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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세계 속에서의 세계관 학습의 의미

Joyfule 2019. 5. 19. 08:40

 

       

    다원주의 세계 속에서의 세계관 학습의 의미

    -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기

김건주


우리는 다원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다양한 문화와 종교 그리고 다양한 삶의 양식이 공존한다는 의미에서도 다원적이지만 이런 다원성이 사람들에 의해 인정되고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다원주의적이다. 오늘날 다원주의가 세속 사회에 잘 들어맞는 행위의 유형으로 이해된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믿음의 유형이나 행위의 유형이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아니라 동시에 거부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이 다원주의 사회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일 민족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면에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고 있다. 그런데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다원성과 다원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특히 다원주의를 말할 때, 우리는 문화적 다원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물론 문화와 종교는 서로 깊이 관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란 어떤 관점에서 보면 문화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종교의 모든 면은 아니다. 종교는 기독교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이 다문화적일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종교들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부분에서 공통된 문화를 공유할 수도 있다.


문화적 다원주의란 한 사회 안에 여러 다양한 문화들과 생활 방식들을 환영하고 이런 것이 인간의 삶을 풍요하게 해준다고 믿는 태도이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한가지 단서를 달 경우에만 그렇다. 문화가 도덕적으로 중립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문화에는 좋은 요소도 있고 나쁜 요소도 있다.

한편 종교적 다원주의는 종교들간의 차이가 진리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다른 인식의 문제라고 믿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믿음에서 어떤 것은 옳고 어떤 것은 그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적인 믿음은 개인적인 문제이고, 각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가질 권리가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종교 다원주의이고,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우리는 지금 문화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 다원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아니 한국 사회는 이미 고대부터 그러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해 거듭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결국 세계관 학습은 우리 존재의 본질과 깊은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세계관 학습은 바로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본질적인 고민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때문에 진지해야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삶의 개선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세계관 학습은 결코 ‘머리’의 변화에 목적이 있지 않다. ‘머리’를 포함한 전인(全人)의 변화가 목표이다.

우리는 손이나 발이 잘려나간 사람은 상상할 수 있지만, 머리가 잘려나간 사람은 상상할 수 없다. 머리가 몸으로부터 잘려나갔을 경우 어느 쪽을 ‘사람’이라고 불러야 하고, 어느 쪽을 ‘잘려나간 부분’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세계관 학습은 온전한 사람이라 부르기 힘든 기형적인 존재를 양산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세계관 학습은 확실히 삶의 변화에 목표를 두고 있다.

우리가 ‘나는 믿는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내적인 감정이나 경험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에도 진리라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런 믿음에 우리가 헌신하고 있는가에 대한 시험대는 우리가 그것을 공표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그들의 판단을 구하려는 준비가 되었음을 말한다. 만일 우리가 이런 일을 하기를 꺼려하고 우리의 믿음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간직하려 한다면, 그것은 진리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기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한다는 것이 단지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단지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건강한 눈과 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의 몸은 그것이 실제로 기능하고 있는 동안에는 몸으로 의식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 있을 때, 우리는 눈을 의식하지 않는다. 다만 눈에 이상이 생겨 침침하게 보인다거나 문제가 생길 때 눈의 존재를 생각할 뿐이다. 그때에야 우리는 지각의 도구로서 눈을 통해 대상을 보아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단지 그것이 기능을 멈출 때, 그것은 몸으로 의식된다. 이렇게 대부분의 경우 몸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언제나 회상적인 경우가 많다. 세계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우리와 우리 삶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많은 경우 그 존재와 가치가 잊혀져 있다.

우리는 나쁜 시력을 소유하고 있을 때의 불편이 어떤 것들인지 잘 알고 있다. 심각한 시각장애가 가져오는 여러 결과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세계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의 출발이자 전부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소재로 제작 개봉되었던 애니메이션 영화 ‘이집트 왕자’에 삽입되었던 ‘이드로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용기와 희망을 잃고 그저 주어지는 삶을 맥없이 살아가는 모세를 향해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는 내용의 노래를 들려준다. 우리는 모세의 일생이 어떠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의 출발이자 전부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즉 거듭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새로운 출생’을 의미한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최고위층의 한 사람이었던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보면, 그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데 ‘거듭남’외에 다른 길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거듭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그가 소유하고 있던 것들도 나름의 가치를 지닌 것들이었지만 그를 거듭나게 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니고데모의 경우에서 보듯이 세계관을 포함해 우리의 진정한 변화는 거듭남으로만 가능하다. 태아가 출생을 통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듯이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의 변화의 전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출생을 통해 가장 기본적인 호흡법을 비롯한 자연의 법칙 아래로 들어가듯이,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종이 되는’ 모습을 보이셨다. 스스로 종이 되신 이후에는 오로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라와 의가 그의 인생의 목표와 내용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거듭난 사람 즉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인생의 목표이자 전부인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다름아니라 거듭난 생각을 하고 거듭난 행동을 하는 사람일뿐이다.

신약성경은 반복해서 사도들이 전하는 말과 세상 지혜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서로 모순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이런 모순의 현실이 놀랄 만큼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이 요한복음에 진술되어 있는 예수님과 당시 당국자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들이다. 그러나 마가에 따르면 그것은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며 하신 말씀 가운데 이미 내포되어 있다. 최초의 부르심은 회개하고, 돌이키고, 철저하게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이제까지 걷던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새로운 실재, 즉 바로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재하는 것을 인식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산상설교를 통해 ‘천국 백성의 길’과 ‘세상의 길’의 근본적인 차이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천국 백성의 삶을 주제로 한 산상설교의 첫 부분인 팔 복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다루신다. 천국 백성은 어떤 존재인지, 천국 백성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을 ‘마음’에 대한 가르침으로 시작하신다. 천국 백성은 천국 백성다운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마음은 놀라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능력까지 지닌 듯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큰 능력을 발휘하는 엄청난 실재인 마음은 볼 수도, 느낄 수도, 무게를 측정할 수도, 해부해 갈라 보일 수도 없다. 사전에 의하면 사이키(psyche)는 마음이라는 헬라어이다. 그리고 사이콜로지(Psychology)는 마음을 연구하는 과학의 영역이다. 그런데 마음에 관한 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만한 합의된 정의가 없다. 합의된 정의가 없다고 해서 마음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땅에는 마음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에 의하면 마음은 그리스도를 닮거나 악할 수 있다. 마음은 만들어지고 조작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은 아인슈타인에게 천재성을 주고, 베토벤에게는 창의성을 그리고 히틀러에게는 야만적인 잔인성을 주기도 한다. 마음은 우리 각 사람의 삶의 방식과 또 생각하는 방법에 영향을 끼친다. 마음은 타인이나 우리 자신에 의해 조절될 수 있으며 왜곡된 생각에 의해 뒤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배될 수도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일상 생활 속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마음은 우리가 인간의 생각, 앎, 그리고 감정에 대해 언급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마음’은 사고, 학습, 문제해결, 의지, 인식, 집중, 기억, 주의, 사상과 감정의 경험 등을 포함한 우리의 정신 활동의 총체를 의미한다. “전기”나 “중력”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없고, 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또 마음을 사용한다.

원래 성경 기록 언어인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 ‘마음’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영어 단어 “마음(mind)”와는 동일하지 않다. 킹 제임스 성경의 경우 여섯 개의 다른 히브리어 단어가 “마음(mind)”으로 번역되어 있으며, 때로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들이 “혼(soul)”, “마음(heart)” 그리고 “태도(attitude)”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것은 “마음(mind)”이 성경에 사용될 때 많은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때때로 그것은 “결심”에 대해 언급한다(느4:6). 구약 성경의 일부에서는 “기억”을 의미하기도 한다(사46:8,9; 애3:21-23). 신약 성경에는 “감정적인 안정성”에 관계된 예들이 나온다. 마가복음 5:15과 누가복음 8:35에 의하면,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셨을 때 사람들은 그가 “정신이 온전하여” 있는 것을 놀라고 두려워했다. 다른 곳에서는 “마음”이 “생각”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지적인 기민함을 의미하기도 하며 헌신에 대한 언급에서도 사용된다.

또한 성경 기자들은 마음을 묘사하기 위해 형용사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악한 마음, 어두워진 마음, 부패한 마음, 사악한 마음, 강퍅한 마음, 의심하는 마음, 육체의 마음 등이다. 때로 형용사들이 더욱 적극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자원하는 마음, 낮은 마음, 겸손한 마음, 온전한 마음, 순결한 마음, 새로워진 마음 등의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성경은 마음의 발전을 위한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이사야서는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면 “온전한 평강”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다른 여러 곳에서는 “한 마음”으로 연합해 함께 일할 수 있다면 우리 각자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성경 속에 나타나는 마음의 개념은 하나의 수동적 반사나 명상이라기 보다는 행동에 가깝다. 예를 들면, 근심스러운 마음은 근심스러운 행동을 낳는다. 어리석은 마음은 어리석은 일을 생산하고, 죄를 품은 마음은 하나님과 적대되는 일을 하게 한다. 부패한 마음을 가진 자는 다툼을 좋아한다. 우리는 근심하지 않도록 마음을 결정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조절될 수 있고 행동을 위해 준비될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며 우리의 인격을 형성한다. 지혜자는 우리의 사고가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며, 우리의 사람됨을 결정한다고 기록하고 있다(잠23:7). 이처럼 마음이란, 책에서만 토론될 수 있고 일상 생활 속에서는 무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생각하는 그 방식이 곧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며,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을 바라보는가 그리고 어떻게 타인과 관계를 맺는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한다.


그렇다면 세계관과 마음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세계관이란“사물에 대한 근본적 신념의 포괄적인 틀”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세계관이란 근본적인 신념(basic belief)의 문제이다. 즉 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런 본질적 성격 때문에 세계관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비록 자신의 세계관에 일관되게 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풍랑을 만난 배가 잠시 항로를 이탈하는 것처럼 지극히 일시적인 현상일 뿐, 우리의 삶은 세계관을 통해 결정된다. 마음의 기능과 거의 동일하다. ‘세계관’과 ‘마음’을 동의어로 사용한다고 해서 큰 물의가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의 학습이 학습답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분명한 차이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세계관’은 그 성격상 외부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하나의 체계로 객관화시킬 수 있지만, ‘마음’은 각 개인 속에 내면화된 것이어서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이제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제기되는 문제가 하나이다. 세계관이 이처럼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 기독교적 세계관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이 종교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 삶 전반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처럼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삶의 체계(life-system, Weltanschauung)로서 즉 세계관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관의 정의 및 성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우리의 세계관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성경에서 이끌어내야 한다는 바른 결론에 도달했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한 세계관을 소유했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우리는 세계관의 정의와 성격을 살펴보았을 뿐 결코 세계관을 하나의 ‘문화’로써 구체화시키지는 않았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는 완전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깨닫는 정도를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때문에 우리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성경적 세계관은 잠정적이다. 주께서 주시는 은혜를 따라 더욱 성숙시켜 나가야 한다.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우리는 균형을 잡으려면 앞바퀴는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다는 식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여전히 처음에는 넘어지고 만다. 그러다 갑자기 어떻게 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런 후에는 자연스레 언제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해 더 이상 골똘히 숙고하지 않아도 그냥 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제 내면화되어서 더 이상 그런 생각에 주의하지 않고 단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아직 배우는 단계에서 계속 넘어지지 있는 동안에는, 넘어지지 않고 두 발 달린 자전거를 타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받아 들여야만 한다. 자전거를 타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받아 들여야만 한다. 자전거를 타는 지식이 우리 속에 내면화되어서 우리의 지식의 일부가 되기까지 우리는 자전거를 타는 전통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이와 같은 원리는 수학이나 과학을 배우는 것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물론 세계관 학습에도 이 원리는 적용된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명백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짜 사실인지를 묻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쓰고 있는 안경을 벗고 새로운 안경을 쓰고 세계를 바라보라는 주문을 받고 있다. 만일 다른 안경을 통해 사물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는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이 찾아와서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을 이해하려 든다면 그는 어떻게 그 일을 하려 할까? 다음의 짧은 동화를 읽어 보라. 그리고 함께 생각해 보자.


삶에 지친 한 사나이가 맥없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신문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산타클로스 같은 차림을 한, 선하게 생긴 노인이 그에게 다가가 세 가지 소원을 말하면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사나이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아니 듣지도 않는다. 노인은 다시 한번 똑같은 말을 반말로 되풀이한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울적해 있던 사나이는 노인의 느닷없는 반말에 화가 치밀어 “악마한테로나 꺼지시오”라는 욕설로 첫 소원을 내뱉는다. 그 순간 노인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자신의 경솔한 행동의 결과에 마음이 다급해진 사나이는 서둘러 두 번째 소원을 말한다. “노인이 다시 나타나라”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짜 악마에게 갔다온 듯 얼굴이 온통 붉게 그을린 모습으로 노인이 다시 그 앞에 나타난다. 네 가지나 다섯 가지가 아닌 단 세 가지 소원 중 두 가지를 사나이는 불신의 대가로 치르고 만 것이다.

이제 남은 소원은 단 하나. “잘 있게. 너무 그렇게 불행하게 살지 말게. 그리고 자네의 마지막 소원을 주의하고”라는 말을 남기고 노인은 사라진다. 나머지 소원 하나를 어떻게 쓸 것인가? 사나이는 깨달았다. 희망 없는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가를. 그리하여 사나이는 평생 그 소원 하나를 행복의 햄처럼 가슴 속 깊은 곳에 아껴두고 베어먹지 않기로 한다. 먹지 않아도 배가 든든하고,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에겐 말만 하면 당장 이루어질 소원 하나가 있으니까.


이제 함께 생각해 보자. 왜 사나이는 자신의 인생에 참으로 엄청난 선물을 주기 위해 다가온 노인을 그렇게 대했을까? 선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그를 왜 노망들어 귀찮게 하는 노인으로밖에 여기지 못했을까?

우리는 만나는 사건이나 사람을 하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평가하는데 익숙하다. 쉽게 판단하고 평가하고 행동하는데 잘 훈련되어 있다. 무엇에 대해 누군가 탁월한 해석을 내리고 나면 우리는 재고의 여지없이 그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버릇을 소유하고 있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살이에 적응하다보니 어쩔 도리 없이 길들어진 습관일 것이다. TV나 신문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이나 기사들은 거의 의심 없이 받아들여진다. 그런 것들을 의심하고 질문을 갖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진다. 이미 우리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안경이 쓰여져 있다.

동화 속 청년의 경우 물론 자신 외의 타인에 대해 신경을 쓸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노인에 대해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은 이미 청년의 눈에 쓰여져 있던 안경 때문이기도 하다. 그 깊지도 넓지도 않고 늘 닫혀 있는 사고의 틀이 문제의 원인이 된 것이다. 


우리는 단어, 언어, 관념, 즉 우리가 사용하는 동안 무비판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 외에도 수학의 방대한 언어와 사전, 지도, 컴퓨터 같은 도구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고 전달하기를 원하는 의미들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동안 은연중에 의존하는 도구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도구들은 우리가 대개 문화라고 부르는 좀더 광범위한 실재의 일부이다. 여기서 문화란 함께 사용하는 언어와 공통의 이야기를 통해 가능해지는 모든 형태의 사회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들을 이해하고 배열하는 전체적인 양식이다.

이런 것들의 대부분은 출생 후 몇 년 동안 말하고 읽고 사람들과 공통된 이야기를 나누면서 배우거나 흡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은 그것을 그저 당연하게 여긴다. 그것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다.

청년의 예에서 보았듯이 쉽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습관, 이미 익숙해진 사회적인 편견들이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청년의 예를 통해 사회화의 역기능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세속화된 안경들(기준, 가치체계 등등)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들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안경들은 너무도 익숙하기에 ‘안경’이라는 느낌조차도 없다. 안경의 렌즈는 우리 눈의 렌즈가 수행하는 것과 똑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들은 우리의 일부이다. 우리는 그것 안에 머물고 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역사에 의해 형성된 전적으로 다른 문화와 언어를 접할 때에야 비로소 되돌아서서 우리가 항상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 사물들을 바라보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했음을 알게 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패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갓 태어난 신생아도 주변의 빛과 어두움의 형태를 조금이라도 인식하기 위해서는 눈의 초점을 맞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모든 인생의 단계마다 무엇인가를 탐구하고 알아내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헌신이 있어야 하고, 모든 단계에서 우리는 도구, 연장에 의지해야 하고, 그것들을 사용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들을 신뢰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그 도구들이 탐구되는 실재에 좀더 적합한 것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 도구들을 점검하고 고쳐 만들 준비가 있어야 한다. 그런 헌신은 개인적인 문제이고, 그것은 나의 헌신이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짓는 것은 우리의 세계관이다.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모든 다른 이들을 정복하고 예속시키려고 든다. 또한 자신을 이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이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해 다른 문화권들을 평가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을 정복된 희생자로 보는 이들은 주도적으로 어떤 일을 추진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정신 상태에 빠지거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자기에게 어떤 도덕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데에도 적용된다. 우리의 종교적 삶이 세상 속의 삶과 통합되지 못해 우리의 믿음이 개인화될 경우, 우리는 믿음을 통해 개인적인 위안은 얻지만 예수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은 감당할 수가 없다.

반면에 자신을 이 세상에 소망과 변화를 가져다주는 예수님의 심부름꾼으로 본다면, 바로 거기에서 이웃과 사회에 대한 봉사와 정의 구현, 세계 선교와 전도 활동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좁은 세계관을 택하는 이유는 시야가 좁아질수록 책임감을 적게 느끼고 도전을 적게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좁고 비성경적인 세계관은 우리의 상투적인 고정관념을 지속시키고, 하나님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며, 이 세상의 많은 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킨다. 좁고 이기적인 세계관이 이 세상의 현실을 외면하는 데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좁은 세계관에서 오는 안도감에만 집착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성경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좀더 진취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러한 선택이 우리 자신들이 어떤 기독교인으로 변화될 것인지를 좌우한다. 이것은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 힘쓰는 진취적인 기독교인이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변화시키라는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고 이 세계로부터 도망가는 기독교인이 되느냐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쓰고 있던 익숙한 안경을 벗고 새로운 안경을 쓰고 세계를 바라보라는 주문을 받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와 의를 위해 부름 받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을 명령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갈 것을 명령하고 계신다.

출처: http://lectio.tistory.com/519?category=272943 [Lectio Divina]