래 모두에 실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일하는 것이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라는 것은 예수를 통하여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여, 악과 대항하여 싸워 이김으로 죄에 거하던 인간을 다시 찾도록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악에서 분리되고 그것을 저주하는 것은 단순한 소극적 반응이 될뿐이다.악의 왕국은 항상 그 세력을 확장시킬 방법을 찾고 있다. 사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포기해버린 타락하고 세속적인 땅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성스러운 하나님의 나라까지도 무자비하게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다.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포기해 버리면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그것을 취할 것이다.

교회가 사탄의 공격에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습을 가하는 것뿐이다.

교회가 아무런 능력도 없이 그저 유지되고 보존되는데 그친다면 교회의 존재의미는 무엇인가? 교회는 사회를 변혁시키는 수고를 해야한다. 우리가 세상과의싸움을 그만둔다면 교회가 세상과 짝하게 될 날은 멀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크리스챤의 역동적인 힘이 세계를 변화시켰음을 말해준다.

퇴락해가는 로마제국의 문화적 혼란속에서도 숭고한 가치관을 지녔던 초대교회는 노예의 인간적인 가치를 일깨우고 그들을 해방시키려고 노력했으며, 로마시민들이 즐겼던 야만스러운 오락(경기)에 대해 경고했으며,기독교적인 최고의사랑으로써 로마의 부패한 문화를 개선시켜 나갔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세계를 변형시키고 서구 문명이 발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후에도 기독교는 정치적,종교적 자유의 획득과 문학,교육,의술,예술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노예제도의 폐지,낙태금지 등의 사회개혁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하는 능동적인 힘은 역사상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으며,오늘날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어떠한 경우든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로부터의 분리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것을 개선하고 변형시키고자 하는 소명(책임)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부분적 진리의 보존 -

 

`분리'와 `변화'외에 크리스챤에게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문화의 영역들은 지키고 `보존'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점점 죄에 의해 오염되어 가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몇몇 문화의 영역들은 존재하고 있다.이러한 문화 영역들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부분적인 진리를 내버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보존'의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성경에 비추어 진리라고 판단되는 것을 추려내어 유지시키는 것이 바로 `보존'이다. 이해를 돕기위해 일례를 들어보자.

뉴에이지가 주장하는 것들 중 일부분은 참으로 구제할 수 없을 정도의 사악한 것들이다.그러나 뉴에이지와 관련된 모든 것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뉴에이지의 어떤요소들은 기독교적 진리와 일치하고 있으므로 보존되어야 한다.즉 기독교 심리학자와 뉴에이지의 심리학자 양자 모두는 유물론에 반대한다.

인간은 어떤 기계나 동물보다도 가치있으며,그러한 인간은 `영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인정한다.즉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에 공감하는 것이다.

물론 양자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복종할때만 인간에게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뉴에이저(뉴에이지 운동가)들은 인간 자신이 신이 될 때 인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부여된다고 주장한다.

-(옛날부터 통상적으로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거짓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참된 것을 부분적으로 들여와서 내세웠었다. 그런데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라고해서 참된것까지 몽땅 거짓된 것이라고 몰아세운다면 심각한 오류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 6가지 오류 -

 

지금까지 설명한 `분리',`변화',`보존' 이들 3자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유지될때,우리들은 매우 효과적으로 뉴에이지와 맞서 싸울 수 있다.이 균형이 깨지면 각각 다른 6가지의 정신적 덫에 걸려 헤어나올 수 없게 된다.

 

 

첫째 `검역의 오류'(the quarantine mentality)이다.

 

이는 `분리'의 의미를 지나치게 의식할 때 생기는데, 이러한 오류에 빠진 자들은 뉴에이지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악한 것이라고 단정해버림으로써다른 모든 크리스챤들에게도 자신들과 동일한 부정적인 선입관을 갖게 한다.

이렇게 되면 `분리'의 개념만이 너무 확대되어 `보존'과 `변화'의 개념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둘째 `금기(taboo)의 오류'이다.

