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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2) 거룩한 자존심 (단 1:1-7)이한규목사

Joyfule 2010. 2. 12. 08:12

다니엘(2) 거룩한 자존심

다니엘 1장 1-7절


< 성도의 삶과 관련된 교훈 >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존심이 있습니다. 그 자존심이 잘못된 방식으로 지나치게 표현되면 그 자존심 때문에 실패하게 되지만 그 자존심을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자존심으로 승화시키면 그 거룩한 자존심은 사람을 가장 위대하게 만드는 초석이 됩니다. 본문은 성도가 어떤 모습으로 거룩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야 할지를 잘 교훈합니다. 본문이 주는 성도의 삶과 관련된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성도도 패배할 수 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유다 왕 여호야김이 나옵니다. 유다는 20대 왕인 시드기야 왕 때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는데 여호야김은 유다의 18대 왕입니다. 여호야김 왕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에워싸임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 세상 것에 의해 패배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가 바벨론 왕의 손에 붙여지게 됩니다. 즉 왕이 포로로 잡히게 되고 성전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훼손당한 것입니다. 그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 되겠습니까? 때로 하나님은 어떤 교훈을 위해 자녀에게 충격적인 패배의 순간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자녀의 패배는 항상 일시적인 패배일 뿐입니다.


  본문 2절 전반부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기구 얼마를 그의(느부갓네살) 손에 붙이시매.” 성전이 훼손당한 일이 겉으로는 느부갓네살에 의해 된 것 같지만 결국 그 일도 주께서 하셨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처럼 성전이 훼파된 것이 겉으로 보면 원망스런 사건인 것 같지만 속으로 보면 희망적인 사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패배 속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아무리 심하고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희망을 가지십시오. 성도의 징계는 잠시의 징계입니다. 비록 악의 세력이 대단하게 보여도, 여전히 하나님은 세상을 주관하십니다. 겉으로는 악이 이기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악이 선을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교훈을 위해서 잠시 악의 승리를 허용하신 것입니다.


2. 때로는 싫은 길도 가야 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지혜로운 식민지 정책을 폈는데 환관장 아스부나스에게 이스라엘의 왕족 및 귀족 몇 사람, 곧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만한 소년을 데려와 그들에게 갈대아(바벨론) 사람의 학문과 방언을 가르치게 했습니다(3-4절).


  또한 왕은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포도주를 주고 3년 동안의 동안의 기한을 통해 그들을 기르게 했습니다(5절). 그렇게 선별된 소년 중에 유다 소년인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는데, 그들의 이스라엘 식의 이름을 환관장 아스부나스가 바벨론 식으로 바꿨습니다(6-7절).


  다니엘과 세 친구의 원래 이름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벨드사살’로 개명되었습니다. 하나냐는 “하나님과 같은 분은 누구인가.”라는 뜻입니다. 그는 ‘사드락’으로 개명되었습니다. 미사엘은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메삭’으로 개명되었습니다. 아사랴는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아벳느고’로 개명되었습니다.


  스스로의 뜻이 아니라 강제로 이름이 바뀐 것이니까 얼마나 싫겠습니까? 그러나 살면서 원치 않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어떤 조직 속에 있으려면 자신이 싫어하는 일도 행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내세워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가볍게 거부하고, 사업상 만남을 가져야 하는 순간에도 자기의 원칙을 내세워 그 만남을 거부합니다. 그런 행동이 지나치면 물을 떠난 물고기가 될 수 있습니다.


  ‘물에 떠내려가지 않는 물고기’가 되기를 힘쓰되 ‘물을 떠난 물고기’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세상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3. 거룩한 자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름이 바뀌었지만 그들의 원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소중히 여기고 항상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려고 했습니다. 다니엘 후반부에 가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 8장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 다니엘이 이 이상을 보고.” 다니엘 9장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이 구절들을 보면 다니엘이 얼마나 자기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려고 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이 세상의 어떤 이름보다 소중한 이름입니다. 사실 대통령이나 장관이나 판사라는 이름보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훨씬 소중한 이름입니다. 그 이름을 소중히 여기면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이란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멋지게 살았습니다. 그처럼 세상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성도는 거룩한 자존심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시시한 것에 매여서 치사하게 사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하늘이 준 신성한 자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바울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26장 24절을 보면 베스도 총독이 바울에게 소리쳤습니다. “바울아 너가 미쳤구나. 네 학문이 너를 돌게 했구나.” 그때 바울은 자신이 미친것이 아니고 정신 차린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총독과 왕 앞에서 “당신들이 모두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29절). 사도 바울은 믿는 자의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최고 권력자에게 “나처럼 되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4절에서 베드로와 요한도 미문 앞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 있게 살았고, 자신 있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성도는 자기를 위해서는 자존심을 철저히 죽여도 하나님 안에서는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2가지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한 세상적인 자존심입니다. 그런 자존심으로 잘났다고 하면 존경을 못 받습니다. 인물이 잘났다든지, 많이 배웠다든지, 또는 세상적인 명예를 가졌다든지 해서 목에 힘을 주는 자존심을 가진 사람은 세상도 그를 존경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신성한 자존심과 하늘이 준 성도의 긍지를 가진 사람들은, 그 자존심 앞에서는 다 고개를 숙이면서 위대하게 봅니다.


  왜 사람들이 성공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결국 자존심의 충족이라는 목표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성공하려고 하는 이유는 자기를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위대함은 자기를 내세운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성한 자존심’입니다.


  바울이 포로로 있으면서도 총독과 왕 앞에서 “내가 이와 같이 결박된 것 이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했을 때, 그 말에는 “나는 산자다! 나는 깊은 비밀을 안  자다! 나는 영원을 품에 안은 자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항상 바울과 같은 거룩한 외침을 품고 사십시오.


  바울의 삶을 이렇게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즉 세상에서 가난하게 산다면 어떻게 고백해야 합니까? “여러분! 제가 가난한 것 외에는 다 저와 같이 되십시오!”라고 하십시오. 만약 병들었다면 어떻게 고백해야 합니까? “여러분! 제가 병든 것 이외에 다 나와 같이 되십시오.”라고 하십시오. 그런 고백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항상 거룩한 자존심으로 무장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