 

오늘날 뉴에이지는 우리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즉 뉴에이지가 파고들지 않은 영역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영적,지성적인 식별력은 그것이 뉴에이지와 관련된 것이냐 아니냐를 따지는데에도 기진맥진하게 된다.터부시 해야 할 뉴에이지와 관련된 사람,행위,사상에 대하여 긴장하고 주의하다보면 우리는 너무나도 피곤하고 지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뉴에이지와 관련된 것들에 대해 의도적이고 단호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크리스챤이라면 누구든지 심령치료,점성술,신비적 치료요법과 같은 것들에 참여해서는 안된다.기독교에는 `해서는 안될' 많은 것들이 있다.십계명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금기의 오류'에 빠지면 건전한 분별력을 상실하게 되어 흑백논리에빠짐으로써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이 흐려지게 된다.-(즉 부분적으로 나쁜것인데도 전체를 나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화에 뉴에이지가 부분적으로 들어와 있는데도 영화 전체가 모두 뉴에이지라고 생각하고 영화 자체를 거부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셋째 `편집병적 오류'이다.

 

악을 분별하고 단절하는 것은 크리스챤의 미덕이다. 그러나 그 정도가 너무지나치게 악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악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미 덕이 될 수 없다.이러한 편집병은 뚜렷한 증거도 없으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뉴에이지와관련된 것처럼 몰아붙여 그들을 실족케하고 망쳐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성급한 비난이나 정죄는 교회내의 불화의 씨가 되어 뉴에이지의 세력 확장만을 돕게 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오류에 빠진자들은 `변화'를 수용할 인내나 능력이 부족하다. 그들의 두려움은 그들을 소극적으로 만들어 문화를 `변화'시키고자하는 시도를저해한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분리'의 의미를 오해하기도 한다. 즉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것이 아닌 양과 양사이를 분리시켜 버리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교회는 더욱 분열되고 그 힘이 점점 약화되는 것이다.

 

넷째 `병아리 오류'(the chicken little mentality)이다.

 

주님의 승천이후로 지금까지 크리스챤들은 세상 끝날에 있을 주님의 재림을고대해 왔다. 그것은 믿는 자들에게는 축복된 기다림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뉴에이지의 출현을 말세의 징조로만 촛점을 맞추는 편집병적 증상을 보인다. - (이 말은 이런 현상들이 말세의 징조일 뿐이므로 우리가 문화에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방관적 자세를 취한다는 말이다.)

이는 `편집병적 오류'와 마찬가지고 `변화'와`보존'의 의미를 상실시켜 버린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문화의 어떤 종류라도 포기하셨다고 추측하거나 단정지어서는 안된다. 때가 차면 하나님의 나라는 임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까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있다.

이러한 시각은 만유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지상 군대로서 전진하는 적극성을소멸시킴으로 교회의 비젼을 단지 몇몇 영혼을 구원하는 소극적인 것으로 제한시켜 버린다.세상 종말의 실현이 계속 지연되는 한 이러한 해석은 공허하며 무기력한 메아리가 될 뿐이다. 그것은 마치 부화되지 못하고 말에 그쳐버린 병아리와 흡사한 것이다.

 

다섯째 `타조의 오류'(the ostrich mentality)이다.

 

이것은 `변화'와 `분리'의 의미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온다.일부 크리스챤들은 뉴에이지를 단순한 허구로 간주하여 뉴에이지의 침투를간과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는 흡사 무지라는 모래 속에 머리를 박고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타조와 같다.

이와같은 무지는 영적인 무능력을 초래하여 뉴에이지의 정체를 밝히고 그에대항해나갈 힘을 잃게 한다.문제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상황을 개선할수는 없는 것이다.

 

여섯째 `카멜레온적 오류'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착각의 오류'와 흡사하다. 그러므로 `분리'와 `변화'의의무를 매우 잘못 이해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러한 오류에 빠지는 자들은 자신을 단지 유행에 민감한 사람으로 생각해버린다. 이들은 인기있는 뉴에이지의 사상이나 활동을 수동적으로 흡수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색깔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크리스챤 요가'`크리스챤 선(선)'과 같은 단어들에 접한다.이들은 서서히 온건하게 타협해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모두 참되다.그러나 반짝인다고 해서 모두가 하나님의 황금이 될 수는 없다.어리석은 자의 황금도 빛을 내기 때문이다.

 

- 절대적인 균형 -

 

우리는 `분리' `변화' `보존'을 균형있게 정비하여, 이들을 무기삼아 오늘날의 문화와 참으로 위험한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우리는 비판적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즉 세상의 문화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비추어 보고, 그에 준거하여 우리는 그릇된 문화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 또한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문화를 변형시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문화적인측면들을 보존해 나가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때 `문화의 주인'되신 하나님께서는 홀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출처: http://lectio.tistory.com/503?category=272943 [Lectio Divi